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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木浦) - 목포는 항구다.

호남인1 2012. 4. 13. 11:36

 

 

 

 

목포(木浦)

목포시청홈페이지 /http://www.mokpo.go.kr/

 

목포시(木浦市)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남부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각종 해산물과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호남선의 종착지이다. 명승지로 유달산, 삼학도, 고하도 등이 있다. 면적은 47.95제곱킬로미터이다.

우리나라 국도(國道)1호선(목포-신의주)과 2호선 (목포-부산)의 시점이기도 하며 가수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목포의 눈물》과 삼학도, 유달산, 갓바위 등이 유명하다.

 

갓바위

 

 

현황

 

면적 : 50.08 km²

세대 : 98,181가구 (2011)

총인구 : 247,442명 (2011)

행정동 : 23개

법정동 : 64개

시청소재지 : 양을로 203 (용당동)

 

상징

시목 : 비파나무

시화 : 백목련

시조 : 학

좌표 : 34°46′N 126°21′E / 34.767°N 126.35°E / 34.767; 126.35

 

무안부에 속해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목포부로 개칭, 도시 부분만 떨어져 나와 항구 도시로 급성장했다. 1897년 개항 이래 일본 제국 본토로 곡물을 수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3대항으로서 기능했던 목포항은 일본 제국주의의 쇠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국가 개발 계획에 상당 부분 소외되어 지속적인 성장을 누릴 수 없었다.

 

최근에는 목포역 주변의 원도심과 터미널 부근의 하당신도시, 전남도청이 있는 남악신도시의 옥암동과 임성리역 주변 등이 새로 개발되고 있으며 옥암지구의 생활권이 무안군과 겹치는 효과를 내고 있어 주변 지역이 공동 개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신항에 해당하는 목포신항만은 최초의 민자 부두이며 매년 11억 원에 달하는 물류 비용 절감 효과를 내고 있는 지역 중추 항만이다. 2011년 8월 목포대교의 건설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진입하면서 북항과 신외항, 대불산단 사이의 접근성이 상당히 호전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시의 상징

항구도시의 상징인 배를 형상화한 심볼마크

 

상 징

• 기의 바탕(화이트) : 변화 ·도약·발전하는 목포시의 비전을 표현

• 세 개의 도형(상단 그린, 하단 블루) : 파도의 역동성을 깃발의 형태로 상징

• 중앙의 백공간(화이트) : 목포시의 제1상징 요소인 유달산의 이미지

• 하단곡선(블루) : 항구도시의 상징인 배를 형상화

 

 

 

• 세 개의 깃발

• 출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깃발의 역동성으로 단순 표현하여 이미지업(Image-up)시킴.

• 깃발을 세 개로 표현한 것은 동양적 삼재(천·지·인)사상과 완전수 개념을 근간으로 육·해·공 최대의 발전 가능성을 함축하였으며,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한 관문도시 목포를 의미함.

• 중앙의 유달산

• 목포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유달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함.

• 시민의 정서적 공감대를 모아 목포시의 화합과 발전으로 형성하여 애향심과 자긍심을 고취함.

• 하단의 배

• 세계를 누비는 배의 형태로 표현되어 개항 백년의 역사, 동북아 물류 터미널, 다도해 관광전진기지, 남도 행정의 요람, 서남해안의 중심 도시로서 지역화합을 염원함.

• 전진하는 배의 모습을 곡선으로 처리되어 조형적 안정감을 부여.

 

 

귀엽고 발랄한 마스코트의 의미

• 청정도시 목포의 파도와 물의 이미지를 목포시의 새로운 심벌과 결합한 밀리니엄 베이비 마스코트입니다. '포포와 포미'는 목포시의 지명과 항구를 지칭하는 '포'(port)와 아름다울 '미'를 사용하여 귀엽고 발랄한 느낌을 부여한 이름입니다.

 

 

유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목포시가지모습

 

 

 

1.위치/자연환경

전라남도 남서단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여 동쪽과 남쪽은 영산호 (榮山湖)에 면해 영암군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은 많은 도서들로 이루어진 신안군, 북쪽은 무안군과 접하고 있다.동경 126°17′∼126°26′, 북위 34°44′∼34°49′에 위치하며, 면적 49.34㎢, 인구 24만4801명이다.

 

무안반도 남단에 위치한 목포시는 동쪽에 입암산(笠巖山, 121m), 서쪽에 유달산(儒達山, 228m), 북쪽에 양을산(陽乙山, 156m)·대박산(大朴山, 156m)·지적봉(芝積峰, 189m) 등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영산강 하구에 면해 있다. 또한, 그 주위에 13개의 도서가 넓게 펼쳐져 있어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방파제 구실을 하여 천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보인다.

 

시가지의 서남쪽에 병풍을 둘러놓은 듯 기암절벽이 펼쳐진 유달산은 고려시대인 1351년(충정왕 3)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일명 노적봉 (露積峰)이 있으며, 영산강· 삼학도 (三鶴島)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돋우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시가지 주변의 영산강 하구에는 연변·북항·대반동·백련동·갓바위해안 등의 간석지가 있다. 이들 간석지는 육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퇴적과 바닷물의 유입횟수가 줄면서 정착하게 된 염생식물 덕분에 퇴적물의 집적과 간척이 용이해져 농경지·주택지·공장부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고하도 (高下島)· 눌도 (訥島)· 달리도 (達里島) 등 6개의 유인도와 7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영산강 하구둑

 

영산강 유역은 강수의 편의율(偏倚率 : 치우치는 정도)이 대단히 커서 매년 상습적인 한해(旱害)·홍수 등의 피해가 빈번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영암군 삼호반도(三湖半島)와의 사이에 하구둑이 축조되어 영산강은 영산호로 변하였다.

 

지명의 유래

목포(木浦)라는 이름은 《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유래 자체는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나무 목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가 많은 포구라는 뜻에서 붙인 것으로 보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른 일설은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 사람의 목처럼 중요하다 해서 목포라고도 하는데 확실한 근거로는 보기 어렵다.

목화가 많이 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신안보물선을 베경으로한 목포의 야경중에서.

 

 

2.목포의 연혁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백제 때에 물아혜군(勿阿兮郡)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무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44년(혜종 1)에 물량군(勿良郡)으로, 991년(성종 10)에 다시 무안군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자 1391년(공양왕 3)에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전라도 4진 중의 하나인 목포진이 설치되었으며 첨절제사가 파견되어 방어임무를 맡았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무안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이러한 이름들은 지금의 목포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안군, 신안군과 함께 더불어서 불렀으며, 오랜 세월동안 이 고장의 행정구역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나주목의 속현으로 이어왔다.

조선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만호진」이 설치 되었으며, 임진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물렀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나주부 무안군,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고 도서지역은 신설된 지도군(智島郡)에 이관되었다.

1897년 목포진을 개항함으로써 목포는 전라남도 최대의 항구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고 무안군이 부로 승격했다.

 

1903년 목포감리서가 따로 설치되면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되어 감리를 폐지하고 부윤이 겸하게 했다. 이 시기에 월경지 정리도 이루어져 함평군의 비입지(飛入地)인 다경면·해제면, 나주군의 비입지인 삼향면, 영광군의 비입지인 망운면·진하산면·다경포가 편입되어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무안부를 목포부로 개칭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목포부의 부내면과 거류지(居留地) 등 시가지를 목포부로, 주변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하고, 식지면 등 6개면을 3개면으로 통합해 함평군에 이관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목포시로 개칭했다.

2006년 용당1동·산정2동을 용당1동으로, 북교동·무안동·남양동을 목원동으로 유달동·충무동을 유달동으로 통합하여 기존의 행정동 26개를 22개로 통분합하였다.

 

목포 앞바다는 곡창지대이자 중국과도 멀지 않은 거리여서 고대부터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나주에 이르는 교역로로 각광받기도 했다.

 

 

목포시내를 내려다 보고있는 이순신장군의 동상

 

 

3. 시대별 연혁

 

고려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는데 정확히는 왕건이 궁예 밑에 있던 태봉 시기의 일이다. 궁예세력에 참가하고 있었던 해양세력의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위해 나주를 점령하고자[7] 목포에 도착해 나주 지역을 복속했다고 한다. 이때 장화왕후를 만나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 나주 지역은 후삼국시대 재통일 과정에서 왕건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조선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 목포진이 설치됐다.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 수군 만호진을 별개로 설치하여 인근 연안의 12개 도서를 관리하게 했다. 현재의 만호동은 진 일대를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후 군선 재정비와 군량미 확보를 위해 목포와 고하도 앞에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머무르기도 했다.

 

1895년 나주목 무안현에서 독립하여 목포진 또는 목포영이라 하였고 군사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만호청에는 외국인들이 주류하였다.

 

출어를 준비하는 어선들이 접안하고 있는 목포항

 

 

개항

목포가 개항한 것은 1897년 10월 1일로서 인천보다는 15년 뒤진 것이었지만 부산과 인천을 뺀다면 가장 이른 것이었으므로 상당히 빨랐다. 이는 지리적 요인 때문으로 목포는 후쿠오카나 나가사키에서 보면 중국 대륙을 두고 가운데 있었고 곡창지대인 호남의 물산을 집결, 유통하기 위해 일본은 목포 개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자치기관이 설치됐다. 일본인들의 거류지는 항구가 바로 앞에 있는 현재의 유달동 일대였으며 국권침탈 전에는 일본 영사관이 유달동 인근에 있었다. 이 건물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개항장에서 상행위를 할 수는 있었으나 내륙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목포 근처의 영산포를 시작해 논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정부가 매겼던 세도 낮았던데다 일본의 논밭 가격의 십분지 일이었기에 땅 매입을 위해 주력했다. 강압에 의해 개항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쌀이 집결되는 곳으로서 쌀을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목포 개항 이후 국내 쌀값은 여섯 냥 하던 것이 1898년에는 14냥으로 뛰었다.

 

1898~1903년에는 목포 부두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인이 고용한 조선 부두노동자들이 점심을 물로 채우고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이후에는 유곽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커져 1914년 지금의 금화동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곳을 사쿠라마치라고 불렀다. 금화동은 현재 여객선터미널 뒷편에 있는 수산업협동조합 일대로서 유달동과 근접하며 일본인 집단 거주지라 벚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1910년 국권침탈 후 무안부라는 이름에서 목포부로 개칭되어 19면을 관할하게 됐다.

 

목포부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목포 개항 이후 완도를 통해 이어지던 뱃길에 항상 목포가 끼게 되었고 목포-제주 사이를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기선이 생겨났다. 1921년 설립된 순항선조합의 선박을 비롯해 인천, 부산, 여수를 오가던 배들은 목포를 중간 기착지로 삼아 항해를 이어나갔다.

 

1914년에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목포간 철로가 개설된다. 그해 4월 1일 목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기고, 부내면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면과 지도군 전역,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미 목포항의 기능을 곡물 수탈로 설정한 일제는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설치했고 이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철도, 조선, 수산가공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막 따위를 지어 좁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공동묘지로서 조선총독부가 허가하면서 겨우 거주가 허락된 곳이었다 각종 시설이 들어서는 한편 목포극장이 생겨났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에서 내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광주의 광주극장, 목포극장 세 곳뿐이었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면적이 늘어나는 한편 인구 6만의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에 모이던 물품은 一黑(김) ,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유달산에서 내려다본 목포시가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현재

1949년 목포부에서 목포시가 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목포시는 계속적으로 면적이 늘어났다. 이는 1963년 무안군 지역 흡수[19]와 간척에 따른 결과였다. 1973년, 1987년 무안군 삼학면 일대 행정편입 및 1999년 신도심2단계 매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면적이 46.02㎢에서 46.91㎢로 늘어났으며 북항 근처의 바다 매립, 삼학도 인근과 충무동 신항 매립으로 면적이 47.92㎢까지 늘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포의 명소인 삼학도는 1940년도에 목포 앞바다에 있던 삼학도를 연륙하면서 68년부터 73년까지 추진된 간척공사로 육지로 변했다. 삼학도는 크게 대·중·소삼학도로 구분되며 2000년부터 복원사업을 실시했다. 시민단체의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아 난항이 컸던 사업이었다. 그러나 2006년 공사 6년 만에 소삼학도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물길을 두고 다리를 통해 건너갈 수 있도록 3개의 섬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삼학도와 중삼학도 사이가 5개의 다리로 연결돼 2007년 3월 1일부터 개방된 상태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포지역에서도 수많은 학생운동이 일어났으며 2호광장에서 목포역까지 긴 대열을 이루며 시위가 진행되었다. 당시 목포역은 학생운동의 본산으로 궐기대회와 대책 마련에 나선 시민들이 모이던 장이었다.

