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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난 재배 역사

호남인1 2016. 1. 19. 21:27

 

 

 

 

 

 

 

우리나라의 난 재배 역사

 

 

 

 

보춘화 (Cymbidium goeringii (Rchb.f.) Rchb.f.)

 

 

 

 

출처: 세계의 난

우리나라의 난 재배 역사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과의 문물교류가 빈번했기 때문에 난을 재배하고 감상하는 멋을 일찍이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히 언제 어떻게 난이 전래되어 생활 속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림이나 문학작품 등을 통해 난 재배가 일반화된 시기를 유추할 수 있고, 옛 전문서적을 통해 난 재배법과 생태 등에 관한 연구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 즉 14세기에 그려진 난 그림이 발견된 바 있고, 난 재배는 130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난을 실제로 이용한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1)난이 우리 선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흔적을 볼 수 있는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이 신라와 고려 시대의 유명한 한시를 모은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수록된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다.

 

정몽주(鄭夢周)의 《포은집(圃隱集)》에도 난향(蘭香)을 음송(吟誦)한 글귀가 있고,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수록된 〈척산군휴지화원부란(陟山君携至花園賦蘭)〉은 난과 더불어 사색하고 수양하는 생활을 노래한 지극히 사실적인 시다.

 

이와 같이 당대의 명문장들이 난을 노래했던 것으로 미루어 난이 당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난향을 ‘국향(國香)’이라 지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매창(梅窓)이나 허난설헌(許蘭雪軒) 등 여류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난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미술작품에서 사실적인 춘란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고 보고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 말 부녀자들의 자수작품에 꽃이 핀 난분(蘭盆)이 연꽃과 더불어 수놓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난 재배가 생활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 그림으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작품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사진Ⅰ-2).

그는 특히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난을 더욱 잘 알게 되었고, 훌륭한 난을 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의 난 그림 또한 유명하다. 고려시대 이래로 난을 재배하고 노래하고 그리는 것은 사대부의 기본적인 문화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Ⅰ-2] 추사 김정희가 부채에 그린 묵난화

 

 

 

난에 관한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책은 세종 31년 강희안(姜希顔)이 완성한 《양화소록(養花小錄)》이고, 가장 방대하게 서술된 책으로는 조선시대 중엽 서유구(徐有榘)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꼽을 수 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에 관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총 16권 가운데 제5권에 난에 관한 서술이 수록되어 있다.

재배 방법에서부터 학술적인 이론까지 난문화를 총망라하여 고찰·연구·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난 재배의 역사적인 뿌리를 더듬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우리나라의 난 재배 역사는 이처럼 오래되었으나 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혼다니(本谷愛次郞)는 《조선농회보(朝鮮農會報)》 22권 1호에 〈부업으로서 가능성 있는 난초 재배〉라는 글을 실어 우리나라 난초의 현황, 난초 재배의 성과 및 수지(收支)에 대해 언급하면서 전망이 좋은 작물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일본에서도 난을 귀하게 여겨, 1700년대에는 풍란(Neofinetia falcata)이 신분의 부귀(富貴)를 나타내는 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난은 오래전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보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대상도 거의 대부분 동양란에 국한된 상황이었다.

이른바 ‘서양란’ 또는 ‘양란’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일본에 양란이 소개된 것은 1870년대 외국 교역자들에 의해서였는데, 동양란(toyo-ran)과 구분하여 서양란(seiyo-ran) 또는 양란(yo-ran)이라 불렸다. 1890년 이후 재력과 권력이 있는 수집가들은 유럽에서 난을 다량 구입해 온실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 1917년에는 최초로 난 동호회가 결성되었는데, 그 회원은 주로 부유한 귀족층이었다. 난 재배는 차츰 일반화되어 1938년 일본 난협회가 창설되었고, 이때부터 난의 교배육종이 시작되었으며 육성된 품종을 상품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난 재배는 큰 타격을 입었고 많은 품종이 소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난 산업은 다시 부활해 절화용 난이 재배되었고, 1947년에는 일본 난재배가협의회가 결성되었는데, 생산된 꽃은 주로 일본에 주둔한 미군에게 판매되었다. 1962년에는 나고야에 일본 양란 회사가 설립되어 난 도매유통 체계가 확립되었다.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의 양란 재배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번식 문제가 해결되면서 대중화되었다.

종자의 무균배양법이 확립되면서 난 재배 대중화가 예고되었으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어려운 시절을 거치느라 난뿐만 아니라 다른 화훼산업도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식물 조직배양이 시작되면서 난의 정단배양이 시도되었고, 1960년 프랑스의 모렐(Morel)은 심비디움의 바이러스 무병주를 생산할 목적으로 정단배양을 통해 ‘프로토콤 유사체(Protocorm Like Body, PLB)5)를 얻었다. 그 후 연구가 진전되면서 여러 가지 원예식물의 조직배양이 시도되어, 1960년대에는 조직배양을 이용한 난의 대량 배양 가능성이 뚜렷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사선농업연구소의 한창열 박사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식물 조직배양 연구가 진행되었고, 난의 대량 배양 방법도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어디까지나 연구 수준의 조직배양 시도였다.1968년 한창열 박사가 〈양란의 메리클론(mericlone) 증식과 인위 돌연변이 육종〉이라는 논문을 일본 난협회지에 발표했다.

