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이야기와. 詩

목포의 눈물과 이난영이야기

호남인1 2012. 1. 4. 16:21

 

 

 

 

목포의 눈물과 이난영이야기 

 

 

 

이난영 목포의눈물 / 文一石 作詞 / 孫牧人 作曲 

 

 

 

木浦의 눈물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1935년 이난영이 처음 부른 뒤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는 한국트로트곡이다,

 

작사자는 문일석, 작곡자는 손목인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입혀 대히트를 기록했다.

 

가수는 목포 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나이 십대 후반이었던 이난영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스며 있다는 평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목포의 애국가'로까지 불리기도 하고, 목포 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또한 호남 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 노래에는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 목포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 중 노적봉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유달산 입구에 노랫말을 적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 목포 유달산을 오르다 보면 구성지게 흘러 나오는 이난영의 노래에 젖게 된다. - 목포의눈물 노래비-

 

 

 

 

이난영(李蘭影)

 

이난영(李蘭影, 1916년 6월 6일 ~ 1965년 4월 11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트로트 가수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졌다. 일본식 이름은 오카 란코(岡蘭子)이다. 전라남도 출신.

 

생애 초기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이나 호적에는 이옥순(李玉順)으로 기록되어 있다.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15세에 여배우를 지망하여 태양극단에 입단했고, 이 때 박승희가 그에게 이난영이란 예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무대에 주연으로 서지는 못하였다.

 

그뒤 일본에 건너가서 태평 레코드에서 '도라지 타령'을 발표했으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오케 레코드사에 입사하여 음반을 냈으나 빛을 보지 못하였다.

 

1932년에 목포에서 극단 태양극장에 입단하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난영이라는 예명도 이 무렵 얻었다. 1933년에는 태평레코드에서〈시드는 청춘〉을, 오케레코드에서는 〈향수〉를 발표하여 정식으로 데뷔했다. 1943년까지 그는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오케의 간판 스타 역할을 했다.

 

1935년에 일제 강점기 최고의 인기곡이자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이며,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하였고, 1937년에 가수 겸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이난영은 천재적 음악인이었던 김해송과의 결혼 이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도 김해송의 지도를 받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목포의눈물 레코드 쟈켓

 

 

해방 이후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로는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고,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가 제작되었다. 목포를 상징하는 가수로서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기도 하다.

 

 

 

음반 목록

•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이난영 1 (2002)

•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이난영 2 (2002)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이난영 [李蘭影]

 

대중가요 가수.

본명은 옥례(玉禮).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주인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추천하여 순회공연 중이던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서게 되었다.

 

그후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극단을 따라 나섰다가 1932년 목포에서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이 무렵 얻게 되었다.

 

 

 

극단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郎)이 이난영의 재질을 발견하여 오케 레코드 사장 이철(李哲)에게 추천하여, 오케 레코드 전속가수로 〈향수 鄕愁〉·〈종로 鐘路〉를 취입하며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33년 11월 〈불사조〉·〈고적 孤寂〉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934년 2월에 발표한 〈봄맞이〉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하였다.

그해 가사 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으로,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한 데 이어, 대중가요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던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이난영(사진 위)과 남인수의 노래들이 반세기를 뛰어넘어 영화‘박쥐’에 등장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으며, 한국에서의 공연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이 마지막이었다.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 1986년 목포시민의 상이 수여되었다.

 

 

李蘭影 年譜이난영(李蘭影) : 본명은 옥례(玉禮)1916년 6월 6일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서 출생1923년 북교초등학교(현) 입학, 1929년 가정사정으로 중퇴

 

1932년 삼천가극단(三川歌劇團)의 제주도 공연 때 막간에 노래를 불러 소질을 인정받고 순회공연에 합류.일본 공연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郞)에게 발탁되어 손목인(孫牧人) 작곡 <불사조>를 OK레코드에 취입.

 

1934년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의 <목포의 눈물>을 불어 공전의 히트로 인기를 모음. 이어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의 대표곡을 발표하여 대중가요 가수로 명성을 얻음.

 

광복 후 무대 가수로 활동하였고, 남편 김해송(金海松)이 납북된 뒤 KPK악단을 운영. 1962년 미국에서 활동 중인 딸 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도미하였다가 1년 후 귀국.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타계.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1986년 사후 21년에 목포 시민의 상 수상2003년 목포시 양동 생가 터에 소공원 조성.

 

유달산 입구의 노래비

 

 

이봉룡(李鳳龍)

이봉룡(李鳳龍, 1914년 ~ 1987년 1월 9일)는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어릴 때 이름은 이봉용(李鳳用)이다.

 

생애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오빠였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외지에 나간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내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난영은 인기 가수가 되어 악극단에서 만난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였던 김해송은 처남이 된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이봉룡은 1930년대 후반에 데뷔하여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가 크게 히트하는 등 인기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이봉룡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인 남인수의 〈낙화유수〉와 〈남아일생〉 등 널리 불리는 노래를 계속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한 일이 있다.