 

목포의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일제시대 호남선이 개통되고 항구로서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게 된 데 있었다. 호남선의 종착역으로서 오늘날까지 기능하고 있으며 2004년 4월 1일 KTX 개통으로 KTX 열차가 1일 왕복 9회(금·토·일요일 1일 왕복 10회) 정기운행되고 있다. 삼학도 복원 사업과 더불어 남항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관광중점인 북항과 물류 전담인 신외항을 축으로 하여 항만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목포의 매력으로 떠오른 부분은 목포 신항·무안 국제공항 건설 등 사회기반시설에 관한 투자촉진과 대불·삼호공단 조성으로 산업기반 시설이 확충되어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 도시로 떠오를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발전으로 인해 상해 홍콩 등 중국 동남권과의 연계발전 가능성이 주목되는 도시로 부각되고 있다.

 

 

 

행정구역 변천

• 1914년 4월 1일 전라남도 목포부 부내면을 전라남도 목포부로 개편하였다.

• 1932년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 죽교리, 용당리 등을 목포부로 편입하였다.

• 1949년 8월 15일 목포부를 목포시로 개칭하였다.

• 1963년 1월 1일 무안군 이로면 일부를 목포시에 편입하였다.

법률 제1175호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행정동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 상리, 용당리, 달리, 율도리

목포시 일부 /산정1동, 산정2동, 산정3동, 이로동, 충무동 일부

• 1970년 7월 1일 산정1동을 산정1동, 연동으로 분동하였다.

• 1973년 7월 1일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를 목포시에 편입하여 이로동의 관할에 두었다.

• 1979년 5월 1일 용당동을 용당1동, 용당2동으로 분동하였다. (27행정동)

• 1987년 1월 1일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 대양리를 목포시로 편입하여[23] 석현리와 함께 삼향동을 설치하였다. (28행정동)

• 1994년 7월 6일 이로동을 용해동, 상동으로 분동하였다. (29행정동)

• 1997년 1월 1일 산정1동과 연동을 산정1동으로, 대성1동과 대성2동을 대성동으로, 무안동과 죽동, 호남동을 무안동으로, 죽교3동과 북교동을 북교동으로, 남교동과 양동을 양동으로, 충무동과 온금동, 대반동을 충무동으로, 서산동과 유달동을 유달동으로, 만호동과 영해동을 만호동으로 각각 합동하고, 죽교1동을 북항동과 죽교2동(죽교동)으로 분할하고, 산정3동을 원산동과 연산동, 산정3동으로, 동명동을 동명동과 삼학동으로, 용해동을 용해동과 이로동으로, 상동을 상동과 하당동, 신흥동으로, 삼향동을 삼향동과 옥암동, 부흥동으로 분동하였다. (26행정동)

• 1997년 7월 21일 양동을 남양동으로 개칭하였다.

• 2006년 8월 7일 용당1동과 산정2동을 용당1동으로, 대성동과 남양동을 대성동으로, 북교동과 무안동을 목원동으로, 유달동과 충무동을 유달동으로 각각 합동하고, 산정1동을 연동으로, 산정3동을 산정동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22행정동)

• 2012년 1월 25일 옥암동 일부(남악신도시 옥암지구), 부흥동 일부를 부주동으로 분동하였다. (23행정동)

 

 

 

 

4. 지리

전라남도의 서남단 무안반도 남쪽에 자리하며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군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 북쪽/동쪽으로는 무안군, 남쪽으로는 영암군을 바라본다. 영암군을 사이에 두고 영산강이 흘러가며 지금은 하구둑이 설치되어 있다. 구도심 중심부에는 해발 228m인 유달산(儒達山), 동쪽에는 입암산(笠巖山, 121m),북쪽에는 양을산(陽乙山, 156m)·대박산(大朴山, 156m)·지적봉(芝積峰, 189m) 등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영산강 하구에 면해 있다.

 

목포의 최고 자랑 중 하나인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끝자리에 해당하며 남도의 개골산이라는 별칭을 지닌 기암괴석의 산으로 고려시대인 1351년(충정왕 3)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일명 노적봉 (露積峰)이 있으며, 영산강· 삼학도 (三鶴島)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돋우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도심지의 중심에 산이 있다보니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언덕지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영산강 하구 주변에는 13개의 섬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를 펼칠 뿐 아니라 해일이 생긴다 해도 자연 방파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여 목포를 천혜의 양항으로 그능하게 하였고 이는 목포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현재 목포의 지리는 대부분 간척에 의한 매립지로 이루어졌다. 삼학도를 비롯해 하당신도심, 북항 일대는 갯벌을 모두 개간한 것이며 인근 영암지역도 많은 매립지가 형성되었다. 과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현재의 목포역 앞에 개울이 흘러 바닷물이 도시 내부로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시가지 주변의 영산강 하구에는 연변·북항·대반동·백련동·갓바위해안 등의 간석지가 있다. 이들 간석지는 육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퇴적과 바닷물의 유입횟수가 줄면서 정착하게 된 염생식물 덕분에 퇴적물의 집적과 간척이 용이해져 농경지·주택지·공장부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고하도 (高下島)· 눌도 (訥島)· 달리도 (達里島) 등 6개의 유인도와 7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총 면적 50.08㎢이며 일반대지가 21.7%, 전답이 24.5%, 임야가 25.7%, 기타 28.1%를 차지한다.

 

한편, 집중 호우로 큰 홍수가 났을 때에는 바닷물이 영산포까지 침범하였으나 영산강하구둑 설치 후 영산포지역 피해는 해소된 반면, 목포권역의 수위가 높아져 피해를 늘렸다. 특히 2004년 7월 4일에 시작된 7호 태풍 민들레는 목포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오늘날까지 영산강하구둑 개선사업에는 정부와 학자 및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란이 끊이지 않은 상태이다.  2010년부터 영산강 하구둑 배수갑문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루미나리에가 설치된 목포 구시가지

 

 

5. 기후

목포기상대가 1904년 3월 주요 5곳과 함께 설치된 이후 3월 25일 목포에서 국내 최초로 기상관측을 실시했다. 1904년 3월 25일의 날씨는 구름이 낀 가운데 최저 3.4도, 최고기온은 8.4도였다고 한다.

 

2006년 기준 강수가 1년중 121일, 흐림이 98일로 강수일이 많은 편이다. 맑은 날은 66일에 해당하지만 최근 대한민국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목포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일조량이 높은 곳으로 인근 신안군과 함께 새로운 태양광발전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황사의 경우 평균 10일로서 서울, 인천의 11일과 비슷한 편이다.

 

목포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에 속한다. 하계에는 해양성, 동계에는 대륙동안형으로 두 기후가 중첩되어 나타나기에 기상 관측에 있어 의의가 높은 지역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은 년간 37일, 영하인 날은 60일이며 겨울철에는 돌풍이나 기습적인 눈보라가 자주 발생한다. 이는 대륙성고기압 확장시 대한민국 서해안으로 기류가 타고 내려와 바로 만나는 지역에 목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4일에 시작된 7호 태풍 민들레로 시작된 집중호우는 목포에 시간 당 64mm라는 100년 만의 기록적인 호우로 큰 피해를 입혔다.

 

노적봉이 보이는 木浦市街地

 

 

6. 산

 

• 유달산 (228m) (유달동, 목원동, 죽교동)

• 양을산 (151m) (용해동)

• 입암산 (121m) (이로동)

• 지적산 (189m) (삼향동)

• 부주산 (159m) (옥암동)

• 부흥산 (99m) (부주동)

• 오룡산 (225m) (남악신도시)

 

 

노적봉

 

 

7. 행정 

 

목포시장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민선 1기 시장으로 1971년부터 목포문화방송 대표이사를 맡던 권이담 당시 목포시장이 1995년 7월 1일 취임했다. 2선에 성공하면서 2002년까지 목포시장직을 수행했다. 인터뷰 및 본인이 직접 쓴 소논문 <21세기 위대한 목포 건설을 위하여> 등에서는 과거 목포의 영화를 되찾고자 하는 소망을 표명했다.

 

권이담 시장은 영산강 오염으로 인해 목포시에서 주암댐의 물을 끌어쓰는 등 물문제가 커지자 이에 대한 해결과 전남도청 이전 계획 성사에 주력했으나 임기 내 전남도청 이전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2000년 목포항에서 신의주로 가는 밀가루 600t을 지원하기도 했다.

 

2002년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권이담 시장은 민주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다. 공정 경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무소속 출마를 감행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지원서에 "경선 불공정 시 분담금 1500만원을 돌려달라"는 단서를 달아 목포지구당의 후보등록 무효처리 결정을 받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이에 후보등록 불공정 시비가 붙으면서 법원까지 오른 논쟁은 법원이 4월 30일 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에 따라 권이담 시장 측의 민주당 탈당 및 지방선거 출마 포기로 정리됐다.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전태홍 시장은 목포 YMCA,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전남도청 이전이 확정됨에 따라 신항과 대불산업단지 활성화 중점 육성을 주요 현안으로 구체화했다.  그러나 2005년 1월 13일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됐다.

 

4.30 보궐선거에서 정종득 후보가 개표 결과, 총 유효투표수 6만4천736표중 2만9천269표(45.2%)를 차지하면서 당선됐다. 그는 목포를 동북아 환황해권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관광문화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2005년 당시 목포의 최대 현안 사업이던 목포대교 건설 사업의 사업비가 130억으로 삭감되자 정 시장과 시의원이 기획예산처 방문과 설득으로 120억 원의 추가 사업비를 배정받는 데 성공했으며 2005년 8월 말 기획예산처가 주관한 균특회계 평가에서 우수시로 선정돼 5억원을 사업비로 수상했다.

 

원도심 개발사업소를 2005년 출범시킨데 이어 "빛의 도시"로 육성하고자 원도심에 빛의 거리를 조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도심 활성화가 지지부진하자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13개의 특화거리를 상호별로 지정하여 운영하는 한편 임대료를 지원하는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2006년 지자체선거에서 2선에 성공해 정종득 시장은 현재 37대 목포시장으로서 역임하고 있다. 2007년 5회 풀뿌리 경영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한편 2009년 초에는 한국관광클럽이 제정한 '제1회 한국관광대상'에 경북 울릉군과 함께 선정되어 대상을 수상했다.

 

두 번의 임기 동안 계속적으로 실시된 원도심 개발사업에 대해서는 인근 정비와 지원이 진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권 활설화로는 이어지지 못한데다 영업지원금 지원에 대한 세입자와 건물주간 마찰이 생기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아 목포시의 행정 방안에 대해 태도 변화와 인구 유인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역언론의 지적이 일고 있다.

 

한편 지난 2008년 지자체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지원이 목포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했음에도 민주당 후보를 지원하지 않고 이를 묵인했다는 측근의 고발로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09년 목포권 시민단체들은 목포시의 업무추진비 투명성 제고를 위해 시민들에게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법원이 2년 만에 시민단체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보공개 심의위원회가 목포시장이 임명한 위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책임 있는 보고를 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어 2011년에는 시장이 직접 극심한 교통 체증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공무원과의 비상 연락조차 확보되지 않아 공직 기강 해이에 대한 질타가 이어진 바 있으며 목포시가 시 화장장 입찰을 계획하는 가운데 화장장 입찰 선정에 대해 측근의 업체가 선정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루미나리에가 설치된 목포 구시가지의 야경

 

 

목포시청

목포시청은 1949년 8월 15일 문을 열었으며 현재 6개 관리국과 22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기획관리국, 주민복지국, 관광경제국, 도시건설국의 4개국과 목포시보건소, 교육문화체육사업단, 시의회사무국, 상하수도사업단, 도시개발사업단을 거느리고 있다. 기타사업소로는 각종 환경관리소 및 목포자연사박물관이 있다. 상하수도사업단과 도시개발사업단은 별관과 해안동 기업은행 건물에 있으며 수도세 회계 처리와 원도심 개발 사업을 각각 관리한다.

