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卉.園藝.植物.田園/여행(旅行)

포탈라궁 (布達拉宮)

호남인1 2012. 3. 24. 18:55

 

 

 

 

포탈라궁 (布達拉宮)

[Potala Palace,]

 

1645년 제5대 다라이라마 때 처음 건축되었고, 그후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전신은 토번[吐蕃] 왕 손첸감포(617~650) 시기의 홍산궁전(紅山宮殿)이라고 전해진다. 궁체(宮體)는 궁성, 궁전, 뒷산의 조경 등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성은 남북길이 200m, 동서길이 320m이고 동쪽·남쪽·서쪽 각각에 3층 높이의 누각이 딸린 성문이 있으며, 남동쪽·남서쪽에도 성루가 있다. 성 안의 건물은 세수(稅收)·사법(司法)·감옥(監獄)·인경원(印經院)·마구간 및 일꾼들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 정상에 있는 건물은 동서로 총길이가 360m이고 높이가 110m로, 백궁(白宮)·홍궁(紅宮)·사원·광장 및 4개의 큰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궁은 다라이라마가 거주하는 궁전으로, 6층 높이의 중앙 누각 앞에는 지붕으로 둘러싸여 있는 큰 광장이 있다.

 

중앙 누각에는 대전, 다라이라마의 침궁, 섭정자와 다라이라마의 스승이 묵는 방, 각종 창고 등이 있다. 홍궁은 주로 종교를 위한 곳으로 9층의 중앙 누각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다. 중앙 누각 안에는 대전, 역대 다라이라마의 영정을 모신 사당(靈塔殿)과 각종 불전(佛殿) 등이 있다.

 

각 영탑전 위에는 금으로 도금을 한 지붕이 있는데, 그 기세가 매우 웅대하다. 산 정상 서쪽에는 사원이 있다. 뒷산 호수지역은 룽왕탄[龍王潭]이라고 한다. 주위에는 거대한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3층 높이의 누각이 세워져 있고 아름다운 조경이 형성되어 있다.

 

다라이라마 궁 안에는 대량의 불상과 벽화가 있다. 벽화에는 불경고사(佛經故事) 이외에도 문성(文成)·금성(金城)의 두 공주가 티베트로 들어오는 모습과 제5·13대의 다라이라마가 순치제(順治帝)·광서제(光緖帝)·서태후(西太后) 등의 천자를 배알하러 수도로 들어가는 모습 등의 역사적인 제재를 다룬 것도 있다.

 

궁 안에는 진귀한 경서 이외에도 청 황실이 다라이라마를 책봉한 금책(金冊)과 금인(金印), 대량의 진귀한 문물 등이 소장되어 있다.

 

룽왕탄[龍王潭]

 

포탈라 궁(중국어 간체: 布达拉宫, 정체: 布達拉宮)은 해발 3,700미터로 티베트 자치구의 라싸에 위치하고 있다. 1642년 제5대 달라이라마에 의해 티베트 왕조 간덴 왕국의 성립 후, 그 본거지로서 티베트의 중심지 라싸의 언덕 위에 10여 년에 걸쳐서 건설된 궁전이다.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고,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7세기 초 티베트 왕조 33대 왕 송첸감포가 티베트를 통일하고, 보에 왕국(토번국)을 세웠다. 637년 송첸감포는 라싸의 홍산(紅山)이라는 언덕위에 포탈라궁을 짓게 된다. 641년 당태종의 조카이며 수양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맞게 되는데, 일설에 의하면 문성공주를 위해서 포탈라궁을 지었다고 한다. '포탈라'라는 이름은 ‘관음보살이 산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의 ‘포탈라카(普陀珞珈)’에 유래한다.

