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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항몽 유적지 - 용장산성

호남인1 2012. 7. 25. 14:14

 

 

 

 

 

 

용장산성 이야기

 

 

○용장산성의 개요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6호로 지정된 용장산성은 고려시대 몽고침입시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축성년대도 삼별초가 진도에 입거한 고려 원종 11년(1270) 8월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전남 진도군이 총 사업비 9억5000만원을 투입해 군내면 용장리 용장산성 왕궁지 입구에 건립한 '고려 항몽 충혼탑'. 진도군은 29일 충혼탑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사진=진도군 제공)

 

용장산성은 그 동안 북벽구간에 해당하는 연동마을 뒤편과 벽파리 및 서벽에 해당하는 둔전저수지 북쪽구간에서 유교리와 오류리를 거쳐 북쪽 해안까지는 토성, 둔전저수지 남쪽에서 용장리 서쪽까지의 서벽과 용장리와 고군면의 도평리 및 오산리를 경계로 하는 산능선을 따라 축조된 남벽 및 그리고 연동마을쪽을 향해 뻗어 있는 동벽은 석성으로 알려져 왔다.

 

한편 일부 지역에서는 성벽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상태인데, 특히 북쪽구간에 해당하는 벽파리를 중심으로 한 좌 우측지역과 연동마을 남쪽지역, 서벽구간에 해당하는 둔전저수지가 들어서 있는 지역은 과거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추정되어 왔다. 실제로 1918년에 발간된 일제시대 지도에는 벽파진 좌 우측 부분은 제방이 쌓아져 있고, 둔내저수지의 경우는 제방이 축조되지 않은 상태로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남벽 500m는 2002년에 정비복원되었다.

 

이처럼 용장산성은 몇 차례의 지표조사를 통해 그 대략적인 범위만 파악되었을 뿐 구간별 성벽의 범위라든지 축조방법 등의 구조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이 현재까지 유지되어 왔다.

구체적인 현황파악을 위한 시도는 2004년에 목포대박물관이 수행한 시굴조사 정도 였으며, 이는 용장산성의 종합적인 정비복원 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엇다. 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군내면 용장리 106번지 일원(시굴면적 690㎡)이며,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인 진도 용장산성의 규모 및 구조, 축성방법, 부속시설(성문, 치) 등에 대한 세부적인 현황의 일부가 파악되었다.

 

목포대 박물관 용장산성 시굴조사팀이 발굴한 명문기와.

 

○성의 규모와 시설

현재 성의 대부분은 퇴락하고 허물어져 군데군데 성터가 남아있을 뿐 이지만, 석축으로 이루어진 건물 자리 12개가 남아 있고 그 주변에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8,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 놓지 않았다.

현재 성곽은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 높이는 4m 내외로 복원되어 있고, 성내에는 복원된 용장사지(龍藏寺址)·궁궐지(宮闕址)가 남아 있다.

성의 축조과정 및 연대, 그리고 시설물들은 2004년 목포대박물관에서 수행한 시굴조사를 통하여 개략적으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약 13㎞에 이르는 성벽과 함께 고려시대 성문형식으로는 특이한 사례에 속하는 어긋문 형식의 서문지를 비롯해 성문지 6개소,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치와 적대 3개소, 제사 관련 건물지와 장대을 비롯한 수십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출토유물 중 大近(대근), 海(해) 등이 새겨진 명문기와는 2003년 4월 신안 압해도 건물지에서 청자와 함께 나온 `大近海印癸卯三月(대근해인계묘삼월)' 명문기와와 동일한 것이어서 용장산성 성벽 축조시 압해도 주민들이 동원됐을 뿐만아니라 용장산성이 삼별초에 의해 축조됐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용장산성흥보관(상)과 내부(하)

 

 

 

○용장산성 관련 기록

1) 고종 19년(1232) 5월 崔瑀가 재 추들을 그의 집으로 모아 천도할 일을 의논하였다. …(중략). 이날 우가 왕에게 속히 殿에서 내려 서쪽으로 향하여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주청하니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우가 祿轉車 1백여량을 빼앗아 가재를 강화로 옮기니 서울이 흉흉하였다. 유사에게 영을 내려서 날짜를 한정하여 五部 백성을 보내게 하고 성중에 방을 붙여 이르기를 천연하여 출발할 기일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군법으로 논하리라 하고 또 사자를 여러 도에 보내어 백성을 섬이나 산성으로 옮기었다.