 

신민요의 여왕으로 불리던 기생 출신 가수 이화자의 〈마지막 필적〉(1942)과 같은 해 발표된 장세정의 〈아가씨 위문〉 등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난영, 이봉룡 남매

 

 

김해송과 이난영의 음악과 노래도 이 시대에 일반 서민대중들이 처한 시대적인 배경을 알면 더 이해가 깊고 공감이 갈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바로 시대의 아픔이었고 서민의 울분이었으며 하소연이자 화풀이였다. 요즘 말로 한다면 스트레스 해소용이란 뜻이다.

 

비록 노랫말은 ‘님’이고 ‘이별’이지만 서민적 정서가 담뿍 배여 있는 공출, 징병, 징용에 대한 항거였다. 대중가요에 대한 금지는 그만큼 살벌한 정책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노래의 흐름 속엔  그 무렵 사회의  시대상과 생활상.표정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엔 바로 항일(抗日)하기엔 힘이 없고 눌러있자니 억울한 그런 시절엔 피안(避岸)의 대상으로 ‘바다와 항구’를 설정하여 멀리 나가는 뜻의 노래가 많았다.

 

즉 ‘항구’, ‘떠난다’는 노랫말들이 다 그런 뜻이다. 아마 항구를 떠나 바다로 나가면 뭔가 다른 유토피아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그리움과 기대감 때문에 그랬다.‘김해송 작곡과 장세정 노래의 ‘연락선은 떠난다’가 그랬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의 ‘항구의 청춘시’,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의 ‘해조곡’ 등이 그렇다.

 

 

 

그러면 그때 시대상황을 좀더 조명해본다.

 

호남평야의 곡창을 뒤에 업고 서해와 남해의 각종 생선들이 포구로 모여들던 목포는 일제가 강점하기 이전에는 인심 후하고 인정 뜨거웠던 항도였다.

 

유달산이 북풍을 막고 고하도와 화원반도가 풍량을 막고 있는 淸湖[목포 앞 바다)는 그 옛날 여인들이 밥을 짓다가 찬거리가 없으면 국수조리나 바구니를 들고 나가 고기를 퍼내어 생선국을 끓였다는 황금 어장이었다.

 

더욱이 시와 노래로 전해오는 삼학도는 마치 세 마리의 학이 바다에 앉은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삼학도란 이름이 붙은 곳이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이면 시객들이 유달산에 올라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유혹하는 은파연월(銀波煙月)을 바라보며 저마다 시상을 고르기도 하였고, 달빛과 정답게 속삭이며 즐거운 한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호남평야를 굽이굽이 누비며 청호로 흘러드는 영산강 물결 위에 꽃구름이 비끼던  봄날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수면에 어리던 가을의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서해 남단의 절경을 안고 있는 이 명승(名勝)의 항도는 일제침략자들이 강점하면서 눈물의 대명사로 변한다

 

육로로 이어지기전 삼학도 (1928년) 와          노적봉의 모습

 

김해송과 이난영의 음악과 노래도 이 시대에 일반 서민대중들이 처한 시대적인 배경을 알면 더 이해가 깊고 공감이 갈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바로 시대의 아픔이었고 서민의 울분이었으며 하소연이자 화풀이였다. 요즘 말로 한다면 스트레스 해소용이란 뜻이다.

 

비록 노랫말은 ‘님’이고 ‘이별’이지만 서민적 정서가 담뿍 배여 있는 공출, 징병, 징용에 대한 항거였다. 대중가요에 대한 금지는 그만큼 살벌한 정책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젊은 시절과 6,25이후 폭격맞은 서울 필동 집앞에서 이난영

 

1934년 조선일보사는, 日帝의 갖은 탄압속에서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OK 레코드와 손잡고 향토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本名 윤재희 1916년생)의 작품 "목포의 노래" 가 3천여편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된다.

 

윤재희는 일본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목포를 주제로 하는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기에 24세때 습작으로 지어 응모하였는바, 당시 집안에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재희씨는 아깝게도 단명하여  28세때 작고하였다.

 

 

애절한 이별의 한을 담은 이 "목포의 노래"를 OK 레코드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 로 제목을 바꾸어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 목포 출신의 어린 가수인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부르게 된다.이난영은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이난영생가

 

이난영은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李蘭影의 본명은  이玉禮(옥례),  당시만 해도 냇가 언덕 위의 바윗등으로  불리는 빈민촌이었다. 내 60년도 기억으론 아마 목포여고밑 산정동으로 들어오는 도로 때문에 깎은 언덕 같다.

