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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珍島) - 보배섬

호남인1 2012. 3. 23. 22:01

 

 

 

 

 

 

진도(珍島) - 보배섬

 

진도(珍島)는 한반도 남서쪽 끝에 자리한, 행정 구역상으로 전라남도 진도군에 속하는 섬이다. 한국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3번째로 큰 섬(진도 본섬으로 비교)으로 전라남도 면적의 3.6%를 차지하며, 수리적(數理的)으로는 동경 125°37'∼126°28', 북위 34°08'∼34°35'에 위치한다. 면적은 430.7㎢, 해안선의 길이는 662.3km이다.

 

육지에서 300여 m의 명량해협(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물살이 세어 옥동에서 벽파진 나루터로 왕래했다. 현재는 전라남도에서 최고로 긴 다리이자 연륙교진도대교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지질은 주로 반암이며, 남동쪽은 첨찰산·여귀산 등의 500m에 가까운 산지로 되어 있으나, 남서쪽은 고도가 낮아 평지가 총면적의 32%나 된다. 평지는 대부분 구릉성이고 욕실천·침계천 유역이 비옥하여 농경지에 적당하다.

 

근해어업의 중심지로, 조기를 비롯하여 도미·갈치·김 등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 제53호로 보호를 받고 있는 진돗개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해무가 깔린 진도대교 전경 / 사진 김영남작

 

 

 

진도군 [珍島郡]

본도인 진도를 비롯하여 23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도대교로 육지와 연결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 아니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물·유적, 천연기념물, 기·예능보유자가 많아 종합 관광지로 발전 가능한 곳이다.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가사·거차 출장소 등 1개읍 6개면 2개 출장소 98개 동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242개).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이다. 면적 430.86㎢, 인구 35,953(2006), 인구밀도 83.4명/㎢(2006).

 

 

진도군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한반도 서남쪽 바다의 230여 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섬인 진도는 1년 농사로 3년을 먹고산다. 말이 있을 만큼 농경지가 넓고 농산물이 풍부한 편이다. 섬 주변의 바다에서는 어류와 해조류가 많이 난다. 그래서 섬 이름도 ‘보배의 섬’이란 뜻의 '진도'라 붙여졌다.

 

섬 전역에는 다양한 역사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그 중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항몽유적지이고, 명량대첩으로도 불리는 명량해협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승지이다.

 

또한 진도에는 8경과 3보가 있다. 진도 8경은 명량대첩지인 울돌목해안, 신비의 바닷길, 관매도의 관매 8경, 남도석성, 운림산방, 용장산성 등을 가리킨다. 진도 3보는 진돗개, 구기자, 자연산 돌미역을 말한다.

 

그리고 해마다 음력 2월 그믐께에는 고군면 회동리와 바다 건너 의신면 모도 사이에 길이 2.8km, 폭 40여m의 바닷길이 열린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릴 즈음이면 영등제가 개최되어 수많은 외지 관광객이 몰려든다.

 

진도읍에서 7km 떨어진 곳에 쌍계사라는 절이 있으며,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조선 말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기거하던 곳을 그의 손자 남농 허건이 유품 전시관으로 복원시켜 놓은 운림산방이 있다.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에는 지난 1984년 10월 18일에 진도대교(484m)가 완공됨으로써 육로를 통해 진도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진도 운림산방

 

 

 

진도군의 연혁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 고군면 일대에,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임회면지역에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진도현으로 개칭, 무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매구리현은 첨탐현(瞻耽縣)으로 개칭, 뇌산군(牢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인 940년에 뇌산군이 가흥군으로, 첨탐현은 임회현으로 바뀌었다. 1018년(현종 9) 진도현은 나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44년(인조 21)에 현령이 파견됨으로써 독립했으며,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 가흥현(嘉興縣:군내면 분토리)이 임회현(臨淮縣:임회면)과 함께 진도의 속현으로 합병되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김통정·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몽골에 항거하여 진도 용장성에 와서 저항했으나 이듬해에 제주도로 쫓겨갔다. 고려말 왜구의 약탈이 심하여 1350년(충정왕 2)에 영암군지역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조선에 들어서도 잔폐해진 읍세가 복구되지 않아 1409년(태종 9)에 해남현에 병합되어 해진군(海珍郡)이라 불렀다.

 

그러나 1437년(세종 19)에 다시 두 고을을 나누어 진도군을 설치했으며, 1440년(세종 22)에 읍의 중심지를 외이리(外耳里:지금의 고군면 고성리)에서 지금의 진도읍으로 옮겼다. 1866년(고종 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874년(고종 11)에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되었다.

 

진도의 별호는 옥주(沃州)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나주부 진도군, 1896년에 전라남도 진도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삼촌면을 해남군에, 명산면을 영암군에 이관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부내면·지산면·조도면은 그대로, 고이면·고일면이 고군면으로, 군일면·군이면이 군내면으로, 의신면·명금면이 의신면으로, 임일면·임이면이 임회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 부내면을 진도면으로 개칭했으며, 1964년에 조도면에 가사출장소를, 1966년에 조도면 서거차도에 거차출장소를 설치했다. 1979년에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5년에 진도대교가 준공됨으로써 육지와의 연결이 쉬워졌으나, 조선시대에도 진도는 본래의 도서(島嶼) 문화, 남도문화적인 특성과 함께 유배지로서 많은 사대부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육지문화의 접촉이 많아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항몽유적지 배중손장군의 사당

 

 

 

진도군의 자연환경

 

높은 산은 없고 대부분 200~400m 내외의 잔구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진도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m)·덕신산(德神山:395m), 서쪽에 지력산(智力山:325m)·석적막산(石積幕山:240m), 남쪽에 여귀산(女貴山:457m)·희여산(270m), 북쪽에 고두산(高頭山:252m)·설매봉(雪梅峰:247m) 등이 솟아 있다.