 

2) 고종 19년(1232) 7월 을유에 왕이 개경을 출발하여 昇天府에 머무르고 강화도의 객관에 입어하였다.

 

3) 고종 21년(1233) 정월 諸道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궁궐과 百司를 짓게 하였다.

 

4) 고종 23년(1236) 6월 제도에 山城防護別監을 나누어 보냈다.

 

5) 고종 23년(1236) 10월 몽고군사가 전주 고부의 경계에 이르렀다.

 

6) 고종 24년(1236) 10월 강화에 외성을 쌓았다.

 

7) 고종 30년(1243) 2월 제도의 巡問使를 보냈는데 閔曦를 경상주도에 보내고, 孫襲卿을 전라주도에 보내고, 宋國瞻을 충청주도에 보내고, 또 각도의 산성 겸 권농별감 37명을 보냈다. 이름은 권농이라고 붙였지만 실은 군사상 방비를 하려는 속셈이었다. 순문사가 그 뒤에 바로 번거롭고 쓸데없다고 하여 권농별감을 파하기를 청하므로 이에 좇았다.

 

8) 고종 37년(1250) 8월 비로소 江都에 중성을 쌓았다.

 

9) 고종 39년(1252) 5월 비로소 승천부의 성곽과 廊 를 건축하였다.

 

10) 고종 39년(1252) 7월 여러 산성에 방호별감을 나누어 보냈다.

 

11) 고종 41년(1254) 3월 여러 도의 고을들이 난리를 겪어 피폐하고 지쳐 三稅 이외에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海島에 들어갔던 자는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

 

12) 고종 43년(1256) 정월 몽고병이 여러 섬을 치기를 꾀하므로 장군 李廣과 宋君斐를 보내어 舟師 300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막게 하였다.

 

13) 고종 43년(1256) 3월 이광과 송군비가 영광으로 달려가 길을 나누어 치기로 하였는데 몽고병이 알고 방비가 있었다. 이광은 도로 섬(압해도)으로 들어가고 송군비는 입암산성을 지켰다. 성 안의 장정은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오직 늙고 어린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하루는 송군비가 거짓으로 파리하고 약한 두어 사람을 보내 성 밖에 내보냈다. 몽고병이 생각하기를 양식이 떨어졌나 하고 군사를 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다. 군비가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상한 자가 많았다.

 

14) 고종 43년(1256) 6월 낭장 尹椿이 몽고군으로부터 돌아왔다…(중략). 차라대가 일찍이 수군 70여척을 거느려 성대하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押海(島)를 치려하여 윤춘과 한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대포 2대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두 편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으니 차라대가 언덕에서 바라보고 윤춘 등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 하고 다시 배를 옮기어 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곳곳에 대포를 비치하였기 때문에 몽고 사람들이 물에서 공격하는 모든 준비를 파하였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섬 안에 屯田하여농사도 짓고 지키기도 하여 淸野하여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崔沆이 그렇게 여기어 춘에게 집 한 채와 쌀 콩 3백석을 주고 계급을 뛰어서 親從將軍에 제수하였다.

 

15) 고종 43년(1256) 6월 차라대가 해양 무등산에 주둔하였다.

 

16) 고종 44년(1257) 5월 여러 성에 방호별감을 보냈다.

 

17) 원종 11년(1270) 6월 배중손과 야별초 指諭 盧永禧 등이 出陸을 거부하고 항몽전을 선언, 金剛庫의 무기를 꺼내어 무장함. 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 설치, 관원을 임명함. 강화를 지키기 어렵게 되자 천여 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자녀들을 싣고 강화도 출발.

 

18) 원종 11년(1270) 8월 적(삼별초)이 진도에 들어가 웅거하여 여러 고을을 침략하며 황제의 명이라 거짓으로 꾸며 전라도안찰사로 하여금 백성을 독촉하여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섬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19) 원종 11년(1270) 9월 전라도토적사 참지정사 신사전이 삼별초를 토벌하지 않고 되돌아 온 죄로 파면함.

