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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慶會樓)

호남인1 2012. 3. 15. 23:20

 

 

 

 

경회루(慶會樓)

 

 

서울 경복궁(景福宮) 서쪽 방지(方池) 안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누각(樓閣).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1412(태종 12)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867(고종 4)년에 개축하였다.

국보 제224호이다.

 

 

경복궁경회루  

국보  제224호 | 1985.01.08 지정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태종 12년(1412)에 기존에 있던 연못을 확장해 만든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이나 사신들과 함께 큰 연회를 열던 곳이다.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1층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2층은 마루를 깔았다. 2층의 마루바닥은 가운데는 높고 주변은 낮은 3단 구조로, 중앙에 위치한 가장 높은 1단은 3칸, 한 뼘 아래의 2단은 12칸, 가장 낮은 바깥쪽의 3단은 20칸으로 되어있다.

 

이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중앙의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12칸은 1년 12달을, 바깥의 20칸에 세워진 24개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국난을 견딘 경회루”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있던 경회루는, 1867년 고종 때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의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경회루의 돌기둥과 석상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지만 다른 부분은 모두 건재하다.

 

 

문화유산정보검색

경복궁경회루 / http://heritage.daum.net/heritage/16220.daum#intro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 시대에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요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는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공포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들이 있다. 방지의 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본래 모습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 년 남았던 것을 고종 4년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재건 후 130여 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柳得恭)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1945년 무렵의 경회루

 

현재 모습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 20일에 새로 지은 건물로서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방형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건물 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상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부분은 소란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洲)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 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으며,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경회루와 경회지(慶會池)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내진-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 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 곳이 자연과 함께 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架構)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ㆍ추녀마루ㆍ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경회루에서 바라본 북한산 자락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나타나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圓柱〕,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方柱〕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정학순은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방형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경회루 건너편

 

평가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북악산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겨울의 경회루

 

 

 

경복궁의 정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거대한 해태조각이 양쪽에 앉아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연못이 있다. 이곳은 원림이 울창하였으며 홍례문을 거쳐 근정문에 이르는 사이에 맑은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 위에 홍제교(弘濟橋) 돌다리가 있었다. 이 돌다리가 현재는 근정전 동쪽에 이설 되어 있는데 조선의 석조미술을 대표할 만한 해치 조각과 아름다운 해태조각들이 있다.

 

근정문(勤政殿)을 들어서면 표면수를 받아내는 절묘한 구배의 판석을 깐 마당이 있다. 이 판석은 햇빛의 반사를 줄이고 사람이 거닐 때 미끄러지지 않게 거칠게 표면을 처리하였으며 규격을 정형화 하지 않고 자연스런 형태로 깔았다. 근정전 내에는 한 포기의 나무도 심지 않았고 품의석이 정1품에서 9품에 이르기까지 어도(御道) 좌우에 서 있다. 근정전의 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는데 방위에 따라 4신(四神)상과 12지신상이 조각되었고 돌난간의 연꽃잎 조각과 해태조각 등이 조선 선조 미술의 우수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근정전과 사정전의 치조(治朝)공간에는 조원하지 않았다.

 

향원정의 겨울

 

 

노문(路門)인 향오문을 들어서면 정침인 강령전이 있고 주위에 작은 6침의 침전이 있으며 그 뒤에 왕비의 정침인 교태전(交泰殿)이 있다. 이 교태전은 경복궁의 중궁전(中宮殿)으로 경복궁 평면의 동서남북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연조의 공간에 천지운행과 시각을 측정하는 홈경각, 보류각, 간의대들이 자리하였다.

 

조원은 교태전의 후원에 장방형의 단을 쌓아 선산(仙山)인 아미산(峨嵋山)을 상징하고 화계(花階)를 만들어 매화, 모란, 앵두, 배꽃, 반송, 철쭉 등을 심었다. 화계단에는 석분에 심은 괴석, 석지(石池), 물확, 해시계를 배치하였고 6각형의 꽃벽돌로 쌓은 아름다운 굴뚝이 4개 서 있는데 보물(8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태전의 동쪽에 대비전(大妃殿)인 자경전(慈慶殿 보물809호)이 있다.