 

그녀는 어머니가 식모살이하는 일본인 집에서 '애기업기'를 했는데 그집에 유성기가 있는걸 보고 신기해 했다. 매일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재질을 알아본 주인은 순회극단의 공연무대에 막간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1932년 16세 되던 해 였다. 태양 가극단 단장이 난영을 무대가수로 키우겠다며, 즉석에서 특별단원으로 채용한다. 그리고,이옥례라는 본명 대신 蘭影이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1932년 유랑극단 "태양극단"이  목포 공연을 하고 있을때 무대뒤  분장실로 단발머리 한소녀가 조용히게 들어 왔다.다음 출연을 위해 분장을 가다듬는 가수들로 북적대는  분장실에 들어온 이 촌스런 시골소녀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용기를 내어 단장에게 다가 갔다

 

" 저 가수가 되고 싶어 찾아 왔는데요"

 

단장은 앳되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심히 말한다.지방공연 때마다 가수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소녀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나 가수가 되는게 아냐. 그리고 넌 아직 나이도 너무 어려 보이구 말야"

"아니어요 전 괜히 허영심에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예요. 전가수가 되는 것이 평생꿈이에요 노래는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도 있고요"

"그래 ? 그럼 노래나 한번 불러보지"

 

단장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소녀를 쫓아 보낼 요량으로 한곡 불러보도록 했다.

 

소녀는 잠시눈을 감고 감정을 잡더니 노래를 시작 한다.

소녀의 노래가 시작되고 시끄럽게 북적이던 분장실이 잠잠해졌다.뛰어난 가창력. 가슴을 파고 드는 애절한 목소리가 제법이었다.

 

"그래 넌 노래해도 되겠다"

 

 

반년후.재일 한국인 (在日朝鮮人) 위문공연차 일본원정을 떠나는 태양 가극단에 섞여 일본의 오오사카에 도착했고,레코드 기획을 위해 그곳에 와 있었던  당시 흥행계의 거물 OK 레코드 사장 李哲의 눈에 띄게된다.

그는 그녀를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에 맞는 곡을 준비하도록 부탁한다. .먼저 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의 '불사조'를 불렀다.

 

그녀를 떠올리면 남편 김해송(본명 김송규) 이라는 작곡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가수이자 작곡자였고, 지금의 뮤지컬의 개념을 처음 시도한 인물이다. 못다루는 악기가 없고 당시에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다. 오케 레코드 이철 사장과 친분으로 이난영을 알게 되었고, 약 2년 정도 열애 끝에 1937년에 결혼을 했다(사실은 지방 공연 차 이난영을 겁탈해 임신 시켜서  할수 없이 결혼 했지만).

 

 

 

39년에는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을 이난영이 불러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 곡이 국내 최초 블루스 곡이라고 한다.

 

이난영은 1940년대부터는 단순히 노래하는 싱어로서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로서의 재능를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는 뮤지컬을 중요시했던 남편 김해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본인도 작곡자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37년 속편격인 ‘해조곡’(이부풍 작사, 손목인 작곡)을 거쳐, 목포노래의 완결판이자 42년 또 한차례 대대적 목포 열풍을 일으킨 ‘목포는 항구다’를 통해 다시 한번 관련지역 이름을 부흥시킨다.

 

친오빠인 이봉룡이 쓴 이 곡은 시리즈 전편인 ‘목포의 눈물’에 나왔던 지명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아아! 추억의 고향!

 

6.25때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이 친일 행적과 미8군 위문 등의 죄목으로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행방불명이 됐을때 한동안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김해송과 연예인들은 왜 끌려갔을까.

 

당시 공산당의 입장으로 보면 연예인들은 브르조아의 상징이나 부패한 군상으로 여겨져 숙청대상의 우선 순위였다. 동란 직전까지 김해송과 이난영은 필동의 대한극장 앞에 방이 13개나 되는 저택에 살만큼 윤택했고 김해송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보컬그룹을 만들 꿈을 그때부터 꾸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피난을 갈 수 있었음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평안남도 개천군이 고향이고 또 학창시절 일본에 저항한 경력도 있기에 ‘설마’ 했을 것이다. 이난영도 잡혀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아이들 핑계로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이난영은 매년 무대에 서면서 12남매를 낳을 만큼 금슬이 좋았지만 동란은 이 가정을 풍비박산시키고 말았다.

김해송은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이 같이 끌려가던 사람이 그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들고와 밝혀졌다. 그제서야 이난영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당시 납북된 연예인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는데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돼 끌려가다 비행기 폭격을 당하는 순간 죽은 시늉을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1958년 국도극장 공연 기념 앞줄 왼편부터 김지미, 이난영

 

이난영과 김해송 사이에는 7명의 자식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김씨스터즈와 김부라더스라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원래 두 부부 사이엔 9남매가 있었으나 둘은죽고 7남매만 남아 있었다. 이들 7남매 모두는 김해송에게 어렸을 적부터 악기와 노래 연습을 재롱 수준이 아닌 혹독할 정도로 피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노래로는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숱한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아갔던 이난영은 65년 봄 그녀가 한많은 세상을 떠난 날만은 보상을 받은듯하다.

 

5.16이후 박정희정권이 들어선 당시 상황은 집회가 금지돼 있어 연예협회가 가수장으로 치르길 원하는 연예인들의 생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것을 보다못한 손목인 선생등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우리의 가수 이난영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데 왜 집회를 허가해주지 않느냐'며 사방을 쫓아다녔다.

 

결국 이난영의 장례식은 특별케이스로 허가됐다.

 

이난영의 집이었던 회현동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까지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날은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됐고 시내에는 그녀를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찼다.