 

20) 원종 11년(1270) 9월 장군 楊東茂와 高如淋 등이 진도를 쳤으나 실패.

 

21) 원종 11년(1270) 9월 金方慶이 몽고 원수 阿海와 군사 1천명을 동원하여 쳤으나 실패.

 

22) 원종 12년(1271) 정월 박천주가 진도에 이르니 적이 맞이하여 벽파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면서 비밀리에 병선 20척을 보내어 관군을 노략질하여 배 한 척을 빼앗고 90여명을 죽였다.

 

23) 원종 12년(1271) 4월 흔도가 몽고에 보고하기를 반신 裵仲孫이 사신을 억류하고 험고한 지세를 믿어 항복하지 않습니다. 흘림치 왕국창으로 길을 나누어 추포하게 하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황제가 좇았다.

 

24) 원종 12년(1271) 4월 몽고에서 영령공 준의 아들 熙擁 등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4백명을 거느리고 진도의 적을 치게 하였다.

 

25) 원종 12년(1271) 5월 3군이 진도를 토벌하였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碧波亭에서부터 들어가며, 희옹과 홍다구는 좌군을 거느리고 獐項(노루목)에서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金錫, 만호 高乙麻는 우군을 거느리고 東面에서부터 들어가니 전함이 총 100여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에 모여 중군을 항거하려 하였다. 홍다구가 앞서 나가며 불을 놓아 협공하니 적이 놀라 흩어지며 우군쪽으로 갔다. 우군이 두려워하여 중군으로 가려하니 적이 배 두 척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이 보다 앞서 관군이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관군이 급히 치니 적이 모두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적에게 붙들려갔던 江都의 사녀와 보화 및 진도의 주민들이 모두 몽고군사에게 잡혔다.

僞王 승화후 溫은 영령공 준의 同母兄이었다. 이보다 앞서 준이 희옹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형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홍다구가 먼저 들어가 溫과 그의 아들 桓을 죽였다. 적당 金通精은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로 도망해 들어갔다(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 糧米 4천여 석 등 각종 재화 등을 노획함. 포로들은 22년 후인 충렬왕 19년(1293)에 풀려남).

 

 

용장산성 왕궁지내에 있는 우물

 

용장산성의 총 성벽길이는 약 12.85Km(이 길이는 1985년 은하건축연구소에 의해 파악된 수치로 현재 진도군에서 진도군 지적공사에 의뢰하여 측량조사를 실시하고 있음으로 측량조사가 완료되면 정확한 규모가 파악될 것으로 사료됨)로 파악되고 있으나 성벽 통과선은 기존에 파악된 범위에서 약 15~20m 가량 바깥쪽 사면부에 축조되어 있다.

너비는 최소 270~280cm, 최대 340~410cm(성문지부근)이며 그 나머지 트렌치에서는 320cm 규모로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성벽에 비해 성문 부근은 약간 두텁게 축조하는 점을 고려하면 성벽의 평균 너비는 320cm로 파악되며, 일정한 계획하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이는 남벽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1m 내외로서 대부분 파괴되고 1~2단의 성돌만이 잔존하고 있다.북벽구간에 해당하는 연동마을 뒤편과 벽파리 및 서벽에 해당하는 둔전저수지 북쪽구간에서 유교리와 오류리를 거쳐 북쪽 해안까지는 토성, 둔전저수지 남쪽에서 용장리 서쪽까지의 서벽과 용장리와 고군면의 도평리 및 오산리를 경계로 하는 산능선을 따라 축조된 남벽과 연동마을쪽을 향해 뻗어 있는 동벽은 석성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성벽의 흔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상태인데, 특히 북쪽구간에 해당하는 벽파리를 중심으로 한 좌 우측지역과 연동마을 남쪽지역, 서벽구간에 해당하는 둔전저수지가 들어서 있는 지역은 과거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시굴조사 결과 대두분의 성벽이 내벽과 외벽을 돌로 쌓은 협축법으로 축조하고 있고, 다만 서북쪽의 일부 트렌치에서 내탁(산탁)법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다만 북쪽구간의 경우는 다른 구간에 비하여 할석형 판석재와 작은 성돌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는 점에서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이는 주변에 축성에 필요한 석재가 풍부하지 못한 지형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망바우(망바위). 누가오나 망보던 바위겠지요. 사진속 낙타등처럼 동글동글한 저곳이 망바우 입니다.

