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난 재배 역사
서양의 난 재배 역사
비록 중국이 난에 관하여 가장 먼저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난이 오늘날과 같이 세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기까지는 서양의 많은 탐색과 연구, 재배의 역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난에 대한 서양 최초의 기록은 동양보다 훨씬 늦은 기원전 370~285년경이라고 한다.
1) 그리스의 철학자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의 저서 《식물에 대한 조사(Enquiry into Plants)》에 현재 ‘지중해난’이라고 알려진 지생란 ‘오르키스(Orchis)’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오늘날 난을 일컫는 ‘오키드(orchid)’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어 ‘orchis’는 ‘고환(睾丸)’이라는 뜻인데, 이는 그 식물 뿌리의 형태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오르키스 난은 고환형 뿌리가 쌍으로 있으며, 오래전부터 유용한 식물로 인식되어왔다.
테오파라투스의 기록 이후 16세기 중반까지 오르키스 외에 13종의 난이 더 발견되었다.
난에 관한 초기 연구는 대부분 열대산 난에 집중되었는데, 식민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무역회사에 고용된 의사나 외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제까지 본국에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신비로운 열대식물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탐색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식물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었던 이들은 그저 이 식물들의 꽃이 좋아서 그 형태를 설명으로 기록해두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난 연구의 기초가 되는 이런 기록들은 주로 유럽에서 출판되었고, 그 결과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열대산 난 재배가 시도되었다. 중남미 원산인 브라사볼라 노도사(Brassavola nodosa)가 17세기 후반 유럽에서 최초로 재배되기도 했다(그 시기에는 대부분의 착생란을 ‘에피덴드룸’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명칭이 ‘에피덴드룸 노도숨(Epidendrum nodosum)’이었다).
1731년에는 콜린슨(Peter Collinson)이 블레티아 베레쿤다(Bletia verecunda)를 바하마에서 수입해 영국에 소개했는데, 이는 열대산 난을 유럽으로 수입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른 표본으로 영국에 들어온 블레티아 베레쿤다는 웨이저(Charles Wager) 경의 정원에서 뿌리가 다시 살아났다.
겨울에 온실에 두고 톱밥과 나무껍질로 덮어놓았더니, 이듬해 봄에 다시 영양생장이 재개되고 여름에 드디어 꽃이 피었다. 이는 영국에서 열대산 난이 피운 첫 번째 꽃이었다.
그 후 열대산 난 재배가 계속되어, 1789년에는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 큐(Kew)에서 15종의 진기한 열대산 난이 재배되었다.
19세기 초 국제무역의 중심은 리버풀항(Port of Liverpool)이었기 때문에 리버풀 식물원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0년 카틀레야를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수입·재배해 꽃을 피운 곳도 바로 리버풀 식물원이다.
카틀레야 재배는 우연히 시작되었다.
탁송업자 스웨인슨(William Swainson)은 열대식물을 영국에 보내면서, 귀한 열대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그 외부를 줄기가 강하고 잎이 질긴 다른 열대식물로 포장했다. 그 일부가 열대식물 재배 전문가이며 아마추어 난 재배가인 카틀레이(William Cattley)에게 배달되었다.
카틀레이는 열대식물의 외부 포장 재료에 흥미를 느꼈고, 그중 몇 가지를 재배하는 데 성공해 1818년 11월에 첫 번째 꽃을 피웠다.
그 식물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크고 화려한 꽃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특히 트럼펫 모양의 입술꽃잎(花脣)을 가진 특이한 꽃에 모두가 매료되었다.
‘근대 난학(蘭學, orchidology)의 아버지’라 불리는 린들리(John Lindley, 사진Ⅰ-1) 박사는 이 식물의 속명을 카틀레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카틀레야(Cattleya)’라 하고, 종을 표시하는 종명은 ‘라비아타(labiata)’라고 했는데, 이는 ‘입술(labium)’을 뜻하는 라틴어로 꽃의 형태적 특성을 설명하는 형용구다.
[사진Ⅰ-1] 근대 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린들리 박사(1795~1865)의 초상화
그러나 처음에는 카틀레야 라비아타가 정확히 어디에서 수집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836년 가드너(Gardner) 박사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산간지역에서는 숯을 굽기 위해 농부들이 나무를 태우기 때문에 카틀레야 등의 난이 파괴되고 있다”고 보고함으로써 카틀레야의 자생지가 알려졌다. 이후 그곳 이외의 몇몇 자생지가 보고되면서 유럽의 부호들과 난 사업가들이 자생지에 사람을 보내 난을 보이는 대로 수집해 오도록 했는데, 이는 농부들의 숯굽기와 더불어 브라질에서 카틀레야가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신비로운 꽃을 보면 누구나 매료되어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에, 부유층 사이에서는 난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모두 수집하는 게 대유행이었다. 이 시기에는 난을 기르고 수집하는 것이 부와 고상함,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 집집마다 경쟁적으로 난을 기르고 수집했다.
이 시기 난 재배 역사에 남을 만한 난 재배가로 영국 데번셔의 캐번디시(William George Spencer Cavendish) 백작이 있었다.
1883년에 그는 자신의 새로운 취미생활을 위해 채스워스(Chatsworth) 저택에 길이 91미터, 높이 18미터로 거의 1에이커를 덮는 거대한 온실을 짓고, 정원사를 직접 인도 아삼(Assam) 등지로 보내 난을 수집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난 수집가의 활동도 지원해 10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럽에 난 재배 열풍이 불면서 세계 각지를 돌며 난을 수집하는 아마추어 수집가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적인 원예가가 너도나도 난 탐색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수집해온 모든 난이 유럽에서 다 잘 자란 것은 아니다. 대부분 열대의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나무 등에 착생하던 난들은 건조하고 일조량도 부족한 집 안에서 주로 재배하는 유럽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재배 기술 수준도 낮고 온실 등의 시설도 열악해, 수집해온 난들이 계속 죽어나갔다.