 

4층으로 된 본관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목포시의회 오른쪽으로 민원동이 있다. 주차장을 너머로 별관에는 상하수도사업소가 자리하고 있다. 시청 건물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KBS 목포방송국, 목포마리아회고등학교가 있다.

 

 

 

공공·행정기관

• 목포시청 (용당1동)

• 목포경찰서 (용해동)

• 목포소방서 (옥암동)

• 서해지방해양경찰청 (부주동)

•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부주동)

•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부주동)

 

             목포시 행정구역

 

행정 구역

행정동   면적(㎢)      인구(명)    세대    관할 법정동            기준일

용당1동   1.45          13,616       6,305   용당동, 산정동 일부 2012년 3월 말

용당2동   0.9             7,254       3,394   용당동 일부

연    동   0.67            6,540       3,193   산정동, 호남동, 용당동 일부

산정동    0.76            8,901       3,515   산정동, 연산동, 용당동 일부

연산동    2.88            6,473       2,272   산정동, 연산동, 용당동 일부

원산동    0.62           16,890       6,387   연산동, 산정동 일부

대성동    0.34            3,587       1,738   대성동, 호남동, 산정동, 양동 일부

목원동    1.48           11,054       5,561   북교동, 남교동, 죽교동, 달성동, 양동,

                                                       상락동1가, 상락동2가호남동, 무안동, 측후동, 죽동, 명륜동, 대안동, 창평동, 산정동

동명동    0.79            7,763       3,643   동명동, 광동, 호남동, 산정동

삼학동    0.75            7,138       2,743   삼학동

만호동    0.94            4,501       2,353   만호동, 수강동, 항동, 중앙동, 금동, 경동, 중동, 해안동, 복만동

                                                       행복동, 영해동, 대의동, 보광동, 축복동, 유동, 산정동 일부

유달동   12.50           7,244        3,804   유달동, 율도동, 온금동, 서산동, 금화동, 죽교동, 달동,

                                                         중앙동1가 중앙동2가, 중앙동3가, 대의동1가, 대의동 2가, 대의동 3가 경동1가, 경동2가

죽교동    0.75           4,729         2,304   죽교동, 대성동, 산정동 일부

북항동    0.75          10,254         3,992   산정동 일부

용해동    2.11          15,498         5,858   용해동

이로동    1.93          11,942         4,283   용해동 일부

상   동    3.12          19,839         7,823   상동, 석현동

하당동    1.20          12,570         5,605   상동, 석현동

신흥동    1.79          18,718         6,465   상동

삼향동    7.7             6,720         2,684   대양동, 석현동

옥암동    1.14          11,381         3,906   옥암동

부흥동    2.74          13,998         5,236   옥암동

부주동    3.44          18,019         6,164   옥암동

 

 

목포 시가지 모습

 

목포시는 23개의 행정동과 64개의 법정동으로 구분된다. 섬지역은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동으로 편입해 일선 주민 센터에서 관리한다. 현재의 목포시 구획은 1914년 4월 1일 목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기고 부내면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면과 지도군 전역,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으로 흡수됐다.

 

 

1932년 무안군 이로면의 일부를 편입해 관할 리를 동으로 독립하도록 했다. 다시 용당리 등을 편입해 용당동으로 삼았으며 현재의 시청 소재지가 되었다. 1979년 용당동에 국도 간선도로가 생기면서 1, 2동으로 분동됐다.

1962년 석현리, 대양리, 옥암리를 제외한 무안군 이로면 전역이 편입되면서 이로동이 되었고-이때 목포시로 편입되지 않은 무안군 이로면 석현리, 대양리, 옥암리는 무안군 삼향면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로면의 일부이던 산정리가 산정1, 2, 3동이 되었다.

 

1973년에는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가 목포시에 편입되어 이로동의 일부가 되었고 다시 1987년에 삼향면 대양리와 옥암리가 목포시로 편입되어 석현리와 함께 삼향동을 구성하였다. 1994년 7월 6일자로 인구 5만의 과대동이던 이로동이 용해동과 상동으로 분동되었다.

 

 

1997년 1월 1일자로 대대적인 행정동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때의 행정동 정비는 원도심과 목포항 인근의 행정동들의 대대적인 통폐합과 신도심과 북항지역의 분동으로 요약된다. 구체적으로 산정1동과 연동이 통합하여 산정 1동으로, 대성1동과 대성2동이 대성동으로, 무안동과 죽동 호남동이 무안동으로, 죽교3동과 북교동이 북교동으로, 남교동과 양동이 양동으로, 충무동과 온금동 그리고 대반동이 충무동으로, 서산동과 유달동이 유달동으로 만호동과 영해동이 만호동으로 각각 통합되었고 죽교 1동의 일부가 북항동이 되고 북교1동의 나머지 영역과 죽교2동이 죽교동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산정3동이 원산동, 연산동, 산정3동으로 나뉘었고, 동명동이 동명동과 삼학동으로 나뉘고, 1994년에 이로동이 분동되어 만들어진 용해동과 상동은 용해동이 용해동과 이로동으로, 상동이 상동과 하당동 그리고 신흥동으로 분리되고 삼향동이 삼향동과 옥암동 그리고 부흥동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 남교동과 양동의 통합으로 생겨난 양동이 기존의 남교동과 양동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남양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의 행정동 분합으로 목포시의 행정동은 29개 동에서 26개 동이 되었고, 과소동의 정리와 늘어난 신도심 지역과 북항지역의 행정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됨으로써 목포시의 행정동 체계의 큰 틀을 이루었다.

 

그리고 2006년 목포시가 총액 인건비제 시범 자치단체로 선정됨으로써 목포시는 당시의 행정자치부(현재의 행정안전부)가 사무관 수를 늘리지 않는 조건으로 1국 신설을 승인해주기로 함에 따라 목포시 본청의 1개의 국과 4개의 과가 신설되었고, 국장 급에 해당하는 서기관의 수가 1명 늘어났으나 과장 및 동사무소의 동장에 해당하는 사무관의 수는 그대로 두게 됨으로써 본청에 늘어난 사무관의 수만큼의 동사무소(현재의 동 주민센터)를 감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06년 8월 7일 무안동과 북교동 그리고 남양동이 목원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폐합되고, 산정2동이 용당1동에, 충무동이 유달동에 흡수되었고, 산정1동과 산정3동이 각각 연동과 산정동으로 개칭됨으로써 22개 행정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때에 시청조직이 확대되면서 본청의 사무실이 부족하게 되어 상하수도사업단이 지금의 별관 에 자리잡게 되었다.

 

 

2012년 1월 25일 남악신도시 옥암지구(옥암동 일부, 부흥동 일부)가 부주동으로 분동되었다. 처음에는 남악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2차에 걸친 주민 설문조사에서 87%가 찬성함에도 무안군의회의 반발과 목포시의회의 제동으로 남악동 명칭을 포기하고, 부주동으로 정하게 됐다.

 

현 신도심의 경우에는 과거 본래 목포부(시) 이로면의 지역으로 옛부터 내려온 지역으로 구전에 의하면 하당을 창꼬지라 하였는데 창꽃 위쪽에 있다 하여 윗마을, 윗동네 또는 상리(지금의 상동)라 칭하였다고 한다. 1994년 7월 6일 목포시 규칙 제1137호에 의거 상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동 일대를 토대로 1997년 하당동과 신흥동으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하당신도심이 생겨났다.

 

하당 택지개발은 1999년까지 완료됐으며 석현공단을 중심으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2003년 초반까지 조성되면서 유통과 교통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성장 잠재 요인이었던 전남도청 이전과 무안국제공항 건설로 아파트 건설 활기는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신도심 개발 직후부터 아파트 건설 현상이 마무리 될 즈음 숙박업소가 무분별하게 들어서 신도심에만 60여 곳이 넘는 모텔이 생겨났다. 기존에 숙박지구처럼 꾸밀 계획과는 달리 러브호텔이 지나치게 생겨나면서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시 당국의 노력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행정 구역 통합 문제

목포의 도시팽창으로 인한 행정 구역 협소화 문제는 목포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1973년, 1987년 대양, 삼향, 옥암 일대 행정 편입 이후로도 목포는 무안군과의 행정 통합을 시도했으나 무안군 무안읍 기득권층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94년, 1995년, 1998년 3번의 주민투표에서 모두 목포, 신안 지역 주민은 찬성했으나 무안군 무안읍 기득권층의 강력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이후 2004년부터 민간단체 차원의 주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2009년 지방 행정 체제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다시 무안반도 통합 문제가 재점화되었다.이에 무안반도 통합을 추진 중인 목포시, 시의회, 주민대표가 2009년 9월 25일 공식적으로 목포·무안·신안 통합 건의서를 행정안전부에 제출했다. 

목포·무안·신안, 목포·무안, 목포·신안의 3가지 통합안에 대한 주민 여론조사(조사 대상 인원 : 목포 1000명, 무안·신안 각 700명, 응답률 20% 미만)에서도 목포 지역 응답자들은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인 반면 무안과 신안 지역 응답자들은 반대가 높아 통합을 위한 후속 절차(지방의회의 의결 또는 주민투표)의 진행이 무산되었다. 2011년 12월 29일, 목포시와 목포시의회가 전라남도를 거쳐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에 자율통합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유달산의 야경

 

 

8. 인구

2007년 기준 목포시의 인구는 외국인을 포함하여 244,801명으로 남성(49.9%)에 비해 여성(50.1%)의 비율이 조금 높다. 목포시의 인구는 2001년부터 증감을 반복하고 있으며 2007년에 와서는 전년 대비 1,117명이 감소했다. 그러나 세대수는 증가해 2001년 약 8만 세대였던 것이 6년 만에 9만 세대로 늘어났다. 세대당 2.7명에 해당하며 인구밀도는 5,062.6명으로 전국적으로 인구밀도 10위에 안에 들고,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중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는 목포 주위에 남악신도시가 형성되어 지속적인 인구증가를 보이고 있다. 2008년기준으로는 인구 247,620명이다. 남악신도시는 전라남도청의 이전으로 생긴 신도시로 목포와 무안의 반반씩 걸치고있다. 하지만 무안의 삼향읍 남악리로 빠져나가는 인구도 많아 많은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옛 목포시 거주민의 40% 정도가 신안군 출신이였다.

 

바다가 보이는 목포시가지

 

 

9. 경제

 

목포의 산업과 교통

 

목포항

 

지방산물의 집산지이자 연안어획기지로 성장해온 목포는 총취업인구 중 3차산업 종사자 75.3%, 2차산업 종사자 12.4%, 1차산업 종사자 12.3%로서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해 있다.

 

총경지면적 11.83㎢ 가운데 논이 3.39㎢, 밭이 8.44㎢이며, 경지율은 24.7%이다(2006). 농업가구는 전체가구의 1.4%에 불과하며, 주요농산물은 쌀 외에 무·배추·고추·딸기·포도 등이 생산된다.

 

수산업은 1897년 개항 이후 인근 다도해의 어업기지로 발달했으며, 조기·병어·민어·새우·갈치 등이 어획된다.

 

연안의 간석지에서는 꼬막·굴·대합 등의 양식업과 제염업도 행해지고 있다.

 

풍부한 노동력과 편리한 교통을 바탕으로 어업도구·도자기·양조업 등의 전통산업이 발달해 있으며, 1972년 석현동공업단지와 1990년 산정동농공단지 등이 조성되면서 공업이 점차 활기를 띠어 2006년 현재 총 138개의 기업이 입지해 있다. 특히 1981년 영산강 하구둑의 건설은 부족했던 공업용수를 공급해줌으로써 이 지역의 공업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996년에 완성된 대불공업단지는 단지 내에 공단, 기술정보 센터, 주거, 유통 센터 등을 설치하고, 기계장치제조업·조립금속·석유화학·제철·제강·비금속공업 등 중화학공업을 유치하고 있다.