용장산성에 대한 기록에는 이 망바위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용장산성 안에 있는 이산 정상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 방바우(진도의 바위의방언 망바위)로 불리는 것을 보면 삼별초와 전혀 무관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성벽의 축조순서 및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성벽은 기왕에 퇴적토를 암반층까지 완전히 걷어낸 후 10~30cm 가량 황갈색 마사토로 수평으로 깔아 지반을 정리하였다.

(2) 그 위에 얇은 판석형의 석재를 기단석으로 놓는 것이 대체적인 양상이나 지반 위에 바로 성돌을 올린 부분도 있다.

(3) 기단석에서 약 10cm 가량 뒤로 물려서 제 1단 성돌을 놓았으며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4)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황갈색 마사토를 잔자갈과 섞어 채워 넣거나 잔자갈과 마사토를 한겹씩 교대로 채워 넣은 부분도 확인되고 있다.

(5) 성벽의 바깥쪽 경사가 심한 남벽구간에서는 체성부 위에 바로 여장(여담)을 설치한 곳도 있다.

 

 

망바우(망바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경

둔전평야와 멀리 금골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상)

육지를 가로지르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해남땅까지 다 조망됩니다.(하)

 

 

 

○용장산성의 축조연대 및 사용연대

현재까지 출토된 명문기와, 자기류, 동전류 등의 유물과 문헌기록을 참고할 때 용장산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축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안군 압해도 출토 명문기와를 감안하면 계묘년은 대략 1243년(고종 30)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때 용장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용장산성의 유구와 출토유물로 볼 때 초축시의 성벽은 삼별초군의 정벌과 함께 파괴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등 큰 전란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용장산성 궁궐터전경(상)과 출토된 초석들(하)

 

 

 

용장산성 건물지의 전체 면적은 약 7천 평이다. 이 건물지가 삼별초와 관련된다는 것은 출토되는 자기 등의 유물과 역사적인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건물지가 삼별초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삼별초가 이곳에 머문 기간이 불과 8개월이었기 때문이다.

삼별초가 들어오기 전에 어떤 다른 용도의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이곳의 건물배치가 우선 사찰의 배치와 유사하다는 점과 출토된 유물 중에는 불두(佛頭), 청동(靑銅) 뚜껑 등 사찰에서 나오는 유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찰지일 가능성이 높다.

 

용장산성 굴궐지 안에 있는 사찰 용장사.

 

용장산성 건물지와 관련된 것으로는 우선 계단식 대지 위 남쪽 축대 가까이에 건물을 짓는 경우는 개성 만월대가 있다.

만월대는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고려 왕조가 개성으로 천도(遷都)한 후에 건축한 고려궁지다. 이 궁지의 건물은 남북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경사지대에 층층이 건물을 세운 점이 용장산성 건물과 유사하다.

 

다음은 복잡한 건물 배치를 하는 경우인데 고구려 안악궁 유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악궁지는 약 1만평에 52개의 건물지가 5개의 군을 이루며 건축되어 있는데 회랑이 남북으로 2줄을 이루고 있으나 동서로도 복잡한 회랑을 만들고 있다. 용장산성 건물지도 남북으로 3줄의 회랑이 있어 복잡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용장산성 건물지의 특성은 남부지역의 건물지보다는 고려시대 중앙의 궁지나 고구려의 전통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건물이 삼별초 이전에 건축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찰의 기능을 가졌으나 후대에 삼별초가 들어와 궁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행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이외에도 와편이나 토기편으로 보아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즉 행궁지 동쪽 성곽주변에 건물지 한 곳이 보이고, 난골이라 불리는 계곡 우측 망바위라고 부르는 곳에 건물지가 있으며 오류마을 뒷산에도 건물의 초석들이 보인다.