 

무리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걸었고 모여든 시민들도 하나둘 따라하더니 온통 <목포의 눈물>을 흐느끼듯 불러댔다. 이난영의 일생은 「목포의 눈물」이 히트곡이 되어서인지 자신의 인생에 눈물이 너무 많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목포의 눈물>이 이토록 구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고향 목포, 본명 이옥례(李玉禮)로  일찍부터 '천재소녀가수'로 불렸던 그녀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그렇게 갔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소리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서 울려퍼지고 있다.

목포(木浦)의 눈물 / 이난영(李蘭影)  관련 자료 참조 /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 이동순의 가요이야기.등

 

 

 

 

 

울분과 저항이 담긴 <목포의 눈물> - 이난영

 

엘레지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울분과 저항이 감추어진 노래로서 당싱 22세인 손목인의작곡으로 19세의 이난영이 노래하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목포의 눈물 1절>

 

호남 곡창에서 나온 기름진 쌀과 풍요로운 목화는 목포항구에서 일본으로 실려가고 부모 남편 형제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 항구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만 하였다. 일제시대의 항구는 눈물의 장소이며 눈물은 곧 항구였다.

 

 

삼백년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닲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목포의 눈물2절>

 

한때는 일본경찰이 작가를 연행하여서 가사 내용이 불온한 냄새가 있다며 추궁하기도 하였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갔을 때 2절의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검열 담당자는 노랫말에 나오는 원한이 필시 日本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며 원컨대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안하게 분다는 뜻이라고 둘러댔다.

 

이 때문에 윤재희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함흥의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 결국 이질에 걸려 스물 여덟 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밑에'의 가사는  3백년전 정유재란때 명량대첩과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이 그때에는 꼼짝도 못했던 곳이었다는  점을 담은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리하여 레코드사에서는 황급히 歌詞紙(가사지)를 다시 인쇄하여 들고 갔다. 거기에는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바뀐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삼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게된 저간의 사정 속에서 삼백년 원한을 삼백년 원안풍으로 말꼬리를 돌리고, 님자취는 이순신장군의 넋과 정신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으며 유달산 바람은 민족의 정기를 가르키는 것이 작사가의 숨은 의도임을 이 노래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목포의 눈물' 가사지

 

 

노적봉은 유달산 입구에 있는 해발 60m 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의 전략으로 봉우리에 짚가리를 덮어서 왜군이 보기에는 산더미같은 군량미로 오인하여 후퇴하게 된 사정이 있다. 영산강에는 횟가루를 방류하여 마치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수많은 군사들이 주둔한 줄 안 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고 전하여 진다.

 

작사를 한 문일석은 본명이 윤재희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청년이었으며, OK레코드에서 현상모집한 "향토찬가 현상모집"에 '목포의 노래'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어 이것이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 문일석은 26세에 요절하였다고 하는데 목포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1972년 사망)의 1남 2녀중 장남이라는 것이 목포의 연로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태양극장의 막간가수 출신인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이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하여 어머니는 극장주인 일본사람의 집에 일하러 제주도로 가고 없었다. 어머니가 그립기도 한 이난영은 목포 공립 보통학교(현 목포 북교 초등학교) 4학년때 제주도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게 되었다.

 

당시 극장에는 태양극장의 연극공연이 있었는데 노래에 소질이 있는 이난영을 극장주인 일본사람이 소개하여 태양극장에 입단을 하였다.

태양극장은 1923년 박승희등이 설립한 토월회의 후신으로 토월회가 경영난으로 해산한 후 박승희 단독으로 1932년에 설립한 흥행위주의 연극단체였다.

 

태양극장의 연기인들은 토월회의 연기자들을 대부분 흡수하였는데 강석연, 양백명(탈렌트 양택조의 부친), 이동호, 석금성, 강석재등 당시 일류 배우들이 많았다.

이난영이란 이름은 태양극장의 박승희가 지어준것으로 1933년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에서 처음으로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아리랑' '도라지타령'을 난영이란 예명으로 노래하였다.

 

이난영, 박향림

 

 

 

"일본 교포의 초청으로 대판에 가서 '춘향전' 음반 12매로 취입할 때에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하여 ---"<사상계 1963.8 박승희 회고'

 

이난영이 처음으로 취입한 곡은 '지나간 옛꿈', '시드는 청춘'으로 1933년 8월에 태평레코드의 취입광고로 나와있다.

"16세때 세상물정을 아나요 대판에서 혼자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하며 --- 어느 흥행사에게 사기도 당했어요.

 

그때 OK레코드 사장 이철이 레코드 기획일로 대판에 왔어요.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나를 추천했어요"

<모던일본(마해송 주관):1940. 3 좌담회기사)

 

태양극장에서 배우들의 잔심부름과 빨래를 해주며 고생하던 16세의 소녀 이난영은 이철에 의해 OK레코드 전속가수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OK레코드의 데뷔곡으로 1933년 9월 '향수', 10월에는 '고적', 그리고 '불사조'가 11월 신보 명칭으로 광고가 나오면서 (10월 20일부터 발매) 인기를 끌어 가수 이난영이 알려지게 되었다.