 

목포시는 일제강점기에거점도시의 하나로 성장하면서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쌀·누에고치·면화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고 또 일본에서 가공된 물품을 들여오는 무역항으로 알려져왔으나 해방 후 그 기능은 침체되었다. 2006년 현재 중앙·동부 등 상설시장 5개와 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이 각각 1개소가 있으며, 목포어시장은 조기·갈치·멸치 등의 수산물 거래가 많기로 이름 나 있다. 일찍부터 도시화되고 지역의 경제기반이 주로 상업이었기 때문에 음식점·술집·숙박업 등의 서비스 업소가 많다.

 

호남선의 종점으로, 시의 중앙을 호남선이 가로지른다. 국도로 서울·부산 등지와 연결되고 영산강 하구둑의 건설로 해남·영암 등과도 연결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연안항로의 기항지로서 동목포-제주 간, 목포-홍동 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고 있다. 목포항은 급유·급수 시설, 수산물 냉동·가공 시설, 선박수리시설 등 항만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도로총길이 247.62km, 도로포장률 91%이다(2006).

 

일찍이 개항하면서 목포는 항구로서 성장세를 지속해왔으나 상대적으로 황해는 일본과 러시아를 대상으로 한 동해보다 개발이 더뎠으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급성장에 힘입어 중국 동해안과 대한민국의 서해안 간 항구 교통량이 나날이 증가해 환황해권 개발의 필요성은 점점 대두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2001년 완공되고 인천, 평택/당진, 군산과 함께 거점으로 꼽히면서 목포는 해양관광, 임해산업을 위주로 성장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신도시 개발로 원도심은 오랜 경기 침체를 겪어 시 당국이 대책 마련에 고심해왔다. 2009년 2월 25일 원도심의 중추를 이루던 구 중앙시장 부지에 31층의 주상복합 건물을 짓기로 대한주택공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원도심 경기회복의 주춧돌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목포시는 지하 4층은 주차장, 지상 1층은 상가, 2~4층은 행정타운, 5~31층은 350세대 규모로 공동주택을 세울 계획이다.

 

 

 

농어업

목포는 도농복합형 도시가 아닌 단일 도시로서 외곽 지역에 간간히 농가가 나타나지만 대규모가 아닌 0.5ha 미만의 농가가 총 1,326가구 중 459가구를 차지한다. 쌀이나 보리, 콩 중에서 콩류의 생산량이 그나마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목포시 통계연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계속적으로 참외, 오이, 토마토 등 과채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참깨 등 특용작물의 생산량도 증감을 반복하고는 있으나 지속적인 생산세를 보이고 있다.

 

홍어를 말리는 모습(목포시 소재)

 

목포항에는 수많은 어선이 정박해있다. 어선들은 흑산도 연안으로 나가 흑산 홍어를 잡아 팔거나 갈치를 파는 어선이다. 목포 거주 어민 수는 2005년 2,727명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목포 연안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수산물은 어류로서 2006년 기준 26,862톤의 어획고를 올렸다. 갑각류와 연체동물, 해조류가 그 뒤를 이으며 세발낙지로 대표되는 연체동물의 수획고는 한때 1,000톤에도 미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2004년부터 호조세로 돌아섰다.

 

목포대교 조감도

 

 

공업

목포의 경제 활력이 되는 요소로는 인근의 대불산업단지와 현대삼호조선소를 꼽을 수 있다. 대불산업단지는 영암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로 수출할 수 있는 신외항이 마련되어 있다. 1997년 많은 업체들이 문을 두드렸을 당시 허허벌판이였던 산단은 이제 공업단지로서 분양이 거의 만료된 상태다. 한라중공업 이후 장기간 경기침체를 우려했으나 현대중공업이 인수하면서 현대삼호중공업으로 바뀌며 회생의 길을 찾았다. 2007년 대불산단의 수출실적은 4억 6,300만 달러로 약 6,389억 4,000만원에 달한다. 2006년에 비해 25% 늘은 수치다

 

현재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토대로 다시 목포권 경제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남도는 대불산단에 2011년까지 1,000억 원을 투자해 태양광용 실리콘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주)이노베이션실리콘를 비롯해 광양에 1,000억 원을 투자해 태양광발전 부품인 솔라셀(태양광전지) 패널을 생산하는 동산진흥, 최첨단 파이프 생산업체 (주)세신엔이피 등 유슈의 업체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80] 이에 따라 목포시는 대불산단 입주가 거의 끝날 즈음에 대비해 현 대양동 부근에 대양산업단지를 추가 조성하는 방안에 착수한 상태다.

 

공사중인 목포대교의 야경

 

 

상업

목포는 공업성장세가 두드러지지 않는 탓에 소비도시에 가깝다. 조선시대까지도 영산강을 거쳐 한양으로 떠나는 조운의 길목이 되었다. 당시에는 하구둑이 없었으므로 바닷물이 나주 인근까지 흘러가 나주평야에서 집산된 곡물이 한양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당신도시가 생겨나기 전에는 구도심에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문화시설 및 상업 기능이 모두 이루어졌다. 그러나 새로 생겨난 연산동 위주로 아파트 단지가 대거 들어서고 1999년부터 하당신도시가 생겨나면서 상당 부분의 인구 유출로 신도시 인근의 상권이 대두되고 원도심의 시내는 계속된 도심공동화 현상을 겪게 된다. 원도심의 상업 기능은 상당 부분 상실되어 식품 및 주류 업소들도 거의 자리를 옮겼다. 상권이 줄어들면서 시에서는 오래전부터 대책마련에 고심했으며 원도심 활성화 조례까지 제정했다. 그러나 인구 유출이 많이 진행된 상태고 구도심과 신도심 사이의 거리 차이로 인해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 있다.

 

북항 지역에 밀집해 있는 회 음식점들. 일명 '북항회센터'.

 

전통적으로 구도심에 있었던 목포역 상권과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시장은 시민들이 소비를 하는 중추로 꼽혀왔다. 인근에 유일한 백화점이었던 화니백화점이 있었으나 IMF 위기를 겪으며 화니백화점을 문을 닫았고 중앙극장이 되었다가 현재는 다른 업종으로 변경되어 각 층별로 별도 점포가 영업을 하고 있다.

 

더욱이 상업 기능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구도심은 이마트(2002.12)와 롯데마트(2001)가 각각 하당 석현지구, 하당 평화광장 근처에 개점[84]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됐고 목포역 주변에 위치하던 코렉스 마트도 문을 닫기에 이르러 대형할인점의 경우 2008년 1월 17일 문을 연 홈플러스 목포점이 용당동 인근에 있어 신도심이 아닌 곳에 위치한 것으로는 유일하다.

 

이제 구도심 인구가 장을 보기 위해 시장 대신 하당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상이다. 다만 여객선터미널 인근에 있는 동명어시장 및 북항에 어시장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어 홍어나 낙지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도심활성화와 재래시장을 돕기 위해 시 당국은 재래시장 상품권을 도입하는 한편 각 시장의 자율권을 살려 문화교실을 도입하는 방편으로 재래시장 되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비케이큐브 사와 목포시와의 소송전 끝에 광주고검의 상고 포기 지휘로 결국 건축 허가를 내주고, 하당 포르모큐브 옆 부지에 비케이큐브의 대형할인마트가 들어서게 됐다.

 

수산업 경매의 경우 목포여객터미널 근처에 위치한 서산동 인근의 수협공판장에서 진행된다. 한달에 2회 정도 진행되는 수산물 경매는 선박의 입항과 물량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공식적으로는 2회이나 선박 측이 도소매 상인과 개별적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유달산에서 본 목포 앞바다

 

 

향토기업

목포에 기반을 둔 향토기업으로는 보해양조주식회사, 행남자기, 조선내화, 정우개발 등이 있다. 보해양조는 1950년 창립된 이후 1966년 보해산업주식회사로 출범해 호남을 대표하는 소주 회사로 성장했다. 대표 소주인 잎새주는 전국 최초의 단풍발효액 추출소주이며 2001년 5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일본 아사히 맥주 주식회사와 합작으로 개발한 소주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보해복분자주는 대한민국 주류업계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다른 향토 사업자로는 행남자기가 있다. 1942년 5월 설립되어 본사는 목포에 두고 마케팅과 디자인을 총괄하는 서울사무소와 공장인 여주사무소가 있다. 1953년 커피잔세트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행남사는 최근 들어 중화인민공화국 시장공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2008년 200만 불 이상을 수출해 현지 바이어들의 관심을 모았다.[92][93]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담은 자기를 선보임으로서 참살이 풍토와 신세대의 성향에 맡춰가려는 노력을 꾀하고 있다.

 

전남 목포시 북항과 신외항을 잇는 목포대교가 착공 6년 만에 상판 거치 공사를 끝내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저축은행으로 인한 지역 경제 위기

2011년 초 부산의 대표 상호저축은행인 부산저축은행이 검찰 수사의 직격탄을 맞으며 위기에 몰리자 2월 19일 전남권의 대표 저축은행인 목포 보해상호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상황이 발표됐다. 보해저축은행은 지난 17일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되기 하루 전부터 유동성 악화 소문이 돌아 지난 16일 100억원, 17일 100억원, 18일 290억원의 예금이 인출됐다. 자산 1조에 달하는 보해저축은행이 일련의 뱅크런으로 위기를 맞게 되면서 타지역의 저축은행에도 위기의식이 커졌다.

 

목포시에서는 2월 초 일시인출 및 모회사인 보해양조의 지원을 보조할 수 있도록 정부 측에 건의안을 내놓은 상태다.  목포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간담회에서 금융위원장과 경제인들이 모인 가운데 서민 금융으로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계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보해저축은행이 결과적으로 도산하면서 지역 경제의 침체는 물론 하당 신도시에 개축한 신청사마저 무용지물로 방치되고 있는 상태이다.

 

목포대교의 야경

 

 

재래시장

• 동부시장 (용당1동)

• 구 청호시장 (연동, 동명동)

• 자유시장 (삼학동)

• 신 청호시장 (상동)

• 중앙시장 (원산동)

• 중앙식료시장 (목원동)

• 항동시장 (만호동)

• 목포종합수산시장 (동명동)

 

대형할인점

• 이마트 목포점 (옥암동)

• 롯데마트 목포점 (신흥동)

• 홈플러스 목포점 (용당1동)

• 비케이큐브 대형마트 목포점(예정) (하당동)

• 농협 하나로클럽 목포점 (옥암동, 삼향동)

• 농협 하나로클럽 남악점 (남악신도시 남악지구)

• 롯데슈퍼 연산점(기업형 슈퍼마켓) (원산동)

• 롯데슈퍼 하당점(기업형 슈퍼마켓) (신흥동)

• 롯데슈퍼 목포용해가맹점(기업형 슈퍼마켓) (용해동)

 

유달산

 

 

 

교통

 

철도 교통

 

목포역

 

목포역은 1913년 5월 15일 목포-학교(현 함평군 학교면) 간 운행이 시작되면서 보통역으로 출범했다. 호남선의 종착역이자 수탈의 아픔을 지닌 역으로서 현재에는 연간 120만명의 여객 수송을 담당하며 호남권 물류를 담당하고 있다.

 

목포역은 시의 서남부에 있으며 여객선터미널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목포역은 호남선의 종단점이기 때문에 철도가 목포역 안에서 끊긴다. 과거에는 삼학도안까지 석탄을 운반하던 산업철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철로만 남아있을 뿐 거의 운행되지 않는다. 다만 사용하지 않는 철로에는 운행하지 않는 열차들이 방치되어 있다. 삼학도 인입철도로 불리는 이 철도는 1965년 12월 31일 목포역 지선으로 삼학도 부두까지 연결됐던 철도이지만 주민의 가게 및 가옥 바로 앞을 지나다녀서 사고 피해에 노출돼 있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삼학도 정비 사업과 더불어 2011년 해당 철로를 없애기로 했다.