 

하천은 지산면에서 인지천, 의신면에서 의신천, 고군면에서 향동천·고군천 등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소하천이 대부분으로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지 못했으며, 해안일대의 간석지가 농경지로 변모되고 있다.

 

총 231개의 섬 가운데 유인도 42개, 무인도 189개이며, 대부분 군의 남서쪽에 있다(1990). 비교적 큰 섬은 진도를 비롯한 접도·관매도·동거차도·서거차도·하조도·상조도·가사도 등이다.

진도대교가 있는 해남반도와 군 입구 사이의 명량해협(또는 울돌목)은 너비 295m로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나,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연평균기온 13.9℃ 내외, 1월평균기온 2.1℃ 내외, 8월평균기온 27.2℃ 내외이며, 연강수량은 1,256.6㎜ 정도이다.

동백나무·후박나무·참가시나무·감탕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군내면에 있는 금골산과 금성초등학교 전경

 

진도군은 전라남도 21개군 가운데 구례군(3만 5,856명)·곡성군(4만 835명)에 이어 인구가 3번째로 적은 곳이다.

 

1970년 10만 5,195명을 최대로 한 후 1975년 10만 376명, 1980년 8만 3,335명, 1985년 7만 2,827명, 1995년 4만 5,511명, 2006년 3만 5,953명으로 1970~80년에 20.8%, 1985~95년에 37.5%, 1995~2006년에는 21.0%의 감소율을 보여 인구 감소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가구수는 1970년 1만 8,808가구, 1980년 1만 7,710가구, 1995년 1만 5,743가구, 2006년 1만 5,799가구이며, 가구당 인구수는 1970년 5.6명에서 1995년 2.8명, 2006년 2.3명으로 줄어들어 다른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이촌향도 현상과 함께 뚜렷한 핵가족화 현상을 볼 수 있다.

 

2006년 현재 인구 이동상황은 전입이 3,717명, 전출이 4,141명이며, 전출·전입 모두 도외로의 이동이 많다. 군 전체 인구의 30.6%가 진도읍(1만 1,002명)에 집중해 있는 반면, 조도면(3,723명)에 가장 적은 인구가 분포하고 있다.

 

 

 

진도군의 산업과 교통

 

주민의 80% 이상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총경지면적 127.09㎢ 가운데 논 71.36㎢, 밭 55.73㎢ 로 논밭의 비율이 비슷하며, 경지율은 30%이다(2006). 농산물로는 쌀·쌀보리·맥주보리·고구마 등을 비롯하여 콩·유채·마늘·참깨 등과 각종 채소류 및 구기자·엽연초 등이 생산된다.

특산물로 손꼽히는 구기자는 진도읍·의신면을 중심으로 생산되며, 단감·포도·배·복숭아 등의 과일은 군내면·지산면을 중심으로 생산된다. 또한 양봉은 고군면·의신면에서, 양잠은 군내면·지산면에서 활발하다.

임야면적은 254.73㎢ 로 군 전체면적의 약 59%를 차지하며, 임산물로 밤·대추·표고버섯 등이 생산된다.

 

축산으로는 한우·젖소·개·돼지·닭 등이 사육되는데, 한우와 닭은 조도면, 젖소는 군내면, 돼지는 임회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진도읍·지산면·임회면을 중심으로 사육되는 진돗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4~9월에 심사하여 우수한 것은 족보에 올리기도 한다.

 

수산업 또한 활발하여, 연근해에서는 도미·새우·멸치·삼치 등이 많이 잡히고, 김·굴·미역 등의 양식도 활발하다. 연간 15만 8,764t 정도의 수산물을 어획하며, 1,119억 2,200만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2006). 구기자·돌미역·진돗개는 오래 전부터 진도군의 3대 보배로 손꼽혀왔다.

지하자원의 매장은 많지 않으나 군내면·조도면을 중심으로 연간 4,950t의 납석을 채굴한다. 총광구수 38개소 가운데 2개소가 가동중이다(2006).

 

제조업의 발달은 미비하여 총 31개 업체에서 370명의 종업원이 일한다(2006). 군내에서 생산되는 원료를 바탕으로 한 도정·제분·양조·미역가공 등이 영세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진도읍에 상설시장이 있고 진도읍·고군면·의신면·임회면·조도면 등 5개소에 5일 정기시장이 열린다. 대부분 가축시장을 겸하며, 농산물과 일용잡화가 거래된다.

 

군의 북동쪽 고군면 벽파리의 벽파항이 목포-완도, 목포-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이므로 목포·완도·제주와 연결되며, 조도면의 여러 섬은 조도-목포 간에 운항되는 정기여객선으로 연결된다.

 

해남반도에서 이어지는 국도가 진도대교(길이 484m)를 통해 군의 중앙부를 통과하며, 지방도가 진도읍을 중심으로 군내 주요지역으로 통한다. 도로총길이 332.9㎞, 도로포장률 70.5%이다(2006).