 

 

1642년, 위대한 제5대 달라이라마(1617-1682)를 왕으로 하는 티베트 왕조 간덴 왕국이 성립된다. 1645년에 달라이라마는 오랫동안 훼손된 포탈라 궁전을 개축하기 시작하는데, 1648년에 백궁이 완성되어 정부를 이곳의 백궁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의 사후인 1694년까지 공사는 계속되어, 1690~94년에 홍궁이 증축된다.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탈출하여 망명정부를 세웠는데, 이곳 포탈라궁은 중국군이 접수하면서 일부 파손되었다. 1966년 전국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도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로 이곳은 보존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파손·손상된 유적은 10만 건에 이른다.

 

 

 

그후 오랫동안 비워두고 공개하지 않았으나 마오쩌뚱이 사망하자 중국 정부는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보수하여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포탈라 궁 내부는 백궁 일부의 방 이외는 원칙적에 비공개, 홍궁은 역대 달라이라마의 옥좌나 영탑 등이 공개되고 있다.

1994년, 라싸의 포탈라궁이 역사적 유적군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0년에 조캉사원이 등록되고, 2001년에는 노부링카가 추가 등록됐다.

 

 

 

백궁

 

달라이라마의 거주지 백궁

백궁은 포트랑 카르포(Potrang Karpo)라고도 하며, 포탈라 궁의 일부로 달라이라마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최초의 백궁은 제5대 달라이라마의 생전에 만들어졌고, 1649년 그의 왕조가 이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20세기 초기 제13대 달라이라마 때 이루어진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거주지 백궁

 

 

홍궁

홍궁은 포트랑 마르포(Potrang Marpo)라고도 하며, 주로 종교의식과 연구를 위해 사용되는 곳이다. 이곳은 많은 복합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불구불한 통로 사이로 사원과 장서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라싸의 중심에 높이 솟은 언덕 위에 세워진 포탈라궁은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던 곳으로, 정치와 종교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포탈라궁은 1645년부터 1693년 사이에 5대 달라이 라마가 개축한 것으로, 원래는 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송첸 감포왕이 당나라로부터 맞아들인 문성공주를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이 궁 안은 1,000개가 넘는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방들은 달라이 라마들이 살았던 막사들을 비롯하여 그들이 묻힌 화려한 무덤들과 정부관청들, 불교 경전들을 손으로 목판 인쇄하였던 인쇄소, 신왕 즉 달라이 라마를 직접 호위하던 최고 지위에 있는 승려들이 운영하는 정부관리 교육 학교, 화려하게 장식이 된 수백개의 회당과 성전으로 쓰인 것들이다. 방 외에 홀과 복도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부처, 보살, 성인 그리고 악마 등 티베트의 만신전 상들이 수천 개 있다.

 

궁 바깥에는 원형의 하얀 탑들이 서 있는데 원래 방어 시설이었던 것으로, 전설에 의하면 미래의 엄청난 홍수로부터 포탈라궁을 안전한 곳으로 날려보내기 위한 날개들이었다고 한다.

 

왕궁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 밑에는 승려들과 시중들이 거주하고, 달라이 라마와 섭정들의 보물과 국가보물 등을 보관하는 작은 방들이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밑으로는 식량보고와 순례자들의 선물들, 여러 해 동안 포탈라궁 안의 많은 방에 램프를 켜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양의 기름을 쌓아 놓은 창고가 있다. 마지막으로 건물 바닥에는 적들을 가두기 위한 지하감옥이 있다.

 

포탈라궁을 돌아볼 때는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승려들이 관리하는 국립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여행기

라싸에 도착한 첫날, 포탈라 궁에 절대로 올라가지 마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7418&CMPT_CD=P0001

 

 

 

 

라싸 [Lasa, 拉薩]

(병) Lasa (웨) Lasa (영) Lhasa.

티베트의 수도.