 

KTX가 운행하기 이전인 2004년까지는 철도가 목포역에서 연동육교를 거쳐 시내를 관통했다. 그러나 2003년 12월 호남선 전구간 복선전철화와 함께 선로정비가 이뤄지면서 시내를 관통하던 철도는 전부 사라지고 석현동을 지나는 우회 지하화 구간을 통해 기존 목포역으로 향하게 됐다.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되고 호남고속철도 및 호남선 열차의 시종착지가 되면서 서울에서 목포까지 3시간 이내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현재는 왕복 10편성의 KTX가 용산-목포 간을 운행중이며 열차의 운행 시간은 3시간 15분 내외이다.

 

향후 2017년까지 호남고속철도가 완성되면 서울에서 목포까지 1시간 40여분이 소요될 예정이다. 다만 임성리역으로 시종착역이 옮겨가게 돼 목포역에는 일부 호남선 열차만이 정차하게 된다. 기본계획안에 따르면 호남고속철 계획노선은 경부선 분기점인 오송을 출발해 익산∼광주송정∼목포를 연결하는 신설 노선으로 총길이는 230.9km다. 2010년 7월 현재 목포역에는 용산-목포 간 KTX가 하루 왕복 10회(상행 10회, 하행 10회 총 20회), 새마을호 열차가 하루 왕복 2회,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왕복 6회, 목포-광주 간 무궁화호가 하루 왕복 2회로 하루에 총 왕복 14회(편도 28회)의 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유선각에서 바라다 본 삼학도

 

 

도로 교통

 

국도1, 2호선 시작점 기념비

 

서울과 목포로 연결된 서해안고속도로가 있어 자가용으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는 기존의 개발축에 속해지 않아 경부축에 비해 개발상태가 낙후되었던 것을 혁신하기 위함으로 과거 5시간 남짓 걸리던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현재 목포와 광양간 고속도로가 공사중이며 2011년경에 개통되면 목포에서 부산까지 연결돼 완전한 남해고속도로가 된다.

 

또한 무안국제공항에서 광주까지 연결되는 고속도로는 2007년 11월 8일, 2008년 5월 28일 단계 개통되었다. 11월 8일 호남서남권 산업 물동량 증가와 사회 간접 자본 구축을 위해 무안공항IC ~ 나주IC간 도로가 개통됐다. 1년 뒤 무안광주고속도로가 총연장 41.3km로 개통 후 미개통구간이던 나주~광주 구간까지 연결하게 되어 무안국제공항과 광주가 연결돼 인근 목포권 승객들이 공항으로 향할 수 있는 도로까지 정비됐다.

 

일제 강점기 최초로 건설된 도로인 국도 제1호선은 목포에서 출발해 신의주까지를 잇는 도로지만 한국 전쟁 이후 잠시 국도의 구간이 임진각까지 끊어지기도 했다. 2000년 착공한 경의선 도로 연결 공사를 통해 다시 개성특급시와 이어졌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IC에서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들어가면 여객선터미널에 닿을 수 있다.

 

야간조명이 설치된 유달산의 야경

 

목포시의 시내버스는 유진운수ㆍ태원여객(차고지 공동 사용)이 운행하고 있으며 압해도와 목포를 연결하는 압해대교가 건설되면서 130번 신안여객이 새로 생겼다. 24개의 버스노선이 운행중이며 대부분의 버스는 삼학도, 해양대 후문, 석현동에 기점과 종점을 두고 운행하고 있다. 일부 버스는 영암군 삼호읍/학산면, 무안군 삼향읍/일로읍/몽탄면/청계면/무안읍, 해남군 화원면 무고리까지 운행한다.(해남군 산이면도 운행했으나 2007년 버스 노선 개편 때 109번 노선이 폐지되면서 산이면은 더 이상 운행되지 않는다.)

 

2005년부터 천연가스버스(CNG)를 연차적으로 확대 시행하기로 했다. 이미 2003년부터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자금이 여의치 않자 대당 2,250만원을 보조하는 조건으로 천연가스 충전소가 삼학도, 석현동 종점에 마련되고 22대가 출고되어 시행중이다. 2006년 연초 10대가 늘어나 32대가 운행 중이다.  2006년 1-2, 15, 112번 버스의 노선을 개편하여 시행했다. 옥암동 장재마을과 새로 들어선 포미타운 일대에 버스 노선이 미비해 노선을 새로 추가한 것이다. 장재마을은 이전부터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후로 시와 갈등을 벌이던 중 5번 노선이 폐지되고 61번이 5번 노선 일부를 운행하게 되었다.

 

2007년 3월 1일부터 모든 노선에 무료환승제를 도입했다. 간선버스, 지선버스, 순환버스, 외곽버스, 좌석버스로 구분해 시행하게 됐으며 서울과 같은 교통카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게 됐다.[106] 전라남도 최초로 저상버스를 2007년 도입해 현재 운영 중이다. 지금은 1번 노선에만 적용해 3대에 불과하지만 노약자와 휠체어 장애인 지원을 위해 승강장 턱없애기 사업도 병행 중이다.

 

2007년 전라남도 최초로 저상버스(1번 노선 1대)를 도입하였고, 2011년에 저상버스 2대(2번 노선 1대, 30번 노선 1대 → 이 노선들은 20번 노선으로 변경) 추가, 6월 말에 4대 더 추가하여(2번 노선 3대, 30번 노선 1대) 총 7대를 운행 중이다.

 

2008년부터 버스 준공영제 도입을 시에서 추진해왔다. 준공영제는 노선권은 목포시가 갖고 운수업체는 경영권을 맞는 것으로 수입과 지출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계속된 외곽 지역 소외와 교통불편 마찰을 해소할 돌파구를 마련한 대책으로 평가됐다.[108]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시가 지나치게 시내버스에 지원을 쏟아부으면서 지방세 재정을 낭비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서비스가 개선되지 않은 채 버스회사만 배불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목포경실련은 2003년부터 버스 요금이 연간 12%꼴로 오른데다 적자를 메꿔준다는 명목으로 20억을 지원했음에도 경영 실적이 나아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가 더 큰 비용을 부담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유달산의 정상 일등바위(오른쪽)과   관운각(왼쪽)

 

2011년부터 카드 택시가 도입되어 카드 택시 스티커가 부착된 택시에 한해 카드 결제를 할 수 있다. 사용하는 카드는 티머니, 마이비(2009년 1월, 티머니와 호환되어 마이비카드도 사용가능), 신용카드이고, 교통 기능이 되는 휴대폰으로도 결제할 수 있다.

 

2011년 하반기에 외곽으로 나가는 노선(외곽연계, 좌석버스)을 제외한 모든 목포 시내버스 노선에 olleh wi-fi존이 설치되어 KT 가입자 중 스마트폰 요금제 가입자는 시내버스에서 무선랜(Wi-Fi, 와이파이)을 이용할 수 있다.

 

시외 대중교통은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일괄 처리하고 있으며 전남 주요 시군과 서울, 부산, 마산, 성남 등 전국 주요도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타도 시군으로 가는 직통버스가 부족한 편이어서 광주 유스퀘어에서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

 

목포시는 하당신도시의 신도심과 목포시청과 KBS목포방송국이 있는 구도심을 잇는 양을산터널을 2007년 8월 24일 개통하였고 이후 크게 돌아가던 길을 대폭 줄여주었다. 또한 북항동의 북항과 유달동의 고하도를 이어주는 4.15km 목포대교가 2011년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2012년 상반기 개통을 앞에 두고 있다. 목포대교가 완공되면 고하대로의 전 노선이 완성되는 셈이 되는 것 이다.

 

일등바위

 

 

항공

목포공항이 인근 영암군에 있어 서울과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목포공항은 잦은 안개와 활주로 시설 미비로 여러 어려움을 겪어왔다. 더군다나 1993년 아시아나항공의 추락사고로 국정 감사를 받았지만 활주로 50m 확장에 그쳤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이후 줄어들기 시작한 항공편 횟수는 2003년 대한항공의 김포국제공항 노선 폐지, 2004년 아시아나항공의 항공편 감축, 목포~제주 간 항공편 운항 중단 등으로 거의 없어져 목포공항의 폐지까지 우려됐었다. 도로 교통이 편리해진 데다 호남고속철도가 운행되면 탑승률이 더 떨어질 것이 뻔한 항공사들은 줄곧 1개 노선당 연간 20억원의 적자를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실제로 목포공항의 이용률이 고속도로 개통후 73.3%에서 49.7%로 급락하면서 서울 6회, 제주 2회, 부산 1회를 운항하던 것을 두 항공사가 일제히 감축해 인근 9개 시·군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문제는 무안국제공항의 개항 차질이 장기화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1999년 말 착공된 공항 사업이 계속 미뤄진데다 사업비를 제대로 수수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때문에 인근 시군은 무안공항 개청 전까지만이라도 항공사들의 항공편 감축을 미뤄달라는 입장을 표명했었다. 결국 존폐기로에 섰던 목포공항은 2007년 11월 8일 무안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호남권 중추 공항 역할을 넘겨주게 됐다.

• 항공노선 : 무안 ~ 제주 (주 3회)

 

목포공항

 

 

해상 교통

 

목포항 여객선 터미널

 

목포에는 국내 연안 및 중국을 연결하는 목포항과 농협 철부선이 다니는 목포 북항이 있다. 국내 여객항로로는 흑산도, 홍도, 제주도 및 신안군 도서 지역을 연결하는 여객선터미널이 있다. 2002년 중국 상하이로 국제여객선이 공식취항식을 갖고 국내 유일 상하이행 배편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자금난으로 5개월만에 영업이 중단되면서 계속된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7월 여객정원을 줄이는 대신 화물적재량을 늘리는 선박설계 도입으로 새롭게 취항을 시작했지만[116] 중국 교통부가 관련 사업 인가를 끝내 승인하지 않으면서 여객선 운항이 중단된 상태다.

목포~제주간 여객편의 경우 2011년 3월 호화 크루즈호를 띠우게 됐으며 연간 100만명을 선회하는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목포여객선터미널은 원래 단일 건물로서 8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을 쓰고 있었으나 노후된 시설로 인해 2003년부터 3백 38억원을 들여 4층 규모의 새 청사를 신축했다. 2007년 2월 12일 문을 연 청사는 쾌속선 모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일대는 국제항만종합타운으로 육성해 관광객과 이용객을 맞도록 설계했다. 공사 동안 목포지방 해양수산청은 이에 따라 인근 출구를 1, 2, 3부두와 북항으로 나눈 후 선박회사 별로 분배했으나 졸속 행정으로 섬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준공된지 5개월 만에 비가 새서 조사한 결과 부실 시공한 흔적이 발견되어 전면 하자 보수를 하였다.  지금의 터미널은 연안여객선터미널과 국제여객선터미널로 두 곳의 대합실이 분리돼있다. 연안여객선터미널을 통해 인근 섬으로 나가는 배를 탈 수 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10. 목포의 교육과 문화.관광

 

목포 문화원

도내에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교·신학문·현대기술 등과 같은 개화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다.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은 1902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정명여자학교와 1897년 설립된 무안공립소학교(지금의 북교초등학교)이며, 이어서 목포제일중학교·목포상업중학교·이로소학교 등이 세워졌다. 2007년 현재 유치원 55개소, 초등학교 33개교(분교 3개교 포함),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5개교와 목포과학대학·목포해양대학교·목포가톨릭대학교·목포대학교가 있으며, 장애자를 위한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목포문화원과 목포예총지부에서는 매년 10월 문화예술제를 함께 열어 지방문화와 예술을 계승·보급하고 있으며, 목포시립도서관, 방송국지국(KBS·MBC), 향토문화관, 측후소, 체육관 등이 있다. 예로부터 문인·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기는 하지만 일찍이 도시화·근대화 되었기 때문인지 전승되는 전통문화의 양과 종류가 많지 않다. 민속놀이로는 목포문화예술제에서 행해지는 강강술래·줄다리기·널뛰기 등이 있다. 설화는 〈삼학도전설〉·〈나불도와 갓바위 전설〉 등 지명유래담이 주종을 이룬다. 민요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요는 없고 몇 가지 의식요와 유희요가 전하며, 〈탕건바위노래〉·〈꿩서방노래〉·〈놀개노래〉·〈유선가〉 등이 전해온다.

