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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여신상

호남인1 2012. 3. 23. 13:23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여신상(영어: Statue of Liberty)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세계를 밝히는 자유(영어: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프랑스어: La liberté éclairant le monde)'는, 프랑스19세기 말에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미국 뉴욕 주 뉴욕리버티 섬에 있다.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공식 이름은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세계를 밝히는 자유').

미국 뉴욕 항 어퍼 만 리버티 섬에 있는 거대한 조상.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 간의 친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받침대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92m이고 높이 치켜든 오른손에 횃불을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는 자유의 선언을 상징하는 서판을 들고 있다.

 

발코니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거기에서부터 전망대인 머리부분까지는 나선형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받침대 입구에 있는 현판에는 받침대를 지을 기금을 모으기 위해 에머 래저러스가 지은 '새로운 거상'(1883)이라는 소네트가 새겨져 있다.

 

"정복자의 사지(四肢)를 대지에서 대지로 펼치는/저 그리스의 청동 거인과는 같지 않지만/여기 우리의 바닷물에 씻긴 일몰의 대문 앞에/횃불을 든 강대한 여인이 서 있으니/그 불꽃은 투옥된 번갯불, 그 이름은 추방자의 어머니/횃불 든 그 손은 전 세계로 환영의 빛을 보내며/부드러운 두 눈은 쌍둥이 도시에 의해 태어난, 공중에 다리를 걸친 항구를 향해 명령한다/오랜 대지여, 너의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그리고 조용한 입술로 울부짖는다/너의 지치고 가난한/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받침대 부분에는 미국 이민박물관(1972)이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남북전쟁 후에 자유의 여신상 건립을 제의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기금을 모았으며 1875년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의 지휘 아래 프랑스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본체는 동판을 두들겨서 모양을 내고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 르 뒤크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고안한 4개의 대형 철제 구조 위에 조립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46.1m, 무게가 225t이나 되는 완성작은 1885년 분해해서 배에 실어 뉴욕으로 가져왔다.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모리스 헌트가 고안하고 베들로 섬에 있는 우드 성벽 내부에 건립되었던 받침대는 나중에 완성되었다.

 

받침대에 올려진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10월 28일 클리블런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제막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1986년 7월에 개최된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미국과 프랑스 양국이 자유의 여신상을 수리 복구했다.

 

처음에는 조명장치가 되어 있는 횃불이 항해에서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등대국에서 관리했지만, 우드 성이 육군 작전기지였기 때문에 1901년부터는 여신상의 관리를 육군부에서 맡았다.

 

1924년 국립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37년 우드 성이 해체되면서 섬의 나머지 부분도 기념물에 포함되었다.

 

1956년 베들로 섬은 리버티 섬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5년에는 한때 미국의 주요 이민단 정착항이었던 인근의 엘리스 섬도 이에 포함되어 사적지 전체면적이 약 0.24㎢에 이르게 되었다. 출처: 브리태니커

 

 

 

 

뉴욕의 상징이라기보다 자유의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1세기여 동안 아메리칸 드림의 선봉장 역할을 해 왔다.

 

머리에 씌어진 관의 7개 첨단은 세계 7개의 바다, 7개의 주에 자유가 널리 퍼져 나간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서 기증했으며,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해 92m, 검지의 길이만도 2.4m나 된다.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 내부를 보려면 배터리 파크에서 페리를 타고 리버티 섬으로 간다.

 

왕관 부분까지 일반에게 공개되는데, 보통 1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리버티 파크에서 로어 맨해튼 스카이라인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토대 부분의 2∼3층은 박물관이다.

 

☎ (212) 363 3200오픈 : 09:00~17:00(여름에 연장), 크리스마스 휴무

 

페리

요금 : 어른 $10, 62세 이상 $8, 4~12세 $4, 4세 이하

무료교통 : 배터리 파크에서 페리를 이용

http://www.nps.gov/stli

 

 

 

 

 

 

리버티 섬으로 가는 페리

 

배터리 파크의 부두에서 페리를 이용, 리버티 섬의 자유의 여신상과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까지 가 볼 수 있다.

한여름에는 운항 시간이 좀더 길어지지만, 보통 첫 배는 09:00 경에 출발하며 15~30분 간격으로 17:00까지 떠난다.