 

브라마푸트라 강의 지류인 라싸 강 부근,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의 3,65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라싸는 9세기에 이미 토번(吐蕃 : 티베트에 있던 옛 국명)의 수도였다. 842년 토번의 왕이 암살된 후 국가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그후 몇 세기 동안 종교적으로는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 도시는 토번의 종교 중심지였고 주민의 상당수가 불교승려와 신도들이었다. 1642년 다시 중앙 정부의 수도가 되어 20세기까지 이 위치를 고수했다. 1951년 라싸와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되었으나, 1959년까지는 티베트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1959년부터 중국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라싸의 주변과 대표적 불교문화유적지.

 

도시 중앙에는 7세기 중엽에 건설된 축락캉(Gtsuglag-khang) 사원이 있는데, 4층으로 된 이 사원은 티베트 최고의 성지로 여겨진다. 1951년 이 건물의 예술적·건축적 전통미를 복원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어 1979년에는 원래의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다른 유적으로 루캉(Klu-khang) 사원, 한때 달라이 라마의 겨울 숙소로 사용되기도 한 포탈라 궁,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이었던 놀북링카(Nor-bu-glingka : '보석궁'이란 뜻으로 지금은 인민 휴양 공원)가 있다. 티베트 최대 사원인 데풍(Drepung) 사원과 세라(Se-ra) 사원이 복원되었다.

 

중국이 점령하기 전에 라싸의 경제는 중국·인도·네팔·부탄에서 라싸로 통하는 역사적 교역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수공예품을 제외하고는 무기제조 및 조폐가 유일한 산업이었다. 1980년대 중국은 라싸를 대외무역을 위해 개방하고 그 외곽에 실험농장을 설립하여 목축업의 과학화를 장려했다. 중소기업으로 화학제품생산, 전기 모터 제조, 제혁, 울 가공, 약품 및 비료 생산, 자동차 정비 및 수리, 트랙터 조립, 융단·양탄자 제조, 시멘트 생산 등이 있다. 사범대학과 공항이 하나 있다. 중국의 쓰촨 성[四川省], 칭하이 성[靑海省],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대도시들과 도로로 연결된다. 인구 106,000(1988).

 

 

 

달라이 라마 [Dalai Lama, 達賴]

 

1959년에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지배하기 전에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동시에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제1대 달라이 라마는 타시륀포 사원(티베트 중부)의 창립자이자 사원장인 게뒨둡파(Dge-'dun-grub-pa 根敦珠色:1391~1475)였다. 라마교의 승려가 환생한다는 믿음은 14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 믿음에 따라 게뒨둡파의 후계자들은 그가 환생한 존재로 여겨졌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śvara)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제2대 달라이 라마인 게뒨걈초(Dge-'dun-rgya-mtsho 根敦嘉木磋:1475~1542)는 티베트의 라사 교외에 있는 데풍사의 사원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달라이 라마는 주로 이 사원에서 거처했다.

 

그의 후계자인 쇠남걈초(Bsod-nams-rgya-mtsho 索諾木嘉木磋:1543~88)는 몽골 족장인 알탄 칸을 방문했다가 그 통치자한테서 '탈레'(ta-le:영어식으로 쓰면 '달라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탈레'는 '바다'를 뜻하는 티베트어의 '걈초'와 같은 뜻을 가진 몽골어인데, 아마 바다처럼 넓고 깊은 지혜를 의미하는 칭호일 것이다. 이 칭호는 이미 죽은 2명의 교주에게도 추서되었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를 곌바 린포체('위대하고 존귀한 정복자')라고 부른다.

 

제4대 달라이 라마인 왼텐걈초(Yon-tan-rgya-mtsho 雲丹嘉木磋:1589~1617)는 알탄 칸의 증손자였고,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인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 환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제5대 달라이 라마인 아왕롭상걈초(Ngag-dbang-rgya-mtsho 阿旺羅卜藏嘉木磋:1617~82)는 흔히 '위대한 제5대'라고 한다. 그는 코슈트 몽골족의 군사적 도움을 얻어 다른 종파들을 누르고 티베트에서 황모파가 세속권력을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는 티베트를 다스리는 동안, 라사에 달라이 라마의 궁전인 장엄한 포탈라 궁을 지었다.