 

2006년 현재 의료기관은 종합병원 4개소, 병원 7개소, 의원 148개소, 특수병원 1개소, 요양병원 1개소, 치과의원 44개소, 한의원 39개소, 조산소 2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2개소가 있다. 사회복지시설은 아동복지시설 6개소, 노인복지시설 6개소, 장애인복지시설 5개소, 여성복지시설 3개소, 부랑인시설 2개소가 있다. 목포시의 환경오염은 해안매립과 도서의 육지화에 의한 환경파괴와 관광객들에 의한 자연훼손, 그리고 쓰레기방치가 주된 원인이다. 최근 들어 공단조성이 활발해지면서 수질오염에 대한 적극적인 예방과 대책에 힘쓰고 있으며, 목포녹색운동단체협의회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목포 음악분수

 

목포의 유물·유적.·관광

 

시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1, 중요무형문화재 1),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3, 기념물 3, 무형문화재 2), 문화재자료 3점 등이 있다. 고인돌·동검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출토되었으며, 이충무공기념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를 비롯하여 목포시사(木浦詩社 :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고하도이충무공유적(高下島李忠武公遺蹟 : 전라남도 기념물 제10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그밖에 안호성지·유달성지·노적봉·유달산봉수지 등이 있다. 건축물로는 준르네상스식 건축양식으로 알려진 목포시립도서관(사적 제289호)이 있다.

 

이건 오포

 

다도해의 수려한 해상경관과 육지의 관광자원이 어우러진 도내 주요 해양·위락 관광기점으로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목포시민의 영산인 유달산은 1924년부터 공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현재 조각공원, 체육공원, 등산로, 이충무공 동상, 4·19탑, 목포의 눈물 노래비 등이 있으며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동해안에는 삼학도와 갓바위가 있으며, 갓바위 부근에는 수석과 서화를 함께 전시한 향토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호와 북서해안에 해수욕장이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육지면을 시험재배한 고하도를 비롯하여 달리도·눌도·외달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으며, 1981년 다도해지역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연간 38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2006).

 

이건 오포

 

목포역 인근에 있는 유달산은 목포의 자랑이자 상징과 같다. 유달산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병풍처럼 보인다 해서 금강산의 여름 별칭인 개골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4~5월에는 유달산 꽃축제가 열려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유달산의 볼거리는 정상에 올랐을 때 보이는 다도해 절경에 있다. 유달산은 228m로 그 높이가 낮지만 목포시 한가운데서 보는 다도해의 절경이 아름다우며 낙조대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다른 명소는 전국 최초로 조성된 목포조각공원으로 1982년 야외조각공원으로는 처음으로 개장했다. 조각품의 계약 기간 만료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목포의 문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연, 문화, 조각'이라는 주제하에 꼽힌 작품들이 2008년 8월부터 전시되고 있다. 인근에 있는 난전시관과 생태전시관은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특이 식물을 보존하여 선보이고 있는 곳으로 함께 들를 수 있는 명소다.

 

시내 일대에서 볼 수 있는 명소는 빛의 향연이다. 목포시는 빛의 도시로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목포극장 앞길과 역전파출소 앞으로 길게 서있는 루미나리에는 밤마다 빛을 뽐낸다. 유달산에도 야간조명이 켜져 야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드라마 야인시대 촬영지인 이훈동정원은 좋은 볼거리다. 일제시대 때 지어져 조선내화의 사장이었던 이훈동의 소유로 이어져온 이곳은 호남 제일의 정원이며 일본식 석등을 비롯한 일제 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개인 소유의 집이라서 탁 트인 광경을 보기는 어려우나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개방하고 있다.

 

 

목포 갓바위는 또다른 볼거리로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문화특구로 지정되어 목포자연사박물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남농기념관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있어 유원지로 각광받고 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해양사 전시관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매년 여러 종류의 전시회와 바다 관련 학습교실을 개최하고 있다. 2007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승격 추진 중이나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는 대신 국립해양유물연구소로 명칭을 바꾸어 대한민국 유일의 해양유물연구소가 됐다.

 

 

 

 

외달도와 고하도는 목포시가 지원하고 있는 새로운 관광명소다. "사랑의 섬, 외달도"라는 문구를 토대로 외달도 관광객을 유치해 매년 6~8월 해수풀장을 열고 한옥 민박을 개방하고 있다.

 

신도심에 있는 도심공원이자 관광지는 평화광장으로서 200여 개의 조명이 쏘는 음악분수는 야경의 백미이다. 현재 국내 최대 음악분수 설치를 계획 중이나 지역 시민단체의 사업성 비판으로 난항을 겪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착공식에 들어간 목포 바다음악분수는 2010년 7월 23일 첫 시연회를 열고 관광객 몰이에 나서게 됐다.

 

음악 분수의 특징은 270개에 달하는 물기둥이 음악에 맞춰 부유하는 분수가 형형색색의 레이저 조명을 받아 공연하는 데 있으며 세계 최초, 최대의 부유식 바다분수로서 한국기록원의 인증을 받았다.

 

주요 행사 시에는 레이저 쇼를 통해 청혼식, 생일, 결혼기념일 등 개인의 메시지를 접수 받아 이벤트 행사를 열 계획도 추진 중이다.

 

목포 하면 떠오르는 것은 홍어와 맛깔스런 음식이다. 목포 5미는 홍탁삼합과 세발낙지, 연포탕, 민어회, 꽃게무침이다. 남도 한정식을 대표하는 맛집은 목포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목포시티투어 버스는 목포역 앞에서 운행하며 월요일을 빼고 매일 운행한다. 오전 9시에 출발해 오후 3시에 끝나는 일정으로 11곳의 주요 명소를 순회한다.

 

유달산 일대와 갓바위 일대에서 축제 및 공식 행사가 있을 경우 버스편이 증편된다.

 

목포시청은 KTX를 이용한 시티투어 상품을 위해 목포-용산 고속철 열차 1칸을 목포시티투어 패키지 관광용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당 택지개발은 1999년까지 완료됐으며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2003년 초반까지 조성되면서 목포의 유통과 교통의 신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그후로도 전남도청 이전과 무안국제공항 건설로 아파트 건설 활기는 더욱 늘어났다.

 

도시민의 많은 유동인구와 바다가 선물한 시원한 공기와 풍치는 타지역에 관광명소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고 그후 숙박업소가 무분별하게 들어서 신도심에만 60여 곳이 넘는 모텔이 생겨났다. 기존에 숙박지구처럼 꾸밀 계획과는 달리 러브호텔이 지나치게 생겨나면서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졌지만 시 당국의 노력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하당신도시에서 바다와 면하는 넓고 시원한 광장은 특히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어 신목포의 광광 중심지 중의 하나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한편 목포는 신안, 진도, 완도 등 많은 도서지역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다. 신안군은 흑산도, 홍도를 제외한 13개 읍·면 섬 25개를 연륙교, 연도교로 잇는 '다이아몬드 섬 프로젝트'에 3조 2천억원을 투입해 빠르면 2022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라고 2009년 7월 22일 밝혔다.

 

특히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연도교인 "새천년 대교가 완공되면 서남해안 일대의 주요 산업지역과 관광단지를 하나로 묶는 '랜드마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배 대신 차를 타고 들어가 천혜의 자연경관을 즐기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연륙교 연도교 건설프로젝트는 완도 진도 지역에서도 이뤄질 계획이기에 신 해양관광시대에 관광도시로써의 목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새천년대교' 지도

 

서남해안기업도시개발㈜는 2025년까지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 일대 2187만㎡에 4조9000억원을 투자, 인구 1만8300명이 거주하는 관광 · 레저 · 문화 · 주거 · 산업 · 교육 등 다양한 기능을 두루 갖춘 자족적인 관광 · 레저 기업도시로 조성한다.  목포는 그 배후 중심 도시로써의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새천년대교중 주항로교량 조감도

 

 

주요 축제

대표적인 목포의 축제로는 유달산 꽃 축제가 있다. 유달산 개나리꽃축제였던 것을 시에서 이름을 바꿔 유달산 꽃 축제로 부르고 있다. 유달산 꽃 축제는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 가득한 유달산 일대에서 열린다.

 

최근 들어 큰 호응을 받고 있는 축제는 목포사랑은빛갈치축제이다. 2008년 6회를 맞은 축제는 관광객들에게 낚시대를 무료로 대여하여 가족이 갈치를 잡을 수 있도록 한 데서 큰 성과를 거뒀다. 매년 10월 열리는 축제는 선상 갈치낚시대회로 그 절정에 달하며 불꽃놀이와 함께 오후 5시 30분~9시 30분까지 진행된다.[135] 또한 2009년 4회를 맞이한 목포해양문화축제 또한 풍성한 행사로 호응을 얻고 있다.

 

난영가요제는 목포시민이 주목하는 축제로 목포가 자랑하던 가수이던 이난영을 기리기 위해 생겨난 행사이다. 1968년 호남매일신문사가 행사를 시작해 개최되다 잠시 중단됐지만 1991년부터 목포문화방송의 주관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목포가요제도 성격이 비슷한 것으로 KBS목포방송국이 주관한다.

 

이외에도 회시장의 성격을 살려 동명동과 북항 일대에서 수산물 관련 축제를 하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낙지연포탕

 

언론 기관

목포에는 KBS목포방송국과 목포문화방송 외 여러 언론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KBS목포방송국은 1942년 지역방송으로는 최초로 설립되어 목포 연동육교(소방파출소 인근) 산자락에 있던 것을 용당동 시청 사옥 옆으로 이전해 지금에 오고 있다. 목포문화방송은 1967년 무선국 가허가를 받은 뒤 이듬해 목포라디오(RMB)로 개국하면서 시작됐으며 호출부호 HLAM, 주파수 1386kHz였다.

 

목포문화방송은 과거 민중 항쟁 당시 민중의 소리를 담았으며 1980년 광주민주항쟁으로 시설이 피습당해 5월 31일까지 방송을 중단하기도 했다. 1988년 현재 용당동 신사옥을 준공해 이전했으며 1999년 89.1MHz로 표준FM을 개국하여 방송을 시작했다.

 

종교계통 방송으로는 유일한 목포극동방송은 호남 서남부를 관할하며 1999년 개원해 전파 송출을 담당하며 전라권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유선방송 사업자로 한국케이블TV 호남방송이 있다. 신문사업자로 목포투데이와 목포시민신문 등이 있다.

 

 

문화·체육 시설

   

목포 문화예술회관

 

용당동 용당로에 자리하고 있는 목포유달경기장은 1987년 9월 목포실내수영장과 함께 개관하였으며 총 부지 면적 65,964㎡, 천연잔디구장(69×97m), 8레인의 우레탄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장 뒷편에는 정구장과 테니스장이 있어 지역 스포츠 동호회의 활동이 잦다. 경기장 1층에는 핸드볼, 태권도 등 다양한 종목 협의회가 들어서 있다.

 

유달경기장과 실내체육관을 바탕으로 목포시는 2004년부터 시 체육회와 함께 동계전지훈련 유치를 위해 뛰어왔다. 홍보 결과에 힘입어 2004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에까지 축구, 육상, 유도, 경정 등 127개팀 5,912명을 유치했고 앞으로 그 규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2005년부터 투척종목만을 다루는 목포전국육상대회가 시작되면서 선수들의 발길이 더욱 늘고 있다.  2009년 8월 23일부터 한중일 주니어 기능경기대회가 목포에서 열리게 됨에 따라 시설 정비가 이뤄져 트랙을 비롯한 내부 시설 증강 및 외벽 철거가 이뤄졌다.

 

이외에도 유달산, 양을산, 입암산 등 지역의 산 일대에는 주민들을 위한 체육공원이 간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과거 철도 노선이 도시를 관통하던 것이 석현동 일대로 빠지면서 철로를 철거하고 연동 육교에서 버스터미널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이를 통해 버스터미널과 구 동목포역사 일대에 근린 공원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걷기 운동을 돕는 산책로가 정비되었다.

