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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고대도시 시기리야

호남인1 2011. 12. 24. 11:04

 

 

 

 

Sri Lanka 의 고대도시 Siginya

 

스리랑카의 고대도시 시기리야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유적지. 1982년 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

 

 

이곳은 6세기경 절벽 위에 세워진 사자산(獅子山)이라는 고대 성채의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채가 세워진 암석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349m이며, 주변 평야를 기준으로 한 높이는 180m에 이른다. 477년에 카시야파 1세는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상부의 평지에 궁전을 세웠다. 정상에 오르려면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한다.

시기리야라는 이름은 사자산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다.

 

 

시기리야5세기 카사파 왕조 때의 수도로 고고학적으로 특히 가치 있는 유적지이다.

시기리야 요새는 예술가이자 정신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사파왕이 부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뒤 후환이 두려워 바위 꼭대기에 세웠다는 궁전터이다.

 

 

암벽의 높이는 200m.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시기리야 벽화 때문이다. 시기리야 벽화는 왕의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압사라라는 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이 '시기리야의 숙녀들'은 당초 5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훼손돼 18명만 남아 있다.

 

 

시기리야 벽화 아래쪽에는 '미러 월(mirror wall)'이라 불리는 회랑 벽이 있다. 달걀 흰자와 꿀, 석회 등을 이겨 칠했다는 '거울벽'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노래한 서사시와 시기리야 벽화의 여인을 칭송하는 시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이 시들은 신할라어로 씌여진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기리야는 사자를 뜻하는 '싱하'와 산을 뜻하는 '기리얀'이 합쳐져서 생겨난 말이다.

 

바위산이 있는 곳은 사방이 드넓은 밀림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세계 각국에서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들은 마치 미로처럼 바위 틈 사이로 난 돌계단과 철계단을 이용해 바위산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밀림 한가운데 솟아 있는 바위산은 473년에 부왕인 다세나를 죽인 아들 카샤파가 왕세자이자 이복동생인 모갈란의 복수가 두려워 세운 임시 왕궁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또한 이 바위산에는 무력으로 왕이 된 카샤파가 아버지 다세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당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는 벽화가 1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일설에는 왕을 따라와 팔자에 없는 객지생활을 하게 된 병사들이 고향에 두고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미녀 21명이 벽화로 그려진 바위벽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옛날에는 정원이 있었다는 넓은 공터가 하나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이 새겨진 왕궁 출입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마침내 옛 왕궁이 있었던 꽤 넓은 정상에 서게 된다.

 

 

바위산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커다란 돌을 깎아서 만든 왕좌가 놓여 있다.

아마도 카샤파는 바위산에서 11년을 사는 동안 이 왕좌에 앉아 불안한 상태로 연회를 감상하거나 깊은 사색에 빠지곤 했을 것이다.

왕좌 아래로는 야외 목욕탕을 연상케 하는 대형 수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훗날 동생 모갈란의 공격을 받고 생을 마감한 그의 운명처럼 7년 공사의 결실인 왕궁 건물의 흔적도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시기리야의 들머리 구실을 하는 담불라는 2000년 된 석굴사원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진 명소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남인도 타밀군에 쫓기던 싱할라 왕조의 발라감부 왕은 잠시 동안 담불라의 야트막한 바위산을 은신처로 이용하게 된다.

 

 

훗날 피란 기간 정성껏 도움을 준 승려들을 위해 발라감부 왕이 석굴을 지어준 것이 담불라 석굴사원의 시초다.

[송일봉 여행작가] http://news.mk.co.kr/newsRead.php?no=8486&year=2007

 

 

 

내륙 한가운데 자리잡은 시기리야 바위산 도시 유적도 그런 곳 중 하나다.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5세기에 건설된 요새도시다.

 

 

 

카샤파

왕위에 눈멀어 아버지를 죽이고 해발 370m 정상에 거대한 성채 세웠으나 동생 군대에 패하고 자결 스리랑카 세계유산 7개중 하나 해발 370m 바위산 정상의 폐허. 지나가던 바람이 서늘한 손길 내밀어 길손을 맞는다. 높이 70m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인 바위 꼭대기에서 바람이 보여주는 건, 무너져내린 성벽과 기단만 남은 건물터, 계단 따위들이다.

 

1500년 전 여기서, 천륜을 거스른 한 왕이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11년 동안을 살았다.