 

1934년 동요작가 윤석중의 가사로 된 '봄맞이'가 계속 힛트하고 1935년 8월에년 대표곡 '목포의 눈물'이 대힛트하여 고복수와 함께 OK레코드의 간판스타가수가 되었다.

 

오케레코드사 스튜디오 모습

 

 

 

고복수가 '갈매기의 항구'를 취입하기 위해 노래 연습중이었는데 현상모집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에 마땅한 곡이 없자 '갈매기의 항구' 음악곡에 '목포의 노래' 가사를 입혀 '목포의 눈물'로 바꿔서 이난영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1936년대 이난영은 일본의 데이치구레코드에 7월 신보로 '이별의 뱃노래' '아리랑 노래'를 취입하였다.

'이별의 뱃노래'는 '목포의 눈물'을 일본어로 번안한 가요이며 일본노래로 '바다의 고향', '석파의 노래' 등과 1938년에는 '백장미처녀'등 외 '봄마지'가 나왔는데 '봄마지'는 일본어로 번안 취입되었다.

 

1937년에는 '해조곡', 1939년에는 '다방의 푸른꿈'이 계속 힛트가 되었다. '다방의 푸른꿈'은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블루스 음악으로 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정확한 블루노트(BLUE NOTE)에 의한 작곡기법으로 구성되었다. <가요 평론가 황문평>

 

1942년에는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가 힛트가 되면서 인기의 열정이 식지않고 계속되었다. 8.15 해방이 되자 남편 김해송이 설립한 KPK악극단에서 뮤직컬쇼에 참여하면서 무대의상을 손수 만들면서 악극단의 뒷바라지까지 하는 얌전한 여성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의 비극은 김해송의 납북으로 엘레지 여왕 이난영을 엘레지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7남매를 데리고 피난지 부산의 판자집에서 회초리를 들어 피나게 노래공부를 시켰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미군부대에서 노래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김시스터와 김보이스가 이난영의 아들딸로서 미국흥행사에 의하여 1959년 김시스터스는 라스베가스에서 명성을 떨쳤었다.

유달산

 

1953년 '김시스터즈'

 

 

김시스터스는 숙자, 애자, 민자로 민자는 이난영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며 1970년에 귀국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공연을 가졌다.

 

인기가수 이난영은 외로운 한송이 들국화 같은 여인으로서 항상 고독에 살아온 외로운 인생이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온 외로운 마음의 기둥인 남편 김해송과의 이별은 화려한 인기도 이난영의 마음을 메꾸지 못하였었다.

 

"이난영은 어릴때부터 얌전하고 눈물이 많았어요. 목포의 눈물이 나오기전이었지요. 극장 '단성사'에서 신무대의 공연시에 이난영이 특별출연하여 '봄맞이'와 '도라지타령'을 불렀어요. 너무 순진하고 화장도 못하여 내가 가르쳐 주었어요"<신카나리아 증언>

 

인기가수보다는 단란하게 살아가는 여인이 되고픈 소망이 염원이었을지도 모르는 이난영은 1965년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양주 한병이 딩굴고 있었는데 한잔의 술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눈을 감은 것이다. 장례식은 예총앞마당에서 연예협회주관으로 치루어졌다.

 

삼학도는 60년대 개발로 매립되어 산천은 변하고 사람도 가고 없지만 유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난영 기념비가 지나온 세월의 역사를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목포의 눈물(1935년 OK레코드,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출처/http://cafe.daum.net/choiho63/Gmss/980?docid=12Tve|Gmss|980|20090428092544&srchid=IIMaMryj300

 

 

목포시 양동 생가터에 조성된 소공원

 

 

숲을 거닐 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인간 세상에서 숲의 새소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가수가 부르는 절절한 노래가 아닐까 한다. 새소리가 있어서 숲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가수들의 좋은 노래가 있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은 한결 반감되고 위로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강탈당하고 갖은 유린을 겪던 시절,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때에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우리 강토를 깊은 슬픔과 격동 속에 잠기도록 하였다.

 

대체 깊은 슬픔이란 무엇인가?

다만 슬픔의 늪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깊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을 불러오게 한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파헤치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을 깊은 슬픔은 가졌다.

 

'목포의 눈물' 음반.

 

식민지 시대 가요계엔 슬픔에 잠긴 우리 겨레의 가슴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던 많은 가수가 있었으나 이난영만큼 생기롭고도 발랄하며 상큼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해준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난영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의 성음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거의 모진 핍박에 가까운 고난과 역경이 바로 그 힘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그 어떤 신산한 지경에 허덕일지라도 이난영은 결코 무릎을 꿇거나 비굴하지 않는 자세로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었다. 지

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와 자세가 아닌가 한다. 191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어릴 때 이름이 옥례였다.

 

젊은 시절의 이난영

 

항상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지독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떠난 이후로 줄곧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물풀처럼 살아간다. 삼촌댁에서 더부살이 아이로, 혹은 제주도의 일본인 가정에 들어가서 아이보개로, 혹은 떠돌이 유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가수로…. 이것이 소녀 이옥례가 겪었던 눈물의 시간이었다.