 

진도대교(The twin Jindo Bridge)

 

 

진도군의 유물·유적·관광

 

진도군 군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 1, 사적 2, 천연기념물 5, 명승 1, 중요무형문화재 4),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6, 무형문화재 6, 기념물 7), 문화재자료 5점이 있다.

 

불교문화재로 군내면 둔전리에 금골산5층석탑(金骨山五層石塔:보물 제529호), 임회면 상만리에 진도상만리5층석탑(珍島上萬里五層石塔: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군내면 용장리에 용장사석불좌상(龍藏寺石佛坐像: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에 쌍계사대웅전(雙溪寺大雄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월하당부도(月下堂浮屠)·정견당부도(正見堂浮屠)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진도읍 교동리에 진도향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가 있다. 그밖에 진도읍 성내리에 진도한정석가옥(珍島韓正錫家屋:중요민속자료 제166호), 의신면 사천리에 운림산방(雲林山房:전라남도 기념물 제51호) 등의 건축물과 군내면 용장리에 용장산성(龍藏山城:사적 제126호), 임회면 남동리에 남도석성(南挑石城:사적 제127호) 등 삼별초 유적지가 있다.

 

군내면 녹진리의 이충무공파왜철삭가설지(李忠武公破倭鐵索架設地)는 강강술래를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군내에는 천연기념물과 기·예능보유자가 많은데, 천연기념물로 진도읍의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 진도읍 수류리와 군내면 덕병리의 백조도래지(천연기념물 제101호), 의신면 사천리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07호), 임회면 상만리의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1호), 조도면 관매리의 후박나무(천연기념물 제212호) 등이 있다.

 

기·예능보유자로는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의 최소심(崔小心), 〈남도들노래〉(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의 설재천(薛在天)·조공례(曺功禮), 〈진도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의 박병천(朴秉千)·채계만(蔡桂萬)·김대례(金大禮), 〈진도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의 강준섭(姜俊燮)·조담환(曺淡煥), 〈진도북놀이〉(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의 박관용(朴寬用)·장성천(張成天)·양태옥(梁太玉), 〈진도만가〉(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의 김항규(金恒奎) 등이 있다.

 

남도석성

 

진도군은 유물·유적이나 천연기념물 등은 물론 군의 남서부 도서지역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여 관광객이 많다. 주요관광지로는 명량전첩지로 유명한 울돌목해안, 신비의 바닷길, 관매8경, 해안일대의 기암절벽, 남도석성, 운림산방, 용장산성, 금골기암 등이 있으며, 특히 금골기암과 신비의 바닷길이 유명하다.

 

군내면 둔전리 금골산에 있는 금골기암은 오래전부터 '진도의 금강', '옥주의 계곡'이라 불릴 정도로 기암과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부락과 의신면 모도리(띠섬) 사이에 열리는 신비의 바닷길은 매년 음력 2~3월 보름이나 그믐에 수심 5~6m이던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이 2.8㎞, 너비 40~60m 정도의 바닷길이 열려 일대 장관을 이루며, 약 1시간 동안 계속된다.

 

진도군의 연간 관광객수는 534만 명 정도인데(2006), 바닷길이 열리는 4~5월에 반 이상이 찾아온다.

 

거북선 유람선

 

 

진도군의 교육과 문화

 

진도군 전통교육기관으로 진도향교·봉암서원이 있었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은 1909년에 개교한 진명학교(지금의 진도초등학교)이다. 2006년 현재 유치원 22개소, 초등학교 46개교(분교 16개교 포함), 중학교 9개교(분교 1개교 포함),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진도군문화예술관·군립도서관·군민회관 등이 있다.

 

1965년에 개원한 진도문화원에서는 무형문화재의 전승 및 조선시대 남종문화의 대표화가인 허유(許維)를 추모하는 소치미술제(小痴美術祭)를 주관하는 등 향토예술의 발굴에 힘쓰고 있다. 또한 군에서는 매년 4월 향토문화제인 영등제를 개최하며, 문화 행사로는 축등행렬·노래자랑과 각종 민속경연 등이 있다.

 

설화로는 벽파진 할아버지에 대한 유래담을 비롯하여 〈쌀굴전설〉·〈고막뫼전설〉 등이 있다. 민요로는 〈진도아리랑〉·〈강강술래〉·〈들노래〉·〈살랭이상여소리〉·〈둥덩이타령〉·〈보리타작노래〉·〈맷돌질노래〉 등이 불린다. 2006년 현재 의료기관으로는 병원 2개소, 의원 13개소, 치과의원 3개소, 한의원 3개소, 보건소 관련 의료기관 22개소가 있다. 사회복지시설은 아동복지시설 9개소, 노인복지시설 3개소가 있다. 孫龍澤 글

 

 

 

진도군의 행정 구역

 

진도군의 행정 구역은 1읍 6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도군의 면적은 439.649㎢이며, 인구는 2009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5,580 세대 43,181명이다.

