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이야기와. 詩

독립문

호남인1 2012. 7. 31. 03:24

 

 

 

 

 

독립문

 

사적 32호

주소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요약설명

구한말에 세워진 석조 기념물.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 만들었다. 1896년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국민성금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년 만에 완공되었다. 원래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나, 1979년 성산대로가 개통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9년 10월에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재정비 되었다.

 

규모는 높이 14.28m, 너비 11.48m로 화강석을 쌓아 만들었으며,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었다. 홍예문에는 태극기와 함께 한글과 한자로 쓰여진 ‘독립문’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상세설명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다음 문화사전

 

 

 

돏립문과 독립관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정치결사로서 서재필의 주도로 1896년 7월 2일 창립되었다.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등 30여 명이었다.

 

초창기 독립협회를 이끌어갔던 주역들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외세 종속적인 사대주의의 상징물로 규정하고 자주 독립국가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같은 독립 기념물을 조성하려 했다.

창립총회에서 통과된 <독립협회 규칙> 제2조에는 “독립협회에서는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설하는 사무를 관장할 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모화관은 ‘중화를 숭상’하기 위한 건물로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중국 사신을 맞을 때는 왕세자가 모화관에 나아가 하마연(下馬宴)이라는 환영식을 열고, 돌아갈 때는 상마연(上馬宴)이라고 해서 문무백관이 극진한 송별연을 베풀어주었다. 갑오경장 이후 모화관은 사용이 중지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모화관 앞에는 영은문을 세우고 남쪽에 연못을 팠다. 영은문은 조선시대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1536년 모화관 남쪽의 영조문을 김안로의 주청으로 개축하고 영조문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연총이 영은문이라 써서 걸도록 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다. 영은문은 1895년 2월에 김홍집 내각에 의해 철거되어 장주형초석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과 독립공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1896년 6월 20일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문 건립을 위해 국왕의 승인까지 받고 이름을 ‘독립문’이라고 새길 것까지 합의되었다.

 

서재필은 《Independent》지 1896년 6월 20일자에 독립문 건립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이광린·신용하 편저,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일지사)

 

독립문이 세워진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환영일색이었다. 1896년 7월 16일자 《독립신문》에는 김석하가 투고한 <독립가>가 실렸는데, 당시 사람들이 독립문 건립 계획에 대해 얼마나 열광적으로 반응했는지 엿볼 수 있다.

 

“우리 조선 신민들은 독립가를 들어 보오 우리 성주 유덕하여 자주독립 좋을시고병자지수 설치하고 자주독립 좋을시고 연주문을 쇄파하고 독립문이 높아지네독립문을 지은 후에 독립가를 불러보세 우리 성주 수만세요 우리 창생 화합이라우리 조선 신민들은 진충보국하여 보세 오백년래 좋은 일은 독립문이 좋을시고”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비용을 국민의 성금을 모아 충당하기로 했다. 우선 독립협회 발기 위원들은 510원의 보조금을 거두어 헌납했다. 왕실에서는 왕태자 명의로 7월 20일경 1천원을 하사했다. 독립문 등의 건설사업은 각계 각층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8월 말에는 모금 총액이 1067원에 이르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독립문 건립 책임자로 선정하고, 1896년 9월 6일 총비용 3825원으로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독립협회와 서재필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독립문의 설계는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모형을 축소해서 기본 설계로 하고,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일설에는 러시아인 기사 G. Sabatin)가 서재필을 도와서 세부설계를 작성했다. 9월 16일부터는 독립문 기초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공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담당했다. 심의석은 당시 유명한 서양식 건축기사로서 독립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간사원에도 선출되었다.

석공(石工)은 한국은 고급 기술자들이 담당하고 역사(役事)는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주춧돌을 놓는 기공식인 정초식(定礎式)은 1896년 11월 21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무려 5~6천 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뿐 아니라 정부의 각부 대신들, 각 학교 학생들, 각국 공사·영사와 외국인들도 운집했다. 그리고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 20일경에 독립문은 역사적인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날 관립 영어학교와 배재학당 학생들이 체조와 창가로 식을 더욱 빛냈다고 한다.

 

독립문 준공식 석상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종노릇하던 표적을 없애버리고 정말 실질적 독립을 소유한다는 표로 이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니, 우리 국민 일반은 이 점을 잘 생각하고 우리 나라 독립·자주를 위하여 더욱 분발해야 한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독립문은 높이가 14.28m, 너비 11.48m로 화강암 벽돌 1천 850개를 쌓아 올렸다. 독립문 내부 왼쪽에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독립문의 남쪽 현판석에는 국문으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북쪽 현판석에는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새겨 넣었다. 독립문 글씨 좌우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무지개문의 이맛돌에는 황실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한편 서재필은 독립문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모화관을 전면 개수해 ‘독립관’(The Independent Pavillion)이라고 고치고 독립협회 회의장과 사무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무려 2000원이라는 막대한 경비를 들여 1897년 5월에 보수가 완료되자, 독립협회는 1897년 5월 23일 왕태자가 국문으로 친서한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하고 개관했다. 독립협회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서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독립공원은 독립문과 독립관 일대가 공터였으므로 독립협회는 이를 현대식 공원으로 꾸미고 독립문과 독립관을 보존하고자 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조선 인민이 양생을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정(淨)한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으로 꾸며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공원지라고 전할 뜻이라”(1896년 7월 4일)고 독립공원의 건립 취지를 밝혔다.