광활한 평원이 좌우사방으로 거칠 것 없이 내려다보였으나, 그 곳은 이미 왕이 도망쳐온, 돌아갈 수 없는 땅이었다.

 

 

스리랑카의 일곱 개 세계유산 중 하나인 시기리야 바위산 요새도시 유적(시기리야 록)이다.

스리랑카 제1도시 콜롬보에서 동북쪽으로 170㎞. 자동차로 5~6시간 달리면 시기리야 바위산에 닿는다. ‘에이급 하이웨이’라지만 비좁은 왕복 2차선 낡은 도로다.

 

 

웅장하게 버티고 선 거대한 암벽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바위산 밑 네모진 성곽을 해자가 두르고 있고, 해자 밖으론 다시 붉은 벽돌로 쌓은 담장이 둘려 싸고 있다.

 

 

해자를 건너 성 안으로 들면 바위산 들머리에 이르는 중앙로가 곧게 펼쳐지고 좌우론 물을 가뒀던 수조들과 수많은 건물터가 나타난다.

길을 따라 복개된 수로가 이어지는데, 비가 내려 물이 늘면 곳곳에 뚫린 수로 구멍으로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나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바위산 밑으로 다가서면 누구나 수직 절벽 바위산에 압도당하게 된다. 하필이면 저 까마득한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이 바위산엔 광기와 피로 얼룩진 왕조사가 서려 있다.

 

 

5세기 때 왕자이던 카샤파는 왕족 혈통을 가진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우려해, 아버지 다투세나 왕을 가두고 왕위를 차지한다.

분노한 동생이 인도로 망명한 뒤 권력욕에 눈이 먼 카샤파는 부하를 시켜 아버지를 살해한다.

 

카샤파는 이후 7년 동안 시기리야 바위산에 왕궁을 건설하고 스스로 갇혀 살게 된다. 동생의 보복이 두려웠을까, 뒤늦은 참회의 심정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결국 11년 뒤 복수를 위해 돌아온 목갈라나 군대와의 전투에서, 카샤파는 자신의 병사들이 후퇴하고 혼자 남게 되자 자결을 택하고 말았다. 코끼리바위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꼭대기까지 1200개에 이른다는 대리석 계단이다. 양옆으로, 승려들이 설법하던 바위굴과 빛바랜 인물그림이 희미하게 남은 벽화들을 볼 수 있다. 본디 이 바위산은 고대 불교 승려들의 수도장이었다.

 

 

바위틈을 지나 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좁고 긴 통로인 이른바 ‘거울 회랑’(미러 월)이 시작된다. 절벽을 마주하고 높이 3m의 황토 빛 벽이 이어진다. 옛날엔 이 벽면이 거울 구실을 해 멀리서도 회랑을 오가는 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벽돌에 칠을 먹이고 그 위에 달걀 흰자와 꿀・석회 따위를 바른 뒤 표면을 문질러, 사물이 비치도록 했다. 벽면엔 옛 싱할라 문자로 쓰인 시들이 무수히 적혀 있다.

 

 

시기리야 유적 감상의 압권은 거울 회랑에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수직으로 올라 만나는 미인도 벽화다.

젖가슴을 내놓은 여성을 중심으로 주위에서 화려한 장식과 옷을 갖춰입은 시녀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인데, 거의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또렷한 선과 선명한 색채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주인공은 천국의 요정 압살라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본디 시기리야 바위산 둘레엔 500명의 미인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남아 있다.

 

 

카샤파왕이 11년 동안 이 바위산에서 지내는 동안, 참회의 심정으로 아버지를 위해 제작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좀더 오르면 바위산 밑 계단을 사이에 두고 사자의 거대한 두 발이 버티고 있는 광장에 이른다.

 

 

지금은 사자의 발만 남아 있으나 본디 계단은 사자의 입을 통해 오르도록 돼 있었다. 사자의 머리와 갈기를 표현하기 위해 촘촘히 벽돌을 박았던 흔적이 절벽에 남아 있다.

 

시기리야라는 이름도 싱하(사자)기리야(목구멍)에서 유래했다.

 

 

1.6ha 넓이의 바위산 꼭대기엔 웅장했을 옛 위용을 더듬어볼 수 있는 왕궁 건물터와 저수지・정원・연회장터 등과 이들을 잇는 비좁은 계단길, 카샤파왕이 앉아 무희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대리석 의자 따위가 남아 천년을 불어온 바람에 쓸리고 있다.

시기리야(스리랑카)/글・이병학 기자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050421050741715&p=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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