 

행정 구역

 

진도읍(珍島邑)

세대 : 4,336

인구 : 10,723

면적 : 44.32

동외리, 쌍정리, 성내리, 교동리, 남동리, 포산리, 수역리, 수유리, 산월리, 해창리, 염장리

 

군내면(郡內面)

세대 : 1,654

인구 : 3,607

면적 : 63.95

나리, 녹진리, 덕병리, 둔전리, 세등리, 용장리, 송산리, 분토리, 월가리, 정자리

 

고군면(古郡面)

세대 : 1,864

인구 : 4,225

면적 : 48.48

석현리, 고성리, 도평리, 오류리, 벽파리, 내산리, 오산리, 지막리, 원포리, 향동리, 금계리

 

의신면(義新面)

세대 : 1,987

인구 : 4,202

면적 : 66.25

사천리, 침계리, 칠전리, 창포리, 돈지리, 옥대리, 청용리, 연주리, 초사리, 모도리, 거룡리, 만길리, 송정리, 금갑리, 구자도리

 

임회면(臨淮面)

세대 : 2,007

인구 : 4,122

면적 : 69.62

명슬리, 삼막리, 용호리, 고정리, 사령리, 석교리, 봉상리, 상만리, 죽림리, 백동리, 굴포리, 남동리, 연동리

 

지산면(智山面)

세대 : 1,957

인구 : 3,986

면적 : 89.91

인지리, 관마리, 삼당리, 고야리, 앵무리, 길은리, 소포리, 거제리, 보전리, 와우리, 가치리, 가학리, 심동리, 오류리, 송호리

 

조도면(鳥島面)

세대 : 1,775

인구 : 3,316

면적 : 57.11

관매도리, 동거차도리, 서거차도리, 신육리, 창유리, 대마도리, 소마도리, 관사도리, 나배도리, 맹성리, 여미리, 성남도리, 죽항도리, 독거도리, 청등도리, 모도리, 맹골도리, 진목도리, 옥도리, 눌옥도리, 외병도리, 내병도리, 가사도리

 

진도군(珍島郡)

세대 : 15,580

인구 : 43,181

면적 : 439.649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석성과 쌍운교

 

 

진도군의 역대 국회의원 일람

대수 / 이름 / 소속정당 / 임기 / 선거구역

 

제1대 : 김병회(金秉會) 무소속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진도군 일원

제2대 : 조병문(曺秉雯) 무소속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진도군 일원

제3대 : 조병문(曺秉雯) 자유당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진도군 일원

제4대 : 손재형(孫在馨) 무소속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진도군 일원

제5대(민의원) 박희수(朴熺洙) 민주당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진도군 일원

제6대 : 이남준(李南俊) 민주공화당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진도군 일원

제7대 : 이남준(李南俊) 민주공화당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진도군 일원

제8대 : 손재형(孫在馨) 민주공화당 1971년 7월 1일 - 1972년 10월 17일 진도군 일원

제9대 : 임충식(任忠植) 민주공화당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해남군·진도군 일원

          박귀수(朴貴洙) 무소속

제10대 : 김봉호(金琫鎬) 민주공화당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해남군·진도군 일원

            임영득(任煐得) : 무소속

제11대 : 이성일(李成一) 한국국민당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해남군·진도군 일원(제10선거구)

            민병초(閔炳楚) 민주한국당

제12대 : 정시채(丁時采) 민주정의당 1985년 4월 11일 - 1988년 5월 29일 해남군·진도군 일원(제10선거구)

            김봉호(金琫鎬) 신정사회당

제13대 : 김봉호(金琫鎬) 평화민주당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해남군·진도군 일원

제14대 : 김봉호(金琫鎬) 민주당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해남군·진도군 일원

제15대 : 김봉호(金琫鎬) 새정치국민회의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해남군·진도군 일원

제16대 : 이정일(李正一) 무소속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해남군·진도군 일원

제17대 : 이정일(李正一) 새천년민주당 당선 무효 해남군·진도군 일원

            채일병(蔡日炳) 새천년민주당 2006년 10월 26일 - 2008년 5월 29일

제18대 : 김영록(金瑛錄) 무소속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해남군·진도군·완도군 일원

 

 

진도의 제4대,8대 국회읜원을 지낸 소전 손재형과 글씨

 

 

진도씻김굿

 

진도씻김굿은 무당이 하는 제사 중 하나로, 이승에서 풀지 못한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고, 즐겁고 편안한 세계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이며, 원한을 씻어준다해서 씻김굿이라 부른다.

 

씻김굿은 불교적인 성격이 강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시간과 장소에 따라 굿의 내용이 다르다.

 

초상이 났을 때 시체 옆에서 직접하는 곽머리씻김굿과 죽은지 1년 되는 날 밤에 하는 소상씻김굿, 죽은지 2년 되는 날 밤에 하는 대상씻김굿,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좋지 않은 일들이 자주 일어날 때 벌이는 날받이씻김굿, 임시로 무덤을 만든 후 묘를 만들 때 하는 초분이장 때 하는 씻김굿, 집안의 경사에 대해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하는 영화씻김굿,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넋건지기굿, 총각이나 처녀로 죽은 사람들끼리 혼인을 시켜주는 저승혼사굿 등이 있다.

 

씻김굿의 순서는 조왕의 하강일(下降日)이거나 도회(都會)일 때 하는 조왕반과 조상께 굿하는 것을 알리는 안땅, 길에서 죽어 떠도는 혼을 불러들이는 혼맞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들이는 초가망석, 불러들인 영혼을 즐겁게 해주는 처올리기, 천연두신인 마마신을 불러 대접하는 경우와 죽은 사람의 이승 친구들의 영혼을 불러 즐겁게 해주는 손님굿, 불교적인 제석굿, 원한을 상징하는 고를 풀어가며 영혼을 달래주는 고풀이, 시신으로서의 영돈을 마는 영돈놀이,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 즐겁고 편안한 세계로 가도록 기원하는 이슬털기, 영돈 위의 넋을 끄집어내어 손에 들고 십왕풀이를 하는 왕풀이, 이승에서 맺힌 원한을 모두 풀어주는 넋풀이, 억울한 원한의 넋두리를 풀어주는 동갑풀이, 약을 구하지 못해 죽은 한을 풀어주는 약풀이, 죽은 사람의 한이 풀어졌는가를 보는 넋올리기, 가족이나 친척들이 손대를 잡으면 죽은 사람의 혼이 내려와 원한을 말하는 손대잡이, 저승의 육갑을 풀어주는 희설,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깨끗이 닦아주는 길닦음, 죽은 사람의 혼을 공손히 보내는 종촌으로 되어 있다.