 

독립공원에는 각종 관상목과 화훼를 심고 징검다리를 설치해 1897년 5월에 일단 건설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독립공원은 운동장과 휴게소, 그리고 강연장 등으로 계획되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우선 휴게소만 건설되었다.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건립은 전 국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됨으로써 국민의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전 세계에 한국 국민의 자주독립 의지와 결의를 알렸으며, 영구히 보존 가능한 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후손 만대에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의지를 각성시켜 주었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역사로 보는 서울의 공간 - 독립문의 건립

 

서울의 서대문구 현저동에는 개선문처럼 생긴 화강암으로 만든 문이 서 있다. 이 문이 바로 독립문이다.

독립문을 자세히 보면 매우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우에 화강석 돌기둥을 세우고 중앙을 아치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 안쪽에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돌층계와 출입문을 만들었다. 옥상에는 돌난간이 둘려져 있고, 문 앞에는 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독립문의 전체적인 모양은 개선문과 닮았지만, 석재를 쌓는 방법이나 돌기둥의 캐피탈은 서양인 기술자가 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러시아인 사바틴이라고도 한다)가 설계를 했지만, 공역(工役)은 한국인 건축기사인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독립문의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의 문장(紋章)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문 정면과 뒷면에는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지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獨立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석(懸板石)이 있다.

 

이것은 독립문건립을 제안한 서재필이 그 사업을 국민국가 건설의 상징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독립문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헌 자리에 세워졌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고로 1896년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관민들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1896년 6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9월 6일 국왕의 동의 하에 서재필의 책임 하에 독립문을 건립하도록 했다.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었던 모화관(慕華館)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11월 21일 대대적인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19세기말 조선왕조에 열강들이 들어와서 광산, 철도, 전선, 삼림, 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고 우리 나라를 식민지화 하려고 노려 민족적 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조선 사람들이 자주민권(自主民權), 자강운동(自强運動)을 전개하여 민중의 힘으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고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조직된 단체가 독립협회(獨立協會)이며, 협회의 첫째 사업이 독립문의 건립과 독립관, 독립공원 조성이었다.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러시아인(人) 사바틴의 설계와 심의석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독립문의 구조는 단위 석재를 쌓는 조적수법(組積手法)으로 재래 성벽의 축조방식과 비슷하나, 아치를 받치는 기둥 양식이 서양의 양식건축을 닮았다.

 

 

 

태극기와 독립문-도안과 상징들

 

황제가 즉위하면서 여러 의례와 상징들이 바뀌었다. 궁중 용어는 황실의 용어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왕의 명령인 교(敎)와 교서(敎書)를 황제의 명령인 칙(勅)과 칙서(勅書)라고 했고, 전하, 왕비, 옥책문, 사와 직, 즉조당 등을 폐하, 태후, 금책문, 태사와 태직, 태극전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또한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의 왕자인 장귀비 소생 강과 엄귀비 소생 은은 1900년에 각 의왕와 영왕으로 봉해졌다.

 

종래 국왕과 대군주 폐하가 사용하던 어새와 어보의 장식도 모두 바뀌었다.

이전까지 조선 국왕이 쓰던 국새는 국왕이 즉위할 때 중국의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다. 장식도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제가 등장함으로써 어새의 장식은 천자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뀌었다.

 

대한국새는 가로·세로 각 9.6㎝의 정사각형이며 ‘大韓國璽’라는 글자를 새겼다.

국새는 국사에 사용하는 왕의 인장으로 임금이나 임금이 지정하는 관원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에 사용했다. 국가의 표상과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계승 시에는 전국의 징표로 전수되었다. 또 왕의 각종 행차시에는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했다. 고종이 타던 수레가 용교(龍轎)로 바뀌고, 왕에게 올리는 옥책문이 금책문으로, 오얏꽃(李花)이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등장해 각종 집기를 장식했다.

 

나라의 각종 공문서 양식과 용어도 바뀌었다.