당시 난을 가장 많이 수집한 나라는 영국이었으나, 영국은 또한 난의 공동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문 원예업자들은 일반인이나 경쟁자의 난 수집을 꺼려 자기들이 수집한 난의 자생지와 정확한 재배 조건을 알리지 않았다. 이래저래 재배법이 확립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러나 난을 연구하는 식물학자와 애호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난 재배 성공률은 꾸준히 향상되었다.
페어베인(Fairbain)은 공중걸이 바스켓에 오래된 타르와 수태를 넣어 아이리데스 오도라타(Aerides odorata)를 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스켓을 물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수분을 유지해 꽃을 피웠다.
식물학자인 뱅크스(Joseph Banks) 경은 유명한 식물추적자로, 1780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에서 여러 종류의 새로운 난을 발견해 본국으로 가져와서 재배에 성공했다.
그는 잣나무 가지를 실로 엮은 바구니에 부엽을 넣고 수집한 난을 심은 다음 수태로 감싸, 통기가 잘 되고 습기가 유지되도록 해서 성공적으로 난을 키워냈다.
데번셔 캐번디시 백작의 정원사 팩스턴(Joseph Paxton)은 《식물학잡지(Magazine of Botany)》에 난에 관한 글을 실어 난 재배의 적온(오히려 저온이 좋다는), 통풍의 필요성, 배양토 등에 관한 지식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줌으로써 난의 생존율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난의 대중화에 공헌했다.
난이 유럽에 소개된 후 70여 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확립된 난 재배법을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은 윌리엄스(B. S. Williams)로, 그 책은 《난 재배가 지침서(The Orchid Grower’s Mannual)》라는 제목으로 1851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모든 난은 고온다습한 환경을 좋아한다’는 일반인들의 잘못된 인식 때문에 난은 여전히 많은 수가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난 재배에 대한 지식이 늘어가고, 1859년에 출간된 《정원사 연보(Gardener’s Chronicle)》에 린들리의 글이 실리고, 1874년에 베이트먼(Bateman)의 책 《오돈토글로숨속의 모든 것(Monographs of Odontoglossum)》이 출간되면서 비로소 난의 종류에 따라 좋아하는 온도와 광도가 다르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856년에는 도미니(John Dominy)가 인공교배종인 칼란테 도미니이(Calanthe Dominiyi)를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비치앤드선스(Veitch and Sons) 사의 기사였던 도미니는 의사 해리스(Harris)의 지도에 따라 칼란테 푸르카타(Cal. furcata)와 칼란테 마수카(Cal. masuca)를 교배해 얻은 종자로부터 꽃이피는 식물을 얻었다. 최초의 인공교배로 얻어진 그 식물은 도미니의 이름을 따 칼란테 도미니이라 명명되었다.
인공교배종이 계속 만들어졌지만 이들 종자의 발아는 아직 큰 과제였다.
당시 난 종자의 발아는 온전히 자연에 의지하고 있었다. 자연에서는 종자가 자연적으로 비산(飛散)해 어미그루의 뿌리 근처에 서식하는 미생물과 공생하면서 발아하기 때문에, 새로운 인공교배종의 재배 성공률은 매우 낮았다.
프랑스와 독일 학자들은 시험관 안에서 미생물 균사와 난 종자를 같이 접종해 난이 발아되는 것을 관찰했으나, 이 방법의 실제 이용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2년 미국 코넬 대학의 누드손(Lewis Knudson) 박사가 미생물 균사의 접종 없이도 종자가 발아되는 배양기에 대해 보고했다.
이후 인공교배로 얻은 종자에서 유식물(幼植物)을 자유로이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871년 이후에는 새로 육성되는 교배종은 모두 《정원사 연보》에 수록되었고, 1895년에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영국인 한센(George Hansen)에 의해 《난 교잡종(The Orchid Hybrids)》이 발행되었다.
1946년까지는 모든 교배종이 《샌더의 난 교잡종 목록(Sander’s List of Orchid Hybrids)》에 수록되었고, 이 작업은 샌더 가(家)에서 꾸준히 수행해왔으나, 1961년부터 교배종 난에 대한 국제등록제가 실시되면서 영국 왕립 원예학회(Royal Horticultural Society, RHS)에서 진행하고 있다.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 난 재배 열풍이 불자 미국에도 난이 상륙하게 되었다.
1838년 매사추세츠의 존 부트(John Boott)에게 런던에 살고 있던 그의 형제 제임스(James)가 난을 보냈는데, 이것이 미국에 난이 처음으로 전해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많은 신비로운 난이 미국 동부의 뉴잉글랜드에 전해졌다고 한다. 특히 랜드(Edward Rand)가 하버드 대학의 케임브리지 식물원에 기증한 난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고, 이러한 기증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하버드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난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각주
1 Sheehan, T. J., 2001, Ultimate Orchid, p.8, DK
출처: 서양의 난 재배 역사 (세계의 난, 2011. 1. 11., 김영사)
원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4036&cid=42526&categoryId=42530
============================================================================================================================
바로가기
난초 [ 蘭草, orchid ] | 식물도감(植物圖鑑) 2011.01.04 09:36
난초과 | 식물도감(植物圖鑑)
착생란 | 식물도감(植物圖鑑)
'花卉.園藝.植物.田園 > 식물도감(植物圖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마속 (0) | 2016.01.20 |
---|---|
우리나라의 난 재배 역사 (1) | 2016.01.19 |
반다속 (0) | 2016.01.19 |
덴드로비움 팔레놉시스계 재배 관리 (0) | 2016.01.19 |
덴드로비움속 (0) | 201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