 

용장산성 건물지들에서는 와전류(瓦塼類), 자기류(磁器類), 금속기류(金屬器類), 석제품(石製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와전류의 경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막새로부터 고려 중기의 막새에 이르기까지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고구려 계통의 영향을 받은 고려 중기의 것이다. 자기류는 청자가 대부분이고 백자나 분청은 일부 발견되고 있다.

시기적으로 11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다만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의 유물은 극히 적다. 자기류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유구층에서 출토된 유물이 12~13세기대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용장산성이 삼별초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바릿대, 화병(花甁), 향로(香爐) 등이 출토되어 불두(佛頭), 청동(靑銅. 淨甁) 뚜껑과 함께 이곳에 삼별초 이전에 사찰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사 관련 건물지는 선황산 정상부의 해발 219m 지점에 위치한다. 남북 장축으로 규모는 19×14.4m이다. 기단부는 경사가 낮은 부분에만 4단의 계단식으로 축조하였고 기단부를 포함하여 3단으로 이루어진 중앙부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단의 내부에는 토제전이 깔려있어 상당한 격식을 갖춘 건물로 판단된다.

이곳에서는 동전류, 토제·철제마, 청자잔과 받침, 철화장고편을 비롯한 각종 청자 및 분청사기, 백자 등 자기류, 청동거울 및 청동수저, 벼루편 등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제사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추정 장대 건물지는 해발 230m 지점의 선황산 최정상부에 위치한다. 남북 장축으로 현 규모는 14×5.6m로 파악되나 축대의 일부만 확인된 것이다. 기단부는 경사가 낮은 부분에만 축조하고 내부는 할석재를 채워 넣었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철제 솔편을 비롯한 각종 철기류, 청동개, 대형 옹 등 도기류, 다량의 기와 등 주로 생활용기가 출토되었다.

 

 

용장산성 궁궐지 전경

 

 

용장산성 궁궐지 전경(상)과 계단식으로 축조된 궁궐지(하)

 

 

용장산성 유적은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마을에서 저수지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계곡 속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건물지의 동쪽 계곡에서 흐르는 천류(川流)가 건물지 전면에서는 서쪽으로 꺾이어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흘러 저수지로 들어간다.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의 배산인 남쪽의 협착 계곡을 축대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방향으로 모두 9단의 석단(石段)을 이루고 다시 동, 서로 1단씩 더 두어 3단이 되도록 구획되어져 있으나 서쪽의 석단은 ‘ㄱ’자로 꺾어놓은 부분이 많아 불규칙 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용장산성 건물지의 주위에는 높이 1.5~2.0m 내외의 석심토축성(石心土築城)이 에워싸고 있다. 현재 서벽의 대부분은 유실되었고, 북벽과 남벽이 남아 있는데 복원한 총 길이는 420m에 이른다. 용장산성은 진도군의 북편인 군내면과 고군면의 일부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용장리를 중심으로 벽파리 등 여러 마을을 감싸고 있다.

 

용장산성 궁궐지 입구로 들러가는 초입의 표석

 

성내의 면적은 258만평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벽파 나루터를 중심으로 반원형을 이루며 성곽이 형성되어 있는데 해안의 일부는 성곽이 없는 곳도 있다. 성벽은 주로 석재를 이용하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토성도 쌓고 있다. 지금은 용장리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 뒷산 즉 마을의 남쪽에 있는 산의 능선을 따라 조영(造營)되고 있다. 성벽의 축조는 산의 8부 능선을 따라 쌓는 일반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석재는 비교적 작은 편이나 더러 큰 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성벽이 감싸고 있는 성내의 면적이 넓은 만큼 성벽의 길이도 길지만, 해안선 부분에서 성벽을 쌓지 않은 곳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북쪽으로 뻗어나간 성벽은 벽파리 유교마을의 뒷산을 감돌아 만(灣)과 같이 쑥 들어가기 시작하는 곳에서 일단락된다. 또한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성벽은 역시 연동마을 뒷산을 감돌아돈 다음 일단락되었다. 지금은 성벽안의 해안선이 모두 염전 또는 농토로 이용되고 있으나 과거에는 배가 접안하는 부두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축의 경우 평탄한 부분에서는 내외 벽을 다 쌓는 협축을 했고 경사진 부분에서는 외부만 석축하고 내부에는 적심석을 채우면서 자연적으로 내황이 되도록 축조했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자연석을 이용해 면을 맞추어 쌓았고, ‘정(井)’자 식으로 차곡차곡 쌓고 있다.