 

진도씻김굿의 음악은 육자배기목(시나위목)을 중심으로 피리와 대금, 해금, 장고, 징으로 이루어진 삼현육각반주로 진행된다.

 

무당은 흰색 옷에 다홍색 띠를 걸치는 정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불교적 성격이 짙은 승복과 비슷하며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지전(紙錢)춤을 춘다. 노래는 홀로 부르는 통절(通節)형식과 선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로 받는 장절(章節)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의 부침새와 여러 가지 세련된 목구성을 구사해 매우 흥겹고 아름답다.

 

진도씻김굿은 죽은 사람 뿐 아니라 산 사람의 무사함을 빌고 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굿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 요소가 뛰어나고 자료가치가 커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시래기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여지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오랜 옛날부터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둘째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으로 민속가면극에서의 파계승 마당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금골산 5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전남 진도 금정초등학교 안에 있다. 1973년 학교 터를 다지는 와중에 석재, 초석, 온돌의 흔적 등이 발견되면서 이 곳이 고려시대 해월사터였음을 추정하게 되었다.

 

높이는 5.4m로 넓적한 돌 4개를 세워 만든 기단 위에 아무런 장식 없는 장방형 돌 2개을 얹고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 모서리와 4면에 기둥장식 우주(모서리기둥)와 탱주(버팀기둥)가 장식되었다. 대체로 몸돌 폭이 좁은 가운데 1층과 2층 몸돌(옥신석)의 차이가 크다.

 

1층 몸돌은 유난히 길어 지붕돌(옥개석)이 더 넓어 보이고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장식이 새겨져 있다. 탑의 층수가 즐어드는 비율이 자연스럽고, 5단~3단의 밑받침이 있는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고 네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고 시원해 보인다.

 

꼭대기에 둥근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 기단부와 1층 몸돌의 특징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양식으로 남도 지방의 작은 섬까지 백제계 탑이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어렸을적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골산 5층석탑(보물529호)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해월사(海月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에 속했던 석탑으로, 지금 자리한 곳이 원래의 위치로 짐작된다. 1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단의 맨윗돌에는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아 두껍고 밋밋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양식은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보물 제167호)과 비슷하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좁고 기형적으로 길고 높은 매우 특이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상당히 넓고 두꺼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각 층 지붕돌의 모습에도 차이가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 또한 1·2·4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 5층은 3단으로 정형화된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이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에는 구슬 모양의 장식만 있을 뿐 다른 부재는 없다. 이 탑의 기단부와 1층 몸돌은 매우 길게 조성되어 은선리삼층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한 백제 양식이 국토의 최남단 섬에까지 퍼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각 부분의 양식이 독특하고 불규칙적인 면이 많아 탑 양식에 지방색이 많이 드러나게 되는 고려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공식명칭 :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珍島 金骨山 五層石塔)

주소 : 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356-2 /종목 : 보물 529 /지정일 : 1971.01.08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이 오층석탑의 1층기단을 올라가는 것이 일상화 되다시피한 우리들의 놀이터 였다. 하기는 보물로 지정되기전 까마득한 옜날 이야기가 아닌가.

 

 

진도 읍성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진도읍 성내리 철마산 아래에 있는 읍성으로, 세종 19년(1437) 진도군으로 독립되어 지금의 자리에 성의 둘레 3,400척, 높이 11척의 읍성을 쌓고 3문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 14개, 성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성벽으로 그 위에 쌓은 낮은 담인 치첩이 58개가 있으며, 성안의 연못은 둘레 4,500척, 깊이 5척이고, 성안에 우물 5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성곽형태는 4각형으로 서벽을 동벽보다 짧게 쌓아 올렸다. 성벽은 동북 모퉁이에 있는 군강공원 쪽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데, 높이 2∼3.5m. 길이 50m 정도이다.

 

북쪽의 성벽은 진도중·고등학교와 군청, 진도초등학교 북쪽 부지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데, 군청 뒷쪽에는 높이 1.8∼2m의 성벽이 약 50m 정도 남아있고, 진도중·고등학교 뒷쪽에는 높이 1∼1.2m 정도의 성벽 하단부만 남아있다. 서쪽의 성벽은 학교부지 서쪽에 약 50m가 남아있다.

 

  진도읍성

 

 

진도는 남도에서도 가장 ‘찰진’ 문화를 지닌 곳이다.

들녘에선 밭이랑처럼 굽이굽이 넘어가는 들노래가 어김없이 흘러나오고, 바닷가 어부들은 구성진 소리 한 대목으로 물굽이를 넘는다. 누가 진도아리랑을 선창하면 아무나 서슴없이 노랫말을 받는다. 강강술래 역시 진도가 본고장. 모뜬소리, 못소리, 절노소리, 닻배노래 등 가락도 푸짐하다.