양을산에는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편백나무숲을 2012년 말까지 조성할 예정이다.  그리고, 2011년 11월, 입암산에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문화시설의 경우 갓바위에 박물관 등의 시설 외에도 목포문화예술회관이 들어서 있다. 두 동으로 나뉘어 있는 문화예술회관은 공연동과 전시동으로 구분된다. 공연장 1, 2층 수용면적이 약 700여 명[142]에 불과해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전시동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시회를 개최하며 지역 예술인들의 무대로 자리하고 있다. 신도심에 체육시설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지적에 따라 건립한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는 2003년 4월 준공하고도 막대한 운영비 탓에 전라남도가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목포시가 먼저 인계해 2003년 12월 개관했다.[143] 크게 대·소·야외공연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공연장의 경우 1,294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목포에는 3곳의 도서관이 있다. 목포시립도서관은 1974년 구 일본영사관 건물에 문을 열었다 1989년 현재의 용당2동 자리로 옮겨 현재 약 23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하 1층 지상 4층에 1,636석의 열람석을 갖추고 있다. 2003년 민간 위탁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파행운영이라는 비난 여론이 끊이지 않아 도서관 운영이 부패로 얼룩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따라 시는 자체심사위원회를 통해 목포문화원을 최종 위탁기관으로 선정한 바 있다 1982년 교육청의 부속기관으로 설립된 목포공공도서관은 지하1층-지상4층 규모로써 자체기관으로 독립해 현재 북항 인근의 산정동에 위치하며 총 수용인원은 1,460명이다. 그리고, 2010년 목포석현초등학교 옆에 신축하여 개관한 목포어린이도서관은 지상 3층 규모에 총 29,09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극장의 경우 개항이후 1926년 11월 목포극장이 개업하면서 지역민의 문화시설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시내에 3~4곳의 극장이 더 들어섰으나 흥망을 거듭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구도심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극장을 비롯해 시내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하당으로 이동했다. 이는 현대식 복합상영관이 대거 하당에 몰렸기 때문으로 하당의 번화가에 해당하는 장미의 거리 일대에만 메가라인 목포점(2002)과 CGV 목포(2004.12.17)가 드러섰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프리머스 시네마 목포점과 롯데시네마까지 하당 일대에 들어서면서 이에 따라 구도심 내 극장들이 연쇄 도산했고 목포극장 또한 2008년 영업을 중단하고 건물 정비 후  2010년 다시 개관했다. 메가라인 목포점은 2011년 2월 이후 영업을 하지 않는다.

 

목포극장

 

목포극장은 1926년 11월 처음 개업한 극장이다. 목포극장은 당시 전국 6대 도시에 들었던 목포시의 자랑 중 하나로서 자리했으며 현재 창평동과 무안동 길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극장은 르네상스식 건물로 지어진 것으로 서울 단성사, 광주극장과 함께 조선인 자본가 소유였다.

현재 건물은 시내 빛의 거리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이 거리 일대는 시내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 중 하나다. 그러나 시내를 찾는 인구가 계속 줄면서 극장도 어려움을 겪었고 시내 상인회까지 가세해 어려움 개정을 호소했다. 현재 원도심 활기가 지나치게 떨어진 것을 감안해 시는 목포극장 바로 옆편 건물에 바닥분수를 갖춘 로데오 광장을 만드는 한편 거리 분위기를 환하게 조성하고 있다.[1] 목포극장 앞에는 빛의 도시에 걸맞은 루미나리에를 건설해 놓아 밝은 광경을 볼 수 있다.

현재 새롭게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양한 상영작을 준비 정상운영중입니다.

 

도서관

• 목포공공도서관 (원산동)

• 목포시립도서관 (용당2동)

• 목포어린이도서관 (상동)

• 전라남도립도서관 (남악신도시 남악지구)

 

전시관·박물관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 (이로동)

• 목포자연사박물관 (이로동)

• 목포생활도자박물관 (이로동)

• 목포문학관 (이로동)

• 남농기념관 (이로동)

• 목포문예역사관 (이로동)

• 옥공예전시관 (이로동)

• 목포근대역사관 (유달동)

• 어린이바다체험과학관(예정) (만호동)

• 국립생물자원관(예정) (이로동)

• 노벨평화상기념관(예정) (만호동)

 

영화관

• CGV 목포점 (신흥동)

• 롯데시네마 목포점 (부흥동)

• 프리머스 목포점 (옥암동)

• 목포시네마 (목원동)

 

문예시설

• 목포문화예술회관 (이로동)

•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 (옥암동)

 

체육시설

• 유달경기장 (용당2동)

• 실내체육관 (상동)

• 실내수영장 (상동)

• KBS목포 88 체육관 (옥암동)

 

 

 

남농기념관과 남농허건화백의 작업보습 그리고 그의 작품

 

교육

2007년 현재 목포시 통계연보에 따르면 목포내부의 초등학교는 30개교, 중학교 15, 고등학교 15개교가 있다. 대학교와 대학원이 각각 3곳이 있으며 전문대학은 목포과학대학 1곳, 특수학교로는 1985년 설립돼 지역 장애인 학생을 전담하고 있는 목포인성학교가 있다.[152] 유치원은 총 55곳이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 교원 1인당 학생수가 24명이며 중학교는 19, 고등학교는 13명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근대식 교육은 유달초등학교와 북교초등학교로 대표되었으며 상당수의 학생이 일본인이었다. 북교초등학교는 구한말 고종 32년 칙령 145호에 의거하여 무안읍에 있던 향교를 토대로 목포 개항과 함께 개교했다. 유달초등학교는 1898년 1월 12일 목포심상소학교로 개교하여 1912년 고등소학교가 된 뒤 현재까지 오고 있다.

 

구 목포상업고등학교(현 전남제일고)는 1920년 목포공립상업학교로 설립돼 1920년 개교 했으며 김대중 전대통령의 모교이다. 1941년 지역 유지이던 문재철이 문태학원을 설립해 문태고등학교를 세웠으며 목포고등학교는 1950년 설립된 후 호남의 명문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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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교육기관으로는 1946년 설립돼 1976년 이후 국립으로 승격된 목포대학교가 있으며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의 누리사업 대학으로 선정돼 조선, 문화 분야에 연구력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2007 국립대학 혁신수준 진단평가에서 서울대, 전남대 등과 함께 최우수 4단계로 평가받기도 했다.

 

1950년 개교한 목포해양대학교는 목포상선고등학교로 인가돼 1993년 현재 해양 관련 인력을 육성하고 있다.

 

1967년 개교한 목포가톨릭대학교는 성신간호전문대학으로 1979년 개편인가를 받은 후 1999년부터 현재의 학과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폴리텍5대학이 1996년 목포기능대학으로 출범한 뒤 컴퓨터정보, 조선응용, 조선설비 등의 학과를 두고 있다.

 

목포해양대학교전경

 

고교평준화

목포지역은 원래 70년대 말부터 일어난 평준화 도입과 함께 평준화를 도입했으나 90년도에 다시 비평준화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2004년 교육부의 입법예고로 순천, 여수와 함께 고교 평준화를 시행하게 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 불거진 평준화 논쟁 과열로 좌초될 뻔했으나 2003년 1월 주민투표 실시 결과 71.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평준화 지역으로 확정됐다.

 

그러나 계속된 시내 고등학교의 명문대 진학 경쟁으로 학부모들의 선호도가 10배 이상 차이 나는 등 고등학교 간 경쟁이 과열되고 있으며 평준화로 인해 오히려 선호 또는 기피 현상이 두드러져 교육 당국의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실정에 있다.

평준화 이후, 사립 학교가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11, 목포의 자연환경

 

노령산맥에서 뻗어나온 지적산(芝積山 : 189m)·부주산(浮珠山 : 141m)·대박산(大朴山 : 156m)·양을산(陽乙山 : 156m)·입암산(笠巖山 : 121m)·유달산(儒達山 : 228m) 등이 저평한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바다를 메워 만든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시가지와 공단이 들어서 있다.

 

유달산은 영산강·삼학도(三鶴島)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경관을 이룬다. 삼학도는 1968년 육지와 연결되면서 부두로 조성되었고, 영산강 하구는 1981년 영산강유역개발계획의 하나로 영암군 삼호반도와의 사이에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영산호로 바뀌었다. 한편 고하도(高下島)·눌도(訥島)·달리도(達里島) 등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해주는 섬들로 근해의 물결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천혜의 항만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기후는 겨울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같은 위도상의 동해안지방보다 기온이 낮고, 눈 내리는 날이 잦지만 적설량은 많지 않다. 연평균기온 13.6℃ 내외, 1월평균기온 1.3℃ 내외, 8월평균기온 26.2℃ 내외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112㎜ 정도이다. 연중 쾌청일수는 65일 정도로 맑은 날이 적은 지역 중 하나이다. 식생은 난온대삼림대에 속하여 온대활엽수와 난대성 상록활엽수가 혼합되어 있다.

 

왼쪽 첫번째 1960년대 삼학도, 가운데 1980년대의 삼학도, 오른쪽 최근의 삼학도 모습 ⓒ데일리안

 

 

 

           일제강점기시대의 원래의 삼학도 모습이다.

 

 

 

삼학도 원형복원사업 평면 조감도.<목포시 제공>

 

 

 

 

12, 목포의 인구

 

1949년 시로 개편될 당시만 해도 호남지방 제일의 상업 중심지로 그 세력권에 신안군·무안군·해남군·진도군과 제주도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지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광주광역시로 많이 빼앗기고 항구로서의 기능도 크게 약해졌다. 그러나 더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다도해를 끼고 있고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인구가 계속 증가해왔다.

 

인구추세를 보면 1965년 15만 7,382명, 1970년 17만 7,801명, 1975년 19만 2,927명, 1980년 22만 1,856명, 1985년 23만 6,078명, 1990년 25만 3,423명으로 계속 증가했으나, 1995년 23만 9,571명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2006년 현재 인구는 24만 2,755명으로 1995년 대비 1.3% 증가했다.

인구이동은 전입이 4만 9,777명, 전출이 5만 2,338명이고 전입·전출 모두 도내이동이 많다.

 

행정동별로는 행정·상업 중심지인 용당동·산정동·동명동·이로동 등의 상주인구율이 높은 반면, 연동·충무동·북교동·대반동·죽동 등의 도서와 시 외곽지역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여 인구의 도심집중현상이 나타난다.

 

시가지는 현재 시역의 약 2/3를 차지하는 해안매립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목포시의 경제사정이 좋았던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가 무질서하게 팽창되어 업무·주거·상업 등 도시기능이 제대로 분리되지 못했으므로 도시공간이 좁고, 교통·주택·상하수도 시설 등 도시기반시설이 부족한 형편이다. 하당·매립 지구의 택지개발은 1999년에 완료되었으며 옥암 지구는 2003년에 착공하였다.

 

바다에서 바라본 하당신도심의 야경

 

 

 

13.목포의 지명유래 및 전설/설화

 

유달산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고 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일단 혼령이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저승길에서 극락 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 (삼학도를 나타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려 떠나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거북섬 (구도 : 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가서,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떠난다는 전설이 있다.

 

노적봉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달산 기슭의 노적봉에 이엉을 덮어 곡식을 쌓아 놓은 낟가리처럼 만들어 아군의 군량미를 많이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였다.또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군사들이 밥을 해먹는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우리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것처럼 속여 왜적으로 하여금 미리 겁을 먹고 도망가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노적가리 전설

식량이 넉넉하다는 것을 적에게 과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지금의 전남 목포시 대의동에 진을 치고 왜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서로간의 대치상황이 지속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식량이다. 이순신은 식량문제를 고려했을 때 여기서 더 싸움을 지연시키면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군사들에게 “산꼭대기에 짚을 옮기도록 하여라!” 라고 명하였다. 군사들은 영문을 모른 채 부지런히 짚을 산꼭대기로 날라서 옮겼다. 군사들은 장군의 명령에 따라 산꼭대기와 큰 바위를 짚과 섶으로 빙 둘러싸서 식량무더기로 위장하였다.