 

제6대 달라이 라마인 창뱡걈초(Tshangs-dbyangs-rgya-mtsho 倉洋嘉木磋:1683~1706)는 자유사상가이며 몹시 방탕해서 그처럼 권위있는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몽골족에 의해 해임됐으며 군사들이 중국으로 호송하는 도중에 죽었다.

 

제7대 '켈상걈초'(Bskal-bzang-rgya-mtsho 喝蔵臧嘉木磋:1708~57) 시대에는 내란을 겪었으며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제8대 잠펠걈초('Jam-dpal-rgya-mtsho 江色爾嘉木磋:1758~1804)는 네팔의 구르카 왕국의 침략을 받았으나, 중국의 군사 원조로 그들을 물리쳤다.

 

제9~12대의 4명의 달라이 라마 룽톡걈초(1806~15), 출팀걈초(1816~37), 케둡걈초(1838~56), 틴레걈초(1856~75)는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고, 이 시기에 티베트는 섭정이 다스렸다.

 

제13대 달라이 라마인 둡텐걈초(Thub-bstan-rgya-mtsho 圖丹嘉木磋:1875~1933)는 대단한 개인적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다. 1912년에 중국에서 청 왕조에 반대하는 혁명이 성공하자, 티베트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열된 중국 군대를 몰아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주권 국가의 통치자로 다시 군림하게 되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걈초(Bstan-'dzin-rgya-mtsho)는 1935년에 중국의 칭하이 성에서 티베트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1940년에 티베트의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가 되었지만, 티베트 국민이 1950년부터 그 나라를 점령한 중국 공산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1959년에 인도로 망명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걈초(Bstan-'dzin-rgya-mtsho)

 

 

문성공주

 

브리쿠티(좌)-송첸캄포(中)-문성공주(우)

 

문성공주(중국어: 文成公主, 623년경- 680년)는 당 태종의 조카딸로 토번이라 일컫는 티벳 송첸캄포 왕의 제2 황후이다.

 

640년 당을 떠나 그 다음 해 티벳에 도착하여 평화 조약의 일부로 얄루 왕 송첸캄포와 국혼을 치렀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송첸캄포의 제1황후 ‘브리쿠티 데비’와 함께 티베트에 불교를 소개했다고 전한다.

 

634년 티벳의 송첸캄포는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의 공주를 맞이해 국혼을 하고자 한다는 의향을 전달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송첸캄포의 특사는 돌아와서 당이 또 다른 티벳 유목민족인 토욕혼을 이유로 답하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송첸캄포는 대노하여 638년에 당나라 속국인 토욕혼에 군사를 보내 정벌하고, 왕의 딸을 첩으로 맞았다.

 

640년 정관 14년에 송첸캄포는 황금 오천량과 수백건의 보물을 가지고 가르통첸장안에 보내 당 태종에 청혼을 하여, 문성공주를 얻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포탈라궁은 송첸캄포가 문성공주를 맞아들이기 위해 지은 궁전이라고 전한다. 641년, 정관 15년 예부상서 이도종이 석가모니상과 보물, 경서, 경전 360권 등의 예물을 가지고 문성공주를 데리고 토번으로 들어간다.

 

송첸캄포는 라싸 근방까지 마중나가 영접을 하였고, 당나라는 그에게 부마도위라 칭하고, ‘서해군왕(西海郡王)’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송첸캄포 왕과의 결혼 생활은 649년 왕의 죽음으로 끝나고, 680년 영륭원년 문성공주는 세상을 떠난다.    

                                          文成公主  wén chéng gōng zhǔ  문성공주

 

문성공주는 토번에 위대한 공헌을 했으며, 이것은 서장인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현대로는 문성공주를 타라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티벳명상음악 자경(慈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