 

어디 소리뿐인가.

남도 문인화의 고향답게 어느 집을 가도 그림 한 점은 기본으로 걸려 있다. 진도는 또한 ‘민속의 보고’로서 가치도 높다. 이런 문화적 풍요로움은 바로 자연과 역사에서 나왔다.

 

진도는 국내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다. 서해안과 남해안이 이어지는 물목. 진도대교에 올라서면 다리 밑으로 하루에 4차례씩 시속 11노트로 흘러내리는 거센 물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블랙홀처럼 휘감고 소용돌이치는 울둘목의 물소리는 울음소리 같다.

1597년 이순신이 군선 12척으로 133척의 왜선을 맞아 싸워 33척을 수장시킨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울둘목과 진도대교

 

지산면 세방리는 크고 작은 섬을 아우르고 있는 진도 앞바다의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진도의 서쪽 끝머리인 세방리는 몇해 전부터 낙조명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세방리 낙조 전망대에 서면 울둘목을 돌아 나온 거센 물살이 다시 진도 남단 팽목으로 휘감아 흐르는 것이 빤히 보인다.

섬 사이로 흐르는 물이 마치 심산의 계곡물처럼 여울지며 흐른다.

 

세방리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이 여기저기 솟아 있다. 양덕도, 주지도, 장도, 소장도, 가사도, 불도, 곡섬, 잠등도, 외공도, 접운도, 가덕도, 마도, 성남도, 소성남도, 상갈도, 하갈도, 과도, 새섬, 북송도, 모자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올망졸망한 섬들이 해무에 지워졌다 불쑥 나타나곤 한다.

이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이리 저리 옮겨다니며 떨어지는 낙조가 신비롭다.

 

얼마전 중앙기상대는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전망대로 세방리를 꼽았다.

 

명량해전도

 

당신 울둘목을  그린 해전도 입니다. 이순신 제독은 위에 횡대로 포진하여 길목을 막고..500여척의  함선을 거느린  왜구는  좁은 수로 때문에.. 종대로 울돌목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선 수군 뒤로는 사후선이라 불리는  작은 척후선이 위치하고 있으며 실제 명량해전에는 참가 하지 않았고.왜구함대를 유인하는데 쓰였습니다.

 

사후선의  보고를 받고.. 울돌목에서 기다리던 이순신 제독은  자신의 통제상선 한척만을 데리고..유유히  왜군에 맞섭니다.

 

가까이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한  왜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이고..  그 와중에도 500여척의 함선을 가진 자신들이 승리 할 것은 자신하며  기세 좋게  이순신 제독의  통제상선에 덤벼들게 됩니다. 남은 12척은 뒤에서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 까지 대기상황..

 

이순신 제독이 승선하신 통제상선은  달려드는  왜구의  함선에 천자 현자 지자  황자 총통을 쏟아 부으며.. 각개 격파에 나서셨습니다. 사거리가 900미터에 이르는  천자총통에.. 멀리서 부터 왜구의 배들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죠.

 

가까이 접근하는 왜선들에게는  조란환이라는 일종의 산탄을 쓰셨습니다. 현자총통에  계란 만한  탄을 넣어 사용 했으며..비격진천뢰를  던져  접근 하는 왜선들을  격파하시기 시작 했습니다.

 

 

 

 

해안도로도 새로 단장했다. 서남해안의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물목인 진도는 늘 군사요충지였다. 세방리를 빠져 다시 남쪽으로 돌아나가다 만나는 임회면 남도리에는 바다를 마주한 남도석성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때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 장군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둘레 610m의 성벽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성내 마을에는 600년 된 비자나무가 서 있다.

 

진도의 동쪽 해안 역시 독특하다. 의신면 모도리 앞 바다는 바로 그 유명한 ‘신비의 바닷길’.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를 잇는 2.8㎞의 바다가 1년에 3~4번 정도 열린다.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심한 4월에는 바닷길의 폭이 40m에 달한다. 해마다 가장 많이 물길이 열리는 시기에 맞춰 영등제가 열린다.

 

영등제의 역사는 500년이나 됐다.

조선 초기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도중 풍랑으로 표류하여 지금의 회동마을에 살게 되었다. 당시 진도에는 호랑이로 인한 호환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해 호랑이를 피해 마을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바다 건너 모도라는 섬으로 피신했다. 급하게 떠나느라 뽕할머니가 마을에 남게 됐다. 뽕할머니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용왕님께 기도를 올렸고, 신기하게 바다가 갈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길을 따라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는 할머니는 기진맥진해서 죽고 말았다. 그해부터 할머니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이 바로 영등제이다.

 

영등제와 신비의바다길로 불리우는 회동-모도간 영등사리에 생긴 바다길

 

영등제는 1975년 랑디 주한 프랑스 대사가 신문에 기고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96년에는 일본 가수 덴도 요시미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를 불러 히트시켰다.

 

 

진도에서는 운림산방을 들러야 한다. 운림산방은 요즘 목련과 홍매가 앞다퉈 피고, 수양버들이 싹을 내기 시작했다. 운림산방 옆에 소치 기념관 건물을 새로 짓느라 조금 어수선한 것이 흠이다. 첨찰산 자락 운림산방은 남도 문인화의 탯자리. 추사와 초의선사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해남 윤씨 집안의 윤두서 화첩을 보고 그림 공부를 했던 소치 허련이 37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추사는 시·서·화에 능했던 소치를 두고 ‘압수(압록강) 이남에는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 그림 솜씨는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아들 미산 허형이 운림산방에서 그림을 그렸고, 손자 남농 허건을 거쳐 증손자 허문이 대를 이었다. 의재 허백련도 운림산방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소치 집안에서 시작한 그림은 지금까지 국전 입상자가 무려 150명을 넘을 정도로 놀라운 화맥을 구축했다.