 

이를 본 왜의 장수는 “아직도 저렇게 식량이 많이 있구나.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가 불리하겠다!” 라며 되뇌었다. 그가 보기에 아군의 식량은 차고 넘쳐 보였던 것이다. 왜의 장수는 풍부해 보이는 식량에 압도되어 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대로 부대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 노적봉 전설을 식량이 풍부함을 괴시하여 적으로 하여금 싸움을 포기하고 후퇴할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작전의 하나로 알려진다.

 

또한 임진왜란 때 한두 예가 더 알려지는데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건너편의 노적봉은 변협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은 권율이 같은 목적으로 노적가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가 바닷길을 건너 침공했을 때 노적가리를 쌓아 군량미로 위장하였더니 수나라 군대가 그것을 군량미로 잘못 알고 방비가 튼튼하다고 생각하여 후퇴, 청정강 하구로 상륙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목포항여객선터미널 전경(원경)

 

 

지명유래

 

고하도

고하도(高下島)는 예전에 보화도(寶化島), 고하도(高霞島) 칼섬 등으로 불리웠다 고하도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하루는 이완용이 고하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하는 말이 강진 군수(郡守)가 자기 생질(甥姪)인가, 자기 친척인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하도를 이완용으로 하여금 싸게 사주라 하는데 고하도 사람들이 팔라고 하지 않았다. 대대손손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라서 안 판다고 하니까 그 고하도 도민(島民)들을 전부 잡아 놓고 고문과 협박을 해 가지고 결국은 샀는데 삼천오백원에 사 가지고 일본인한테 오천원을 주고 팔았다.

 

거기다 정종 공장을 만든다고 일본 사람들이 사주라고 해서 호남 지방, 전라 북도 통통 털어 가지고 일본 정종 공장을 만든 것이다. 산 사람은 일본 해군 대장 출신인데 고하도 물이 정종 만들기에 적합한 물 이어서 정종을 만들려고 샀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육지면을 이곳에서 처음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기후 관계, 날씨 관계 등으로 해서 처음으로 시험 재배한 곳이 바로 고하도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했다고 한다.

 

목포항여객선터미널 전경(근경)

 

 

달성사

죽교동 317번지 에 위치한 달성사는 해남 대흥사의 수말사로 양산 통도사 출신인 노대련선사가 1915년 4월 8일에 세웠다. 달성사는 건물 6동(대웅전,요사체2,칠성각,명부전, 종각) 건평 71평, 대지 126평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에는 신묘한 효과음을 내는 범종이 있는데 1915년 대흥사에서 노대련선사가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범종의 주조년대는 정조 10년(1786년)이며 이종소리가 매우 청아하게 들려서 목포 팔경시중 달사만종이란 시귀에도 나타난다.

 

달성사범종

 

 

마파지

대성동에서 옛 형무소로 돌아가는 길목을 마파지라 했다. 옛날에 말구루마(수레)가 겨울에 미끄러져서 부서진 일이 있었는데,그때 이일을 계기로 '말 마(馬)'자, '부술 파(破)'자를 써서 그 근방을 마파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이 근처는 대성동(신창동, 번창동)이 확장되면서 민가가 뛰엄뛰엄 들어서기 시작되었다. 또한, 이곳은 겨울에 서,북풍이 마주치는 곳이기에 목포에서는 추운 곳중에 하나이고 바람이 마주친다는 뜻의 매서운 바람을 맞받아 치는 곳, 맞바람 부는 곳 등의 뜻으로도 마파지라 불렸다 한다.

 

목포진

목포진은 목포시 만호동 4통 3반 1-56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는 유적으로 목포영이라고 불리우며 만호(萬戶)가 지휘 통솔했다 하여 만호진, 만호영, 만호청이라고도 불리었다. 만호진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세종 21년(1439년 4월 15일) 의정부가 무안 현의 목포는 왜적침입의 요해처이므로 만호를 파견하고 병선을 주둔토록 건의하여 세종의 재가를 받아 냈다. 이것이 목포만호진의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현재의 목포진 자리에 목포진성(城)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은 연산군 8년 어간임이 밝혀지며 당시 중지 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읍지"에는 성석축의 둘레를 215보, 높이를 7철, 여첩의 둘레를 140보, 높이를 2척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성의 동쪽에 둘레가 35보인 못이 하나 있으며 성문으로는 남문과 서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군사제도의 개편 요구에 따라 목포 개항 2년 전인 1895년(고종 32년)7월 15일 칙령 제 141호로 폐진되었다.현재는 목포만호비와 만호동 일대 일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 등이 만호진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부동명왕상

부동명왕은 대일여래가 모두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대명왕의 하나이다. 1920년대 말 일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일등바위 아래 암벽에 조각했다. 철퇴를 들고 있는 옆에 '부동명왕'이라 새겨져있으며 현재도 주민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있다.

 

수문통거리

공설시장 앞거리를 말하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바다물을 막는 수문이 있었다. 개항후 이곳을 모두 매립하여 땅이 되었다.

 

유선각

죽유달산 자락에서 무정 정만조 선생이 유선각 정자에 들러서 시회를 열곤 하였는데, 유배지에서 풀려 나오면서 선비들이 노는 곳이라 해서 유선각이란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이후부터 鍮達山이 儒達山으로 쓰이게 되었고 이 유선각 현판은 무정 정만조 선생의 제자이며 대통령에 출마했던 신익회선생의 친필이다.

 

 

 

유선각과 현판

 

 

인어상 

옛날부터 사람들이 인어는 몸의 반이 아름다운 여자고, 또 반은 물고기로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한다. 대반동 앞에 있는 인어상은 어떤 예쁜 여자가 빠져 죽어서 됐다는 전설도 있는데 실은 그곳에 애기 바위가 있고 이 동네 애들이 많이 놀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곳에서 놀던 애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어상이 애기바위 위에 세워진 뒤로는 애들이 죽지도 않고 오히려 죽은 애들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고들 믿고 있다. 이인어상은 80년도에 청년 회의소 전남지구회 회원 대회 행사를 목포에서 주관하게 되었는데, 그 주관 기념 행사로 목포 청년 회의소에서 세웠다고 한다. 이 인어상이 세워진 곳은 우리 목포가 항구 도시인데다가 목포항을 들어오는 관문이 되므로, 드나드는 선박들이 이것을 보고 아름답고 착한 환상적인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째보선창

다순구미 앞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조그마한 만(彎)이 있었는데 이 곳에 부두시설을 하면서 삼면을 막고 한면만 열어놓아서 언챙이 모습을 하였다고 해서 째보선창이라 불리웠다. 현재는 매립되어 없어졌다.

 

국도1,2호선도로원표

국도 1호선은 일제하에 1907년부터 시작된 사업으로 목포에서 신의주 압록강교(橋) 까지의 도로를 말하고 2호선은 해남 쪽에서 부산으로 작업을 하였다.1986년 5월 13일 대통령령 제11899호로 국도 제1호선은 목포시에서 평북 신의주시(市)로 되고, 국도 2호선은 목포시에서 부산광역시 중구로 확정되어 시행하고 있다. 특별규정은 없으나 제정할 때 적용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준은 종선의 도로는 노선번호를 홀수번호로 부여하고 남쪽을 기점으로 북쪽으로하여 서쪽에서 동쪽순으로 하고, 횡선의 도로는 노선번호를 짝수번호로 부여하고 서쪽을 기점 동쪽을 종점으로 하여 남쪽에서 북쪽의 순으로 하였다. 현재의 초석은 유달산우체국 옆에 있는 초석을 말한다.

 

뒷개

오늘날 북항이라 불리운 곳이다. 항동쪽이 앞선창(앞개)이라 불리웠고 현재 북항을 뒷개라 불리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리었던 순수 우리말이다.

 

유선각

 

 

만인계터

목포극장에서 만복동고개로 가는 언덕의 오른쪽을 말하는데 개항당시 지금의 복권과 같은 추첨권을 팔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첨을 하였다 하여 만인계터라 불리었다.

 

미륵불

달성사에서 유선각쪽으로 가는 길목, 하늘에 닿을 듯 드높은 절벽 하단에 거대한 미륵불이 있다. 높이 13미터의 이 미륵불은 달성사 주지였던 노대련선사(禪師)가 조성하였다고 구전될 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삼학도 전설의 주인공인 선비가 이곳에서 세 처녀가 타고 있는배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종대거리

현재 신안군청이 있는 곳에서 북교동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 예전에는 불이 나는 곳을 살피고 종을 치는 철탑이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주변에 장이 섰었다. 이곳 이쌩기장터, 쌍교장터라 불리었다.

 

양을산

지금 목포시에 있는 목포대학 뒷편을 보고 비녀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모양이 마치 옛날 여자들이 경대 앞에서 머리를 곱게 빗고 비녀를 꽂아 놓은 형성이라 해서 비녀산이라고도 하다. 또 해발 150미터 높이의 산이다. 앞으로 목포의 이지형으로는 이 산이 목포 시내 한 중앙을 차지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곳에 양을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양을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을촌이라고 한 것 같다.

 

이훈동씨정원

목포시 유달동 4-1번지 유달산 남동쪽 기슭에 이훈동씨집 정원을 말하는데 이 정원은 1930년대에 일본인 우찌다니만빼이가 조성한 정원으로서 면적이 천여평에 이른다. 광복후 해남 출신 국회의원 박기배씨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원은 호남지방에서 제일큰 정원이며 113종(한국야생종 37,일본원산종 39,중국원산종 25,기타 12)의 나무와 순 외래수종 76종, 상록수 69종이며 일본식 석등 춘일형,원주형,직부형, 설견형석등.오중탑, 칠층탑 등 일본식 정원의 표본이기도 한다. 1988년 3월 16일 지방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이훈동씨집 정원

 

 

조각공원

시내에서 보이는 유달산 쪽에 1982년 11울 10일에 조성된 조각공원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진 야외 조각 공원으로서 연면적 13,000평의 규모로 당시 불량 주택(초가집)지역으로서 도시 미관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조각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시 이 조각공원에는 한국 조각가 연구회(회장 김영중)회원 44명의 작품 104점(청동 52, 대리석23, 합성수지 12, 철 12, 시멘트 2)이 전시되어 목포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하당과 당곶

호남 평야를 누비는 영산강 유역에는 청동기시대에 부족사회가 형성되어 살면서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청동기 문화를 창조해 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무안 반도에는 일로 ,청계, 몽탄 등지에 부족 사회를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무안읍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것이 다같이 "당곶진 재읍남육십리 이로방"이라는 것을 보면 현재 목포시 이로동 어딘가가 확실하리라 본다.

 

그러나 이곳 주위에서 말하기를 하당은 암소 형국이라며 마을 앞에 있는 샘(우물)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긋태' 서쪽을 '서긋태'라 하여 놀이마당에서도 편을 가르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고 바다에 내밀고 있는 육지의 뿌리에는 돌밭 다리가 수로까지 이어져 있어 옛날 이곳에서 어촌이 형성해 있었다. 또한 이곳 주변에서는 땅끝 또는 땅꼬지라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온 구전에 의하면 하당을 창꼬지 또는 창꽃이라 했다 한다. 또한 사람들은 지금도 창꽃, 땅꼬지 혹은 땅끝이라 한다. 그 음이나 뜻으로 보아 당곶이 아닌가 생각한다.

 

 

운무가 서린 하당신도심과 인공폭포의 야경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 이난영

영산강 안개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선 잔듸 위에 놀던 옛날도
동벡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목포항 남항

 

 

목포항 내항

 

 

목포항 대불 정유부두

 

 

목포항 대불부두

 

 

목포항 마리나부두(삼학도)

 

 

목포항 북항

 

 

목포항 삼학도 부두 전경

 

 

목포항 삼학도 부두 전경

 

 

목포항 신항부두

 

 

목포항 쌍용세멘트 부두

 

 

목포항 여객선터미널

 

 

목포항 용당 모래부두

 

 

목포항 용당 모래부두

 

 

목포항 용당부두

 

 

삼호중공업 부두

 

 

쌍용시멘트부두

 

 

신안 안좌-자라간 연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