 

유명한 관광 명소라는 점을 고려하여 붐비는 시간을 피해 일찍 도착하여 표를 사는 것이 관광하기에 좋다.

 

티켓은 $10이며 15:30까지 배터리 파크의 클린턴 캐슬(Clinton Castle)에서 선착순으로 판매한다.

 

Statue of Liberty Ferry

☎ (212)269 5755

http://www.statueoflibertyferry.com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긒/ 뤼팽(lupi)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은 뉴욕의 리버티섬(Liberty Island) 외에도 프랑스의 센느강(Seine R.)과 파리의 '룩상부르그 정원(Jardins du Luxembourg)'에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프랑스에 있는 2개의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Statue de la Liberté 

 

혹자들은 '자유의 여신'이 흑인이라는 소문도 돌고, 여신상의 발치에 노예제도를 상징하는 쇠사슬이 있기 때문에 노예 혁명을 뜻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노예에서 해방된 의미의 끊어진 쇠사슬은 모든 종류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뜻하는 것이지 유독 흑인들을 위한 상징은 아니다.

 

역사상 흑인들만이 노예로 팔려간 것도 아니니까.

 

만약, 소문대로 '자유의 여신상'이 흑인 여성을 모델로 만들었다면, 미국이 이것을 선물로 받았을까?

 

전 세계에 많은 동생들을 거느린 '자유의 여신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집트 여인상에서 자유의 여신으로...

 

이집트의 거대한 기념물들에 강한 인상을 받은 '바르똘디(Bartholdi)'는 거대한 '파라오(Pharaons)'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였으며, '수에즈 운하(Canal de Suez)'의 입구에 세워질 것을 꿈꾸면서, '자유의 여신'이라기 보다는 '등대' 역할을 하는 이집트 여인의 모습인 여인상을 만든다.

흑인이 아닌 이집트 여인.

 

 

 

이 계획은 자본금 문제로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 많이 진척된 이 여인상의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얼굴에 있던 베일을 없애고, 끊어진 쇠사슬과 왼손에 독립선언서가 추가되면서, '수에즈 운하'의 등대 '이집트 여인(Egyptienn)'이 유럽인의 모습으로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de la Liberté Eclairant le monde)'으로 둔갑하여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

 

1867-1868년 '수에즈 운하' 설계가 진행되면서, 운하 입구에 이집트 여인 모습의 등대를 세우려던 계획은 취소가 되었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무엇인가를 선물해야만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1870년 초기의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de la Liberté Eclairant le monde)'을 만들어서 미국으로 떠난다.

 

뉴욕 항에 도착하면서 본 '베들로 섬(l'île de Bedloe)'을 자신의 작품이 설 자리로 점을 찍은 '바르똘디'는 체류 동안 중요 인물들을 만나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설득한 결과, 1875년 '프랑스와 미국 연합 위원회(Comité de l'Union Franco-Américaine)'가 결성되면서 재정 지원을 받아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건설 과정과 기술

 

원작을 바탕으로 1875년부터 파리의 17구의 '샤젤 거리(rue de Chazelles)'에 위치한 '몽뒤(Monduit)', '가제(Gaget)', '고띠에(Gauthier)'의 작업실에서 만들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며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3세' 제정 시대에 수많은 작품을 남긴 '비올레 르 뒥(Eugène Viollet-Le-Duc, 1814-1879)'이 여신상의 구조 설계를 맡아서 작업을 시작한다.

 

히프가 삐죽 튀어나온 초기 안으로 작업을 실행하면서, 구조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튀어나온 히프를 집어넣고 자세를 똑바로 세우면서 치마 주름을 더 부풀리고, 히프를 흔드는 이집트 여인의 모습보다 좀 더 완고한 이미지의 여신상으로 수정된 것이다.  

 

                       

 

위원회에 제출된 높이 1.25미터짜리 원형을 2.11미터로 확대하여 만들고, 다시 8.5미터의 높이로 만들어서 이 모델을 정확히 측정하여 한 번 더 확대한 것이 현재의 여신상인 것이다. (현재, 횃불까지의 높이 약 46m, 대좌 높이 약 47.5m, 무게 225t)

 

최대 1.4미터의 동판들은 나사로 임시 고정을 시켰다가 미국에 도착하여 조립하면서, 비스듬히 자른 각 동판들을 정확히 25센티미터 겹치게 포개 놓고, 두께 5밀리미터 짜리의 리벳으로 고정을 시켰는데, 얼마나 정교하였던지 이음새 부분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니 이럴 수가!!