성기(城基)는 자갈 섞인 지면을 고른 다음 두께 10㎝ 내외의 불규칙한 판석을 12~15㎝ 밖으로 내어 설치하고 그 위에 석재를 쌓아 나갔다. 석재는 상부보다 하부의 것이 크다.

 

여장(女牆)은 극히 일부에서 보이고 있는데 그나마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고 높이 35㎝ 정도만 남은 부분이 있다. 여장(女牆)의 너비는 75~80㎝정도다. 토성(土城)은 원형을 알아볼 수 없다. 현재 하부 폭은 3m이고 높이는 2.1m이다. 외부는 잡석을 쌓아 심을 박고 흙으로 덮었으며 내부는 자갈 섞인 흙을 사용하여 판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장산성내에서 가장 중심적인 산은 서낭산(215m)인데, 그 정상부에 성을 쌓은 흔적이 있다. 서낭산은 정상에서 용장산성 내부뿐만 아니라 멀리 울돌목 부근까지도 관찰할 수 있는 군사적인 요충(要衝)지대다. 용장산성은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6호로 지정됐다.

 

 

용장산성 왕국지 안에 있는 '고려 항몽 충혼탑'(상)과 안내문(하)

 

 

 

삼별초의 군수물자확보

삼별초에 의한 군수물자 확보는 주로 서해와 남해연안 및 제주 자체에서의 조달한 것이었다. 삼별초군은 진도 입거(入據) 직후인 원종11년(1270) 8월부터 바로 전라도 전역에 대해 적극 공세를 감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삼별초의 군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삼별초정부는 진도 입거(入據) 후 거점세력의 확보를 위해 대략 3단계로 작전을 확대시켜 나갔다.

초기에는 전라도 연해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했으며 제2단계로는 후방의 배후로 제주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제주도는 영암부사 김수(金須)가 200명의 군으로 현지민을 동원해 방비를 지휘하고 있었으며 삼별초의 위협이 점점 높아지자 장군 고여림(高汝霖)과 700명의 관군이 추가로 파병되어 있었다.

 

 

삼별초군이 제주도로 퇴각 하기전 까지 주둔했던 진도 남도석성전경(상)과 남도석성의 해자를 가로 지르는 쌍운교(하)

 

 

삼별초군은 제주 확보 이후의 3단계로서 경상도 남부 연해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 확보에 주력해 진도를 중심으로 전라,경상 연해지역에 대한 일정한 세력 확보에 성공했다. 진도 천도 자체가 이를 거점으로 주변의 물류를 장악하여 군수를 확보한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1271년 4월 원 중서성(中書省)의 정보에 의하면 진도측에 점령되어 있는 섬은 도합 ‘30여 소’로 파악되고 있었다. 남부 연안지역은 대체로 풍부한 물산지대인 데다 이들 물산의 운송로를 포함하고 있어서 진도측의 연안장악으로 인한 개경측의 타격은 자못 심각했다.

 

이 때문에 1271년(원종12) 3월 개경정부가 몽골에 보낸 진정표(陳情表)에서는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있다. “더욱이 지금 역적(삼별초)들이 날이 갈수록 번성하여 그 피해가 경상도 금주(김해), 밀성(밀양)에까지 미치었고 또 남선, 창선, 거제, 합포, 진도 등 해변부락에서는 모두 약탈을 당하였기 때문에 곡물의 징발(徵發)은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의 공부(貢賦)는 다 육상으로 나르지 못하고 반드시 바다로 운반해야 하는데 지금 역적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진도는 뱃길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要衝)이어서 내왕하는 배들을 통과시킬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고려사> 27, 원종세가 12년 3월)

 

제주 천도 이후 삼별초는 처음 자체 정비와 제주도 장악에 주력하였지만, 입거(入據) 이듬해인 1272년(원종13)부터는 본격적으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으로 활동지역을 확대하여 갔다. 이들의 활동은 한편 개경정부를 위협하고자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군수물자의 확보를 위한 방안이었다.