 

1972년에는 농업기술연구소의 김강권 씨가 하와이대학 원예학과에서 사가와(Sagawa) 박사의 지도 아래 덴드로비움의 정단배양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난 조직배양을 소재로 취득한 박사학위였다.

 

우리나라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조직배양을 시작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당시 영풍상사에서 한국 원예식물연구소를 만들고 양란 사업을 조직배양을 통해 기업화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기술자문으로는 고병민(전 원예시험장 화훼과장) 씨와 이석주 씨가 초기에 관여했고, 1973년에는 김정주 씨가 참여했다.

 

한편 이태성(전 오리온제과 사장) 씨가 한창열 박사의 지도로 양란 육종과 증식을 목표로 경기도 미금시에 인수육종연구소를 설립해 난 조직배양을 실시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조직배양 및 육종의 묘본을 프랑스나 미국에서 수입해 조직배양을 했으나 목표했던 연구 목적에는 미치지 못하고, 한동안 주로 심비디움 양묘에 치중했다.

 

1974년에는 이재연 씨가 경기도 안양에서 송파원이라는 난 농장을 시작해 조직배양을 통한 양묘로 난 재배의 기업화를 시도했다.

이 시기에는 실제 영농가들도 난 재배에 관심을 갖고 소자본으로나마 조직배양을 통한 난 재배를 시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산의 신태기 씨로, 그는 가정집의 일부를 개조해 심비디움을 배양, 절화용 난 생산에 성공했다.

 

1973년 일본 가가와(香川) 대학에서 외국인 연구원 신분으로 조직배양을 공부한 강봉조 씨는 1975년 귀국하면서 일본에서 450여 종의 난을 도입해 제주도에서 제주난원을 시작했다. 그는 조직배양으로 호접란 등의 유묘를 생산해, 우리나라에서 조직배양을 통한 난 산업이 한 걸음 더 전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또한 난 재배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지나친 투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조직배양을 중단하고 만다. 이후 그는 난 농장에만 주력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직배양 기술이 정착되고 일반인들의 난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조직배양을 통한 양란 증식 산업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80년에는 연암축산전문대학(LG그룹 재단)에서 난의 영리적 재배에 성공했는데, 이는 재벌기업의 튼튼한 자금력과 심걸보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이 시기에는 또 개인과 개인들의 협동으로 난 육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인천 길병원의 이길여·유인서 씨 팀, 김장열·현명철 씨 팀, 고려원의 이홍복 씨와 서인조경의 문신효 씨가 손을 잡고 양란과 동양란을 각각 육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는 성공한 팀도 있고 도중에 포기한 팀도 있으나, 1983년에 고려원을 시작한 이흥복 씨는 1995년 현재 350여 평 규모의 세계적인 배양실을 보유하기도 했다.

 

양란의 조직배양이 유행하면서 동양란의 조직배양도 시도되어, 1986년 한양난원의 차익현 씨가 한란과 춘란의 조직배양을 시작해 대체적인 조직배양 체계를 세웠고, 제주 갈산농원의 김영우 씨도 한란의 조직배양에 성공했다.

 

이렇게 생산한 난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난 전시회였다.

1974년 신세계백화점에서 최초로 소규모 양란 전시회가 개최되었고, 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박동선 씨가 난협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1976년 한국 난협회 주관으로 창경원(현재 창경궁)에서 제1회 난 전시회가 열렸다.

 

1983년 12월에는 난에 대한 정보가 실리는 최초의 난 잡지 《난과 생활》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1990년대 이후 사회 전반이 경제적으로 안정됨에 따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난 재배 또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난 애호가가 늘어나면서 난 전문 농장뿐 아니라 난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 원종의 확보가 중요시되었다.

 

국내에서 양란의 다양한 품종 확보와 원종 보유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이원난원의 이중길 씨라 하겠다.

특히 원종 확보는 상업적으로는 별 보답이 없으나 새로운 품종을 만들기 위한 인공교배에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난에 대한 사랑과 한국의 난 육종 분야 발전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이 없이는 수많은 종류의 원종을 확보하고 관리하기는 불가능하다.

 

서양의 난 애호가들은 꽃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 잎과 줄기의 특성 등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두지만, 동양란을 주로 재배하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꽃의 화려한 색보다는 잎의 부드러운 흐름과 그윽한 향기에 초점을 맞춰왔다.

또한 번식도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늘어나도록 하여, 대부분이 순종이다.

 

서양에서 난에 접근하는 방식은 동양의 정서적인 접근보다 훨씬 실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난을 일상생활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수많은 원종과 재배종을 발굴해왔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날 난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은 대부분 17세기 이후 서양 사람들의 탐색과 연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각주

1 이종석, 2006, 《한국의 난》, p.156, 향문사

 

출처: (세계의 난, 2011. 1. 11.,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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