자경전의 꽃담은 대단히 아름답다. 벽돌로 쌓은 꽃담에는 거북. 모란, 매화. 복숭아, 석류, 국화 대나무 소나무 등 아름다운 무늬가 장식되었고 ‘만수(萬壽)’ 등 글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자경전 후원에 있는 굴뚝 담 벽에는 해, 산, 구름, 바다,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 등 십장생 무늬가 새겨져 우리나라 담벽 중 가장 아름다운 장식을 하고 있어 보물(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겨울의 경회루

 

 

교태전과 강령전의 서쪽에 경회루(慶會樓) 방지(方池)가 있다. 이 못(113x128m)은 물 속에 장방형의 세 섬을 만들고 동쪽 제일 큰 섬 위에 정면7칸 측면5칸의 웅대한 경회루를 건립하였다. 이 경회루의 초입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세 개 있고 섬 가에는 돌로 조각한 난간이 둘러있다. 서쪽에는 배를 탈 수 있는 선창이 마련되었다

 

경회루(국보224호)는 48개의 높고 육중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건립한 것인데 경회루의 마루바닥은 3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문이 천정에 매달려 있어 문을 내리면 방이 되도록 되어 있다. 계자 난간을 둘러서 지붕의 추녀길이와 기둥높이의 비례가 시각적으로 조화롭게 하였다.

 

경회루는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만들어 집이 더욱 웅장하게 보이도록 효과를 높였는데 못 속의 섬에 들어 있어 멀리 보는 시각적 조화를 고려하고 수면 위에 그림자의 영상효과를 잘 고려하여 장엄하게 만들었다. 경회루는 돌다리와 돌난간의 서수(瑞獸)조각 솜씨로 조선의 석조조각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지만 건축기술과 토목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기술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겨울의 경회루

 

 

물 속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을 쌓고 1cm의 부등침하도 없이 기초를 판축으로 다져 올려 48개의 돌기둥과 건물의 수 백톤 무게를 지탱하게 한 경이로운 조선의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경회루 못 바닥에는 수 천 개의 나무기둥이 촘촘히 박혀 있다. 다른 두 섬에는 운치 있는 소나무를 심어서 선산(仙山)의 경치를 두 가지로 보여준다.

 

이 못에 물 넣는 방법은 못 밑에서 솟아오르게 하여 못물이 썩는 것을 방지하고 수면을 고요한 거울같이 만들어 왕궁이 물 속에 잠기어 환상적인 영상효과를 연출하게 하였다.

 

조선의 연못은 거의가 방형(方形)또는 장방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왕궁의 모든 시설은 장대석을 쓰는 것이 일반 민가와 다르다. 민가에서는 자연석을 썼다.

 

경회루 못 가에는 늙은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들이 서 있다. 경복궁 내전(內殿) 뒤는 후원이며, 원림(園林)으로 조성되었는데 향원지(香遠池)가 있다.

 

향원정

 

향원지에는 원형의 섬이 있고 섬 안에 6각 2층의 정자인 향원정이 있다. 이 섬에 이르는 32m의 취향교(醉香橋)는 아름다운 목교이다.향원지의 면적은 4,605,m2인데 모서리를 약간 죽인 방지(方池)이다. 향원이란 연꽃의 별칭으로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구절인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에서 따온 말이다.

 

조선왕궁이나 선비가문의 조원에서 연못의 연꽃은 군자(君子)를 상징하고, 사찰에 있는 연못의 연꽃은 극락의 만다라를 상징하는 것이 다르다.향원지의 수입시설은 샘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직각으로 꺽어서 물 밑으로 잠겨들게 만드는 자일(自溢)의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키가 작은 관목류인 철쭉, 매화 등이 심어져 있고 연못, 산사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 울창한 수림을 이루었으며 못 속에는 연꽃을 심었다.

 

향원지 동쪽에 낮은 동산인 녹산(鹿山)이 있다. 이 곳에 참나무 단풍나무 화화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다. 경복궁의 동. 서 남 북 성문 내에는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수림이 무성하게 있었던 것이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경복궁복원

경복궁은 조선시대 5대궁 중에서도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태조4년(1395)에 창건되었으나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270년간 거의 폐허화 되어있다가 고종5년(1868)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러나 고종32년(1895) 명성황후가 일본인 폭도들에게 시해당하는 변을 당하고 이듬해 2월에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播遷)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의 운명이 끝나게 된다.

 

일제식민통치의 우리 역사와 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조선의 5대궁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파괴되어 제 모습을 잃게 되었는데, 그 중 경복궁은 500여 동에 달하던 전각이 거의가 헐리고 근정전, 경회루 등 불과 10여 동만 남게 되며, 더욱이 근정전 남쪽 정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음으로써 경복궁의 경관은 완전히 허물어지게 되며 일본인들의 지배를 상징하는 장소로 바꾸게 된다.

 

현재 장엄하였던 경복궁의 위용을 되살려 역사도시로서 수도 서울의 면모를 되살리기 위해 복원 사업이 5단계로 나누어 1990년부터 2009년 까지 20개년 계획으로 진행 중에 있다. 복원 기준연대는 고종 때의 최종 경복궁 완공 시점인 1888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1900년초 촬영 기록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과 도면화된 경복궁 전도, 북궐도형과 문헌으로는 「조선왕조실록」「궁궐지」등을 참조하여 복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