 

30년대 초반 태양극장의 이름 없는 막간가수로 일본공연에 참가하게 된다. 이 무렵 태양극장 단장이던 박승희가 옥례의 예명을 이난영이라 지어주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활동도 고달픈 역경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 밥도 굶고 생활비도 떨어져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을 때 이난영은 마침내 오케레코드라는 멋진 활동무대와 만나게 된다. 이철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난영의 나이 17세 되던 1933년은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던 화려한 무대의 시간이었다. '지나간 옛꿈'(김파영 작사, 김기방 작곡, 태평 8068), '향수'(김능인 작사, 염석정 작곡, 오케 1580)를 단번에 히트시키면서 잇따라 '고적'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전 조선의 가요팬들은 애교를 머금은 이난영의 독특한 코맹맹이 소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전혀 녹을 기색조차 없던 슬픔과 한이 이난영의 노래를 듣는 순간 스르르 녹아내려 눈시울을 흥건히 적시곤 했던 것이다.

 

 

이난영의 두 번째 히트곡으로는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 오케 1618)를 손꼽을 수 있다. 모진 겨울에서 슬금슬금 풀려나는 이른 봄, 이 노래의 구성진 가락을 듣노라면 가슴 속 차디찬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적을 경험하곤 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느니 오직 이난영의 노래요,

 

그 창법과 음색의 흉내였다. 이난영의 노래에 가사를 많이 제공했던 작사가로는 조명암, 박영호, 이규희, 남풍월, 김능인, 윤석중, 차몽암, 박팔양, 신불출, 양우정, 강해인 등이었다. 주로 시인들이 많은 작품을 주었다.

 

KPK 쇼단. 왼쪽부터 장세정, 윤부길, 신카나리아, 김해송, 이난영, 이봉룡.

 

작곡가로는 문호월, 염석정, 홍난파, 이면상, 손목인, 박시춘, 김해송, 이봉룡 등 당대 최고의 대가급이었다.

 

이난영 노래의 특색이라면 밝고 생기로운 느낌이 드는 청년기 세대들의 삶에서 테마를 선택한 작품이 많았고, 이난영이 이를 잘 소화시켰다. 그 때문에 경쾌하고 깜찍하며 발랄한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작품이 많았다.

 

 

김해송과 함께 만든 작품 중에는 재즈 스타일의 노래도 많았다. 더불어 이난영의 노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민요풍의 곡이다. '오대강 타령' '이어도' '녹슬은 거문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작사가 김능인과 작곡가 문호월 콤비에다 이난영의 창법이 조화를 이루면 더할 나위없는 멋진 트리오를 이루었던 것이다.

 

드디어 이난영의 생애에서 최고의 해가 찾아왔다. 1935년, 그녀의 나이 19세 되던 해에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이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무려 5만장이나 팔려나가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이난영은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한 곡의 유행가는 식민지 땅을 온통 흐느낌으로 잠기게 하였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장소로 되살아나게 하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마치 꽁꽁 앓는 듯한 이난영 특유의 콧소리에다 흐느끼는 듯 잔잔하게 애간장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느낌의 창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노래였다. 모두들 입을 모아 이난영의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의 오묘한 효과가 그대로 배어난다며 무릎을 쳤다.

 

 

 

가슴에 깊은 슬픔이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독자들이 계시다면 이 노래를 혼자 나직이 흥얼거려 보시라. 그런 다음에 어떤 반응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가만히 지켜보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사실 이 노래는 가사에도 반영되어 있듯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의 혼이 표현된 민족의 노래였다.

 

 

 

 

인기가수가 되었지만 이난영에게 시련과 역경은 끝이 아니었다. 작곡가 겸 가수로 이난영과 급격히 가까워진 김해송은 기어이 혼인을 했고, KPK란 이름의 악극단 경영까지 했다. 하지만 6·25전쟁의 세찬 풍파는 이 부부를 영원한 이별로 갈라놓았다.

 

'목포의 눈물' 영화광고

 

일곱 자녀에게 매로 노래를 가르쳐 김보이즈와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진출시켰지만 이난영은 늘 혼자였다. 결핵에 걸려 임종을 앞둔 가수 남인수와 마지막 불나비 같은 사랑을 불태우다가 1965년, 결국 49세의 나이로 혼자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경기도 파주의 어느 산중턱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묻혀 있던 이난영은 드디어 2006년 목포 삼학도 자락, 그녀의 고향 언덕으로 되돌아왔다. 목포시가 주선한 수목장 덕분이었다. 구름처럼 고향을 떠난 지 몇 해만인가. 이제 이난영의 영혼은 유달산 자락의 정겨운 바람결로 항시 자리잡고 있으리라. 그 바람결은 지금도 '목포의 눈물'을 도란도란 부르고 있을 것이다.