‘조선국’ 혹은 ‘왕’과 ‘대군주폐하’로 된 양식이 ‘대한제국’ ‘대황제폐하’로 바뀐 것이다. 고종의 의복에는 색깔 혁명이 일어났다. 국왕을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었던 반면, 황제를 상징하는 색은 노란색이었다. 환구단의 건물장식은 물론 궁궐 내외의 각종 건축물이나 의복, 장식물 등에 노란색이 흔히 쓰이게 되었다. 국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도 황색으로 바뀌었다. 그 대신 왕이 입었던 자주색 곤룡포는 황태자에게 계승되었다.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역대의 고사에 따라 전국의 죄인들에 대해 대사령을 내렸다.

 

 

아울러 고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다음달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국가와 황제의 어기(御旗), 친왕기(親王旗), 군기(軍旗) 등을 제정했으며, 황제를 대원수로 한 프러시아식 복장과 관복을 제정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도 제작했다.

 

고종 황제 면복에는 12장(章)의 문양을 새겼다.

좌측 어깨의 ‘일’(日)은 일상(日象)의 조광(照光)을 상징하며, 우측 어깨의 ‘월’(月)은 불로불사(不老不死)를, 등 중앙의 ‘성신’(星辰)과 산(山)은 각각 충의로운 사람과 진정(鎭靜)을, 상(좌우 각 1)의 ‘화’(火)는 빛나는 밝은 덕을, 상(좌우 각 1)의 ‘조’(藻)는 쌀과 청결과 화미(華美)를, 상(좌우 각 1)의 ‘분미’(粉米)는 사심(私心)이 없으며 양민에 충성을 다함을, 상(좌우 각 2)의 보는 왕의 결단과 의지를, 상(좌우 각 1)의 불은 사심이 없음과 신민(臣民)의 배악향선(背惡向善)을, 어깨(좌우 각 1)와 폐슬(좌우 각 1)의 ‘용’(龍)은 신기변화(神奇變化)를, 소매(좌우 각 3)와 상(좌우 각 1)의 ‘종이’(宗彛)에 새긴 호랑이는 용맹을, 원숭이는 지혜를 상징하며, 소매끝(좌우 각 3)의 ‘화충’(華蟲)에는 상상의 새를 새겨넣었다.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155쪽 참고)

 

경운궁의 전각인 중화전의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붉은 해와 흰 달은 각각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봉우리로 표현된 산은 곤륜산으로 임금을 상징한다. 일월오악도의 해, 달, 솔, 물 등은 천계, 지계, 생물계의 영원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러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까지 오래도록 번창하라는 국가관의 투영이며, 왕(황)실의 권위를 나타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도안과 상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오얏꽃 무늬다.

이 무늬는 1885년 전환국이 인천에 있을 때 발행된 동전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실의 문장으로 채택되어, 훈장과 우표 등 대한제국기에 광범위하게 쓰였다. 바로 이 시기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 태극기와 함께 독립문에도 이 무늬가 새겨졌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은 오얏꽃 무늬를 독립문의 완공에 곧 이어 선포된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으로 채택할 의향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는 왕족의 성씨인 이(李)씨에서 나온 모티프다.

 

태극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오다가 국가의 상징으로 채택한 데 견주어 볼 때 사용된 예가 거의 없어서 근대시기에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는 몇 번 바뀌기도 했지만 대체로 5개의 꽃잎마다 꽃술을 3개 놓고 꽃잎 사이에 또 꽃술을 1개씩 놓은 꼴을 기본으로 했다.

 

빛깔은 황제의 나라를 의미하는 황금색을 띠게 했다.

이 무늬는 황실을 상징하는 무늬이면서,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먼저 황실을 상징한 예로는 고종황제의 서류함, 덕수궁의 귀빈실로 쓰던 덕홍전의 복국, 석조전의 박공 등 황실에서 사용한 기물과 실내 및 실외에 두루 쓰였다. 따라서 이 무늬는 좁은 의미의 황실을 상징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군통수권자를 겸해 대원수로 취임하면서 원수부 소속의 장관은 황색 바탕에 은실로 오얏꽃 무늬가 수놓인 모자와 견장, 식대 식서 등을 착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예복을 입었을 경우 모자에는 처음에는 정면에 붙이는 모표에, 곧 이어 모자 꼭대기에도 이 무늬를 수놓아 사용하도록 했다.

 

오얏꽃 무늬는 국가를 상징하는 무늬로도 쓰였다.

종이돈, 쇠돈을 막론한 화폐와 나아가 외국과의 통상에 사용되는 우표, 파리 만국박람회의 소개 화보에 실린 건물 기둥에도 이 무늬가 쓰였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자 오얏꽃 무늬는 더 이상 황실이나 대한제국의 상징이 아니라 왕가의 무늬로만 격하되었다.

그래서 식민지가 된 시기에도 제한적이지만 이왕가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어진 각종 기물의 무늬로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대한제국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왕가의 무늬라고 하면 일본왕가인 이른바 천황가와 대등한 지위가 아니라 그보다 한 등급이 낮은 왕족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