 

 

진도군 임회면   리에 있는 삼별초 배존손장군의 동상(상)과 사당(하)

 

 

이후 삼별초군의 군사 활동은 대략 다음과 같은 3단계의 과정으로 발전되어 간다.

제1단계 : 원종13년(1272) 3월~8월. 삼별초의 본거지였던 전라도 연안지역에 대한 군사 활동의 전개 기간.

제2단계 : 같은 해 9월~11월. 삼별초군의 활동이 전라도 연해로부터 충청, 경기의 서해 연해까지 확장되어 개경을 위협하며 지방 관아(官衙) 등을 적극 공략하는 단계.

제3단계 : 같은 해 11월~이듬해 초. 몽골군이 주둔하고 있던 경상도 연해지역까지 군사 활동을 확대한 시기.

 

우선 1272년(원종13) 3월부터의 1단계는 본토에 대한 군사 활동이 가장 용이한 전라도 연안 지역에 대한 공세다. 이때 삼별초군은 전라도 회령군에 침입하고 조운선 4척을 붙들었으며 인근 해남과 해제(무안군)의 연안 일대를 석권했다.

5월에는 대포(大浦, 목포)를 치고 역시 조운선 13척을 잡아갔으며, 곧이어 탐진현(강진)으로 진출했다. 3월에서 5월에 이르는 사이 고려는 조운선 20척, 미곡 3,200여 석을 빼앗겼으며 피살자 12명, 삼별초에 붙잡혀간 자가 24명이라고 집계하고 있다.

이 무렵 경상도에서는 이른바 제주삼별초의 첩자 2인이 체포되었다. 삼별초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에서 군사 행동을 진행하는 한편 경상지역 진출을 위한 정보활동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272년(원종13) 상반기에 전라도 서남 해안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던 삼별초군은 6월경에 이르러 그 활동영역을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공격의 심도를 더해가게 된다. 이것이 삼별초 군사 활동의 제2단계다.

 

삼별초는 연안의 해로를 따라 북상해 경기연안까지 진출했는데 삼별초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개경의 민심은 매우 동요되었다.삼별초군이 서해 연안 깊숙이, 경기 혹은 충청 연해지역에까지 출몰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경에 연결되는 조운로를 광범하게 차단시켜 삼별초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군수 물자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군수물자의 확보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삼별초의 궤멸은 이 같은 군수물자 확보의 한계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남도석성의 성루와 성위에서 바라본 성안의 풍경

 

 

 

 

삼별초의 군수물자 관련 포구

 

군항포(軍港浦)

삼별초 대몽항쟁의 거점이 되었던 항파두리성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은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1리 해안지역의 포구.

김통정 장군이 거느린 삼별초가 제주로 들어올 때 이용한 포구였고, 이후에도 삼별초군이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데 계속 이용했기 때문에 그 명칭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현제의 군항포전경(상) 애월환해장성(하)모습

 

 

 

조공포(朝貢浦)

‘도근포’, 혹은 ‘외도포’라고도 일컬어지는 제주시 외도동 해안지대의 포구.

삼별초군이 물자운반용 포구로서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삼별초군이 이곳 포구로부터 북제주군 애월읍 광령3리를 거쳐 항파두리성까지 이어지는 운반로를 닦았다고 하며, 이 길은 현재도 지역 주민들의 농로로 이용되곤 한다.

 

 

현제의 조공포전경(상)과 비양도(항공촬영)전경(하)

 

 

 

명월포(明月浦)

김통정 장군이 이끈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올 때 이용했고, 삼별초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여몽연합군의 본대가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치며 상륙했던 북제주군 한림읍 한림리 해안지대의 포구.

삼별초군의 물자운반과 군사작전에도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포구였다고 본다. 삼별초군은 함덕포 전투에서 패배하고, 명월포에서도 여몽연합군의 상륙을 저지시키지 못한 채 항파두리성으로 퇴각하면서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게 된다.

 

 

 

여몽연합군의 제주상륙

 

용장산성 포토 / http://blog.naver.com/crom2481/120103611050

삼별초, 최후를 맞다...몽골 지배의 시작 /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Print.html?idxno=97018

 

 

 

류금신-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