 

운림산방

 

질펀한 가락과 춤은 진도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진도문화회관에선 매주 토요일 토요민속공연을 연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아리랑, 씻김굿, 만가 등 다양한 민속공연을 볼 수 있다. 국가와 도가 지정한 무형문화재가 각각 4개나 된다. 겨울철을 제외하고 매주 민속공연을 하는 것에서 진도문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기름진 들과 바다 때문에 옥주(沃州)라고 불리며 남도에서 가장 독특한 문화를 뿌리내렸던 진도. 조병화 시인은 진도의 빼어난 자연과 끈끈한 문화를 ‘진도찬가’라는 시 속에 담았다.

 ‘진도는 정이 흐르는 흙이요, 물이요, 산이요/들이요, 개울이요, 집들이요, 마을들이요, 농토들이요/정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싸인 섬이더라"…

 

 

여행길잡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IC를 빠져나와 5㎞쯤 달리면 오른쪽으로 ‘영암·해남’ 표지판이 보인다. 직진하면 영산강 하구언을 넘어 대불공단 방향이다. 하구언을 넘자마자 첫번째 3거리에서 우회전해 영암방조제를 지나면 진도 이정표가 보인다.

국도 18호선을 타고 진도읍을 지나 803번 지방도를 갈아타면 의신면 축제장으로 갈 수 있다. 진도읍 못미처 가계해수욕장길로 빠져도 된다.

 

남도석성은 진도읍에서 국도 18호선을 타고 최남단인 팽목항 가는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운림산방은 읍내에서 가깝다. 영등제 기간중 개매기(고기잡기) 체험과 조개줍기 체험 행사가 열린다. 진도읍 청용리 해안가에서 열리는 개매기 체험은 바닷가에 그물을 박아두고 숭어 등 썰물 때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행사. 진도대교에서 약 1㎞ 들어간 뒤 우회전하여 11㎞쯤 가면 우측으로 청용포구가 있다.

 

임회면 죽림리에서 조개잡이 행사가 열린다. 넓은 간석지에서 바지락, 맛, 해방고동, 울조개, 떡조개, 귀머거리, 동죽, 비틀이 등을 잡을 수 있다. 참가비 어른 3,000원, 노인·어린이 1,000원. 자루망, 호미, 장갑을 제공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 진도 향토문화회관에서 토요민속공연을 연다. 군립민속예술단 주관으로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진도북춤, 사물놀이, 남도민요를 부른다. 진도군청 관광과(061)540-3219

 

 

 

국립국악원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國立國樂院]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2g2450b

 

지도/ http://local.daum.net/map/index.jsp?map_type=TYPE_SKYVIEW&map_hybrid=true&q=%EC%A7%84%EB%8F%84%20&urlX=443603&urlY=273009&urlLevel=12

 

진도 흑미

 

 

진도 세방낙조

 

본문출처: ‘세방 낙조’에 남도 가락이 절로 ,민속의 보고이자 남종화의 본산지인 예향

http://www.ksgoodnews.kr/sub_read.html?uid=39701

 

진도에 봄이 왔다.

향동재 넘어가는 굽이굽이 고갯길에는 아지랑이가 어지럽고 복사뼈를 덮을 만큼 자란 보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르게 물결친다. 진초록 대파밭과 나란히 놓인 노란 무장다리밭은 한폭의 추상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운림산방 연못가 수양버들에는 연둣빛 새싹이 돋았다.

 

 해남 땅에서 겨우 2백93미터 떨어져 있는 진도. 진도대교로 뭍과 연결되어 있지만, 뭍과는 자연도 풍습도 사뭇 다르다. 바닷물이 갈라지는 신비의 땅, 순종 진돗개가 집집이 짖어대는 곳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없이 깊고 깊은 섬이다.

독특한 풍속이 남아있는 민속의 보고이자 남종화의 본산지인 예향, 섬 전체가 숱한 전란의 역사를 간직한 사적지이기도 하다.

 

진도 여행의 첫걸음은 운림산방이다.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1808~1892)이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이다. 소치는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수업을 받아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다.

추사는 소치를 두고 “압록강 이남에는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

 

운림산방, 소치 허련의 흔적을 찾아서

시서화로 당대를 휘어잡은 소치였지만, 1856년 스승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고독을 마주보고 살았다.소치의 화맥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아들 미산 허형과 손자 남농 허건, 증손자 임전 허문까지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이런 까닭인지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루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운림산방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커다란 수양버들 두 그루가 맞이한다. 그리고 저만치 연못 건너로 보이는 아담한 한옥. 백일홍과 맥문동으로 둘러싸여 그윽한 정취를 풍긴다. 운림산방 앞 연못 운림지에는 수련이 활짝 피었다. 팽나무, 검팽나무, 생달동백 등이 연못가에 심어져 있다. 모두 소치가 먼 곳에서 구해 와 기른 것이다.