 

전성기의 이난영

 

한 가수가 일생을 통해 발표하는 곡이 다수이겠지만, 하나의 絶唱(절창)을 이루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으리라. 가수 李蘭影(이난영1916~1965)은 이 미 세상을 떠났으나 우리는 그녀의 絶唱으로 「木浦(목포)의 눈물」을 손꼽 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목포의눈물*...탄생 배경

 

본명 이옥례. 전라남도 목포 출생. 15세 때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서 노래하다가 1934년 OK레코드사에서 손목인(孫牧人) 작곡의 《불사조(不死鳥)》를 불러 가요계에 데뷔하였다.1930년대 당시에 순회악극단의 목포 순회공연때 발굴된 가수가 李蘭影 여사이다.

 

 

그녀에게 부르게 할 노래를 현상공모를 하였는데,가사는 목포인 문일석의 가사가 채택 되었으나 마땅한 곡이 없어 孫牧仁 작곡의"갈매기 항구"라는 곡에 문일석의 가사를 부르게 한것이 오늘날의 유명한 목포의 눈물이다.

 

木浦人이 쓴 가사에 목포 출신 이난영 여사가 노래를 부름으로서 港口都市 木浦는 물론 가수 이난영은 일약 유명한 가수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울밑에 봉선화"는 가곡으로써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시키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래말이었다.

 

목포의 눈물」이란 한낱 유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유행이 되었고 우리 민적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이고 선율이 되었던 것이다.

 

목포항

 

"노래는 추억의 묘지명(墓地銘)"이라고 한다.

노래의 흐름 속엔 한 개인의 추억, 애달픔, 고뇌뿐만 아니라 그 무렵 사회의 표정과 어두운 심연, 한숨과 입김이 깃들어 있다. "목포의 눈물"은 특히 그런 추억이 담겨 있다. "목포는 항구다." 목포를 떠올릴 때 첫 번째로 꼽아지는 인상이다.

 

너무 단순하여 맹랑하기까지 한 이런 정의가 목포의 첫 인상으로 자리잡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랫말이 만든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는 "목포의 애국가"라고까지 불려지는 "목포의 눈물"과 그 노래를 부른 이난영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하 우리 민족의 "망향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받는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가"였다. 그리고 민주투쟁의 연대에는 장렬히 산화한 열사들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가"이기도 했다"는 말처럼 목포시민들의 삶과 함께 하였다.

 

힘들고 슬플 때 뿐만 아니라 기쁘고 즐거울 때도 "목포의 눈물"은 어김없이 함께 하였고 또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1934년 조선 일보사는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복돋우기 위한 문화 사업의 하나로 OK레코드와 손잡고, 향토노래가사를 공모했고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文一石)의 작품 "목포의 노래"가 3천여통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되었다.

 

애절한 별리의 한을 담은 이 "목포의 노래"를 OK레코드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어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하였고 흥행사적 안목에서 목포 출신의 어린 가수인 이난영이 부르도록 하였다.

 

 

"목포의 눈물"은 우리 가요로서는 최초로 일본어로도 취입되어 일본에서까지 히트하였다.

이어서 "목포는 항구다"까지 히트하자, 가수 이난영과 우리 고장 목포의 정서와 빼어난 경관은 전국적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급숙히 메아리치게 되었고, 따라서 각 지방마다 목포구경 가자는 이야기가 유행일 정도였다 한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목포의 눈물"과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였다. "목포의 눈물"은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으니 실로 새로운 민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가곡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하였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래말이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한낱 유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노래한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유행이 되었고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 리는 가사이고 선율이 되었다.

 

목포의 유달산 기슭에는 "목포의 눈물"노래비가 세워져 있어 그 노래에 대한 소유권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비는 1969년 6월 10일 목포악기점을 하는 박오주(朴午周)씨가 기중하여 세워졌는데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중가요 노래비로서 더욱 의미가 있다.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목포시민들에게는 흘러가는 단순한 유행가가 아닌 것이다.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을 기념하는 일은 노래비로 그치지 않았다. 1968년 제 1회를 시작으로 지금 15회째를 맞고 있는 난영가요제가 기념의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난영가요제는 시민들이 아껴야 할 제전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난영 목포가요제

 

그렇지만, 힛트곡 "목포의 눈물" 만큼이나 이난영의 인생역정은 슬픈 것이었다. 어렸을적에는 가난에 허덕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고, 김해송과의 결혼 후에는 남편의 바람기와 여러명의 자식들을 간수하며 눈물을 가슴속에 쌓아갔다. 남편의 납북으로 일곱명의 자식(원래는 열두명인데 다섯은 어렸을적에 사망하였다고)을 홀로 음악공부를 모질게 시키며 "김시스터즈"라는 훌륭한 그룹을 만들어 냈다

 

 

말년에는 폐병으로 투병하는 가수 남인수(南仁樹)의 곁에서 그의 병간호를 하다가 그마저 가고 난 후에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사람의 가슴을 꽁꽁 비끌어매며 또 살포시 녹아내리는 엉기는 듯한 콧소리는 그녀의 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눈물의 흔적이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choivieseo3/7108103

 

 

 

 

 

 

 

 

 

50년 전 미국에 불어온 한류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50년 전의 한국, 참 가난하고 살기가 힘들었다.같은 동족인 북한에게 호되게 당한 침략 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을 제대로 걷기도 힘든 중병환자를 만들어 놓았다.그때 한국 사회를 한 단어를 표현하자면 암울, 좌절, 무기력, 열등의식 등이었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은 그저 전쟁, 빈곤, 고아, 혼란의 단어부터 연상되는 후진국중의 후진국으로 보고 있었다.