 

당시 재력가 '삐에흐 으젠느 스크레탕(Pierre Eugène Secrétan)'이 여신상의 외부를 둘러싸도록 2.37밀리미터짜리 동판 300장을 기부하고, 정부로부터 최고의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흐(Légion d’honneur)'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에펠탑이 완공되던 1889년 동 값이 폭락하면서 패가망신하였다고 한다.

 

또한, 1876년 임시적인 조립이 진행되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에,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 맞추어 겨우 횃불을 든 팔만을 '필라델피아(Philadelphie)'에 보낼 수 있었는데 분위기는 썰렁하였다고 한다.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역할

 

공사는 지연되고, 더군다나 핵심 구조를 설계한 건축가 '비올레-르-뒥'이 내부 구조를 완성하지 못하고 1879년 사망하면서, 기차를 위한 철교 건설로 유명하던 토목 공학자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이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에펠탑은 10년 후(1889년)의 이야기이다.'에펠'은 먼저 취약하던 구조를 보강하고, 그 위에 5 * 0.8 센티미터의 철 막대로 촘촘히 격자망을 만든 골조 위에 동판을 붙이는 작업을 하다가 기후 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 그리고 절연 문제에 봉착한다.

 

수축과 팽창에 대한 문제는 유연한 구조와 옷의 주름으로 해결을 하였고, 동판과 쇠 격자가 우수에 의하여 연결될 경우에 발생되는 전기에 대한 절연 문제는 동판과 쇠 격자 사이에 방수용 도료를 바른 동판을 삽입하여 해결하였다.

 

 

 

 

 

설마 미국이 가져갈지는 몰랐다고요?

 

1884년 1월에 여신상의 조립이 끝났는데, 미국으로 보내기 위하여 해체할 때까지 파리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지붕 위로 불쑥 튀어나온 여신상을 상상하면 이해가 될 듯.완공식을 치르고, 각 부분에 번호를 매기면서 완전 해체하여 총 214개의 상자를 기차 70칸에 싣고는 프랑스의 3대 항구 도시인 '루앙(Rouen)'으로 보내어, '이제흐(Isère)'라는 배에 싣고 창작가인 '바르똘디'와 함께 5월 21일 미국으로 출발한다.

 

6월에 미국에 도착하지만, 아직 받침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4개월 동안의 조립으로 완성된 여신상은 'Fort Wood'라는 창고의 안 마당에 서 있었다고 한다. 

 

 

 

센느 강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

 

센느 강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며 에펠탑 쪽에서 유턴할 때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인 회(Communauté Américaine)'에서 프랑스에 기증한 것인데, 뉴욕의 큰 언니(?)를 1/4로 축소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아래의 사진 참조)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인 1889년 11월 15일 현재의 위치 '백조의 섬(l'île aux Cygnes)'에 세워지는데, 대통령이 집무하는 '엘리제 궁전(Palais de l'Elysée)'에 등을 돌릴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과는 달리 에펠탑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워졌다가, 1967년 다리 보수공사를 마치면서, 뉴욕의 언니를 마주 바라보도록 현재의 자세로 방향을 180도 바꾸었다.

 

 

 

룩상부르그 정원의 여신상

 

 

소르본 대학'이 가까이에 위치하고, 상원 의회가 있는 '룩상부르그 정원(Jardins du Luxembourg)'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창작가 '바르똘디(Frédéric Auguste Bartholdi)'가 1900년 만국 박람회를 맞아 파리에 기증한 것이다.

 

'띠에보 형제(Thiébaut Frères)'라는 공장에서 높이 2.743미터의 청동으로 주물 제작된 이 청동상은 언니들과는 등을 돌리고 있는 자세로 서 있다.

 

 

 

 

 

 

 

 

 

 

 

기념주화

 

 

 

 

 

 

 

9.11태러와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여신상 준공 축하장면을 묘사한 그림

 

 

 

 

 

 

자유의 여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