 

운림산방

 

 운림지 한가운데에는 조그마한 섬이 있고 백일홍이 한그루 심어져 있는데 소치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하니 줄잡아 1백50년은 된 듯하다. 늦여름이면 빨간 꽃을 피워 운림산방을 장식한다. 운림산방을 이리저리 거닐다 보면 이런 풍경 속에서 보낸 소치의 말년이 더없이 행복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운림산방 옆에 쌍계사가 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쌍계사는 단출한 절이다. 요사채라고 해 봐야 원통보전, 대웅전 범종각이 전부다. 휘휘 둘러보는 데 20분이 걸리지 않는다.대웅전 앞에 서서 대숲을 넘어와 절 마당으로 내려앉는 바람 소리, 바람이 흔들고 가는 풍경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날 선 마음이 어느새 누그러지는 것 같다.

 

역사상 세상 모든 풍요로운 땅이 그러했듯 진도 역시 차지하려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 909년 고려의 국조 왕건이 견훤과 마지막 싸움을 벌였고, 1271년 고려 말에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하기도 했다. 1894년 동학의 마지막 전쟁이 끝난 곳도 진도다.

 

 

용장산성과 성내의 우물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 장군이 최후를 마친 남도석성. 성 내에 20여 가구가 있다.

진도에는 대몽항쟁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다. 임회면 남도리에 있는 남도석성과 용장산성, 등이 그것이다. 고려 조정이 몽고에 항복하자 배중손을 지도자로 한 삼별초는 왕족 승화 후 온을 새 왕으로 받들고 1천여 척의 배에 재물과 사람들을 싣고 남쪽으로 떠난다.

 

강화도를 떠난 지 두 달 보름의 긴 항해 끝에 진도 벽파진에 다다른 이들은 용장성에 터를 잡은 후 용장산성을 짓는다. 그리고 ‘오랑’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전주와 동래 등 경상, 전라도로 진격해 몽고군과 전투를 벌인다.

 

아픈 역사의 흔적이 또렷한 땅

삼별초 진도정부는 친몽고적인 왕실에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삼별초가 용장산성에 든 지 아홉 달째. 몽고군과 고려 정부군이 합동 공격을 해오고 결국 10여 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임금 온과 배중손은 죽음을 당한다.

 

남도석성은 배중손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최후를 마친 곳이다.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남도석성은 둘레 6백10미터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성벽의 높이는 5~6미터다.남도석성은 성내에는 20여 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남도 석성에서 만난 한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일본 강점기 때만 해도 1백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대처로 나가고 없단다.

 

굴포리의 배종손장군의 사당 - 대몽고와의 항쟁을 했던 장군의 사당입구에 몇백년 묵은 해송한 그루가 사당을 지키고 있다.

 

석성을 둘러싼 개울에 놓여 있는 2기의 예쁜 다리도 놓치지 말고 볼 것. 동쪽에 있는 것이 단홍교, 서쪽에 있는 것이 쌍홍교다. 우리의 옛 ‘무지개 다리’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용장산성은 군내면 용장리에 있다. 몽고에 항복한 고려조정을 ‘괴뢰정부’로 취급한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삼별초는 당시 둘레 13킬로미터, 높이 5척의 대형 산성을 축조했으나 지금은 산성의 일부와 왕궁터에 남은 주춧돌만이 남아 쓸쓸히 여행객을 맞고 있다. 운림산방 가까이에 있는 왕온의 묘 역시 석상 2기만이 쓸쓸히 무덤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의신면 모도리는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의 약 2.8킬로미터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1년에 3~4차례 갈라진다. 진도 사람들은 이것을 ‘영등살’이라고 부른다.물길이 완전히 갈라지는 때는 봄(4, 5월)과 가을(10, 11월)에 각 3일 정도씩. 가을에는 새벽에 갈라지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 어렵고 봄에 열리는 물길이 가장 좋다.

 

영등재와 신비의바다길

 

진도 여행의 클라이맥스는 세방 낙조다. 지산면 세방리는 중앙 기상대가 꼽은 한반도 제일의 낙조 명소다.

 

한반도에서 가장 늦은 해넘이를 볼 수 있는 데다 떠나기 못내 아쉬운 석양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다. 도로변에 낙조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마음으로 느껴야 알게 되는 그윽한 섬저녁 7시 무렵이면 먼바다부터 슬금슬금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일순간 캄캄해지며 순식간에 붉게 물든다.

 

양덕도, 주지도, 장도, 소장도 등 세방리 앞바다에 솟은 크고 작은 섬을 온통 삼킬 듯 붉게 물들며 덮쳐 오는 노을. 뚝 하고 떨어지는 햇덩이를 보면 일순간 눈과 가슴이 먹먹해진다.

 

 

 

 

환상적인 세방낙조

 

노란 유채꽃과 푸른 파밭이 어우러진 진도의 봄 들녘. 한폭의 그림 같다

진도는 차를 타고 휙 둘러보고 나오는 섬이 아니다. 깊숙이 몸을 들이밀고 마음으로 느껴야 비로소 진도를 알게 된다. 길을 가다 만나는 농부, 농부가 흥얼대는 자진모리 소리 한 자락, 그 소리에 장단을 맞춰 흔들리는 보리밭, 산 아래 무심히 서 있는 석탑, 마을 앞 그늘 짙은 비자나무 등 진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소하지만 그윽한 풍경들. 그 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진도홍주

 

 

울돌목의 숭어건저올리기

 

 

      

                       돌아온 백구상괴 진도견

 

 

진도아리랑,국악,안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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