 

 

1959년, 이 어둡고 우울한 한국에서 홀연 날아온 세 마리의 참새 같은 어린 자매들이 미국 사회를 뒤 흔들었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고 이 난영 여사와 납북된 작곡가 김 해송 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숙자 ,애자와 이난영 여사의 오빠 딸인 민자, 세 자매들로 구성된 김 씨스터스다.

맏이 숙자가 17살, 동생 애자가 15살, 민자가 17인 모두 성인도 안된 틴에이저들이었다.

남편이자 집안의 기둥이던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자 이 난영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예능에 재능을 보이는 딸들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원래는 맏딸 영자가 리더였으나 키가 너무 커서 이난영 오빠의 딸인 민자를 대신 합류시켰다

김 씨스터즈는 1953년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그러나 곧 주한 미군 무대로 자리를 넓혀갔다. 김 씨스터즈는 미군 무대에서도 최고 인기 가수가 되었다.

 

국내 무대와 미군 무대를 넘나들며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이 자매들의 유망성을 미국 라스 베가스 연예계의 한 메니저가 알아보고 미국으로 초청했다.

1959년 1월 9일 이들 어린 자매들은 가족과 떨어져서 사흘이나 걸려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들이 활약은 라스베가스의 호텔들에서였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날아온 자매들이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수준이었다면 그저 라스 베가스 업소들을 전전하다가 몇년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밟았을 것이다.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그러나 김 시스터스들이 내놓은 재능은 그저 가창력 하나만이 아니었다.춤도 잘 추었고 28개나 되는 수많은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더구나 이들 재능과 이국적인 동양의 매력을 교묘히 컴비네이션 시켜서 분위기를 휘어 잡는 비상한 엔터테이너적 재주도 있었다.여기에 연습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성실한 자세도 밑받침되었다.

 

김 시스터즈는 자기들의 다양한 재주로서 한 시간 정도의 공연을 간단히 소화할 줄 알았다.

 

김해송·이난영 부부의 자녀들은 김시스터즈(앞줄)와 김브라더즈를 만들어 활동했다. 김시스터즈는 최초의 걸그룹이자 한류의 원조 격이다

 

라스 베가스에서 싻이 튼 이들의 인기는 전 미국에 전파되었다.미국 순회 공연도 자주 했으며 여러 TV에도 출연했었다.김시스터스의 인기는 미국의 최고 인기 주말 쇼 프로그램인 에드 서리반 쇼우에 무려 22번이나 출연하게 했다.

 

권위 있은 라이프 잡지는 김 시스터스를 크게 소개하기도 했다.이들이 부른 찰리 브라운이 빌보드 인기 차트에 오르는가 하면 보브 호프의 월남전 위문단에 멤버로 참여하여 미군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였다.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1

 

김 시스터의 대활약은 전쟁과 가난으로만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향상 시켰을 뿐더러 암담했던 한국민들에게 기쁨과 자신감을 주었다.

 

메스컴이 발달 되지 않아 지금처럼 김연아의 보도처럼 열광적인 센세이션은 없었으니 신문마다 이들 자매의 활동을 보도했었다.전국민의 열성적인 성원이 이들을 뒷받침했다.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1

 

김 시스터스의 인기에 힘입어 여러 한국인 가수들이 미국에 진출하였다.

윤복희[코리아 키튼즈]나 김치 켓츠나 패티 김과 김 시스터스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 보이스가 줄을 이어 미국에 데뷔했다.

 

김 시스터스야 말로 한류의 원조이다.더구나 50년이나 지났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렇게 어린 나이에 미국 무대에 등장해서 이 정도의 큰 사랑을 받은 한류 스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1

 

이들은 80년대까지 활동을 했었다.70년도부터 한국에도 가끔 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매들 모두 세월이 흘러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춘추가 되었다.막내 동생 애자는 1987년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나 언니 숙자 씨는 미국에, 민자 씨는 남편을 따라 헝가리에 생존해있다.  출처 / http://blog.paran.com/wonnn123/45935868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

 

 

김 시스터스

http://blog.daum.net/yjhmk/2572776

 

1953년판 '하의실종' 김시스터즈를 아시나요

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103/sp2011031006015595510.htm

 

일제강점기 대중음악계 천재 김해송을 아십니까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182608&cloc=olink|article|default

 

'김시스터즈' 아시나요...한국 가수의 美 빌보드 순위 도전사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70721130005330&p=Edaily

 

한국의 걸그룹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

 

 

 

1957년, 닐리리 열창- 어쩐지 어머니 이난영 여사를 연상케 하는 한국적인 정서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창법을 쓴다.

 

 

 

송민도와  김시스터즈- 청춘목장 숙자(17)  애자(15)  민자(17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