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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원(鳥嶺院)터(址) - 문경새재

호남인1 2012. 2. 13. 01:08

 

 

 

 

문경새재 조령원(鳥嶺院)터(址)

 

조령원터는 제1관문에서 제2관문 쪽으로 약 1.5km정도에서 만날 수 있다.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은 것으로 나그네들을 위한 것이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을 전하게 하고, 원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이 분명하여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케 했을 뿐이다.

 

평원이나 기름진 땅에 있는 원에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하물며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에 있는 원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많았을 것이다.

 

사람이 상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은 많은 불편이 있었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떡이나 식량을 가져다 놓으면 여행객들이 알아서 음식을 해 먹고 돈을 꼭 내고 갈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라 한다.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에 요광원(要光院)이 있었으며, 지름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

 

조선시대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지금의 여관)로서 원과 관의 제도가 있었다.원은 반관, 반민성격으로 고려시대 부터 있어온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교통기관으로 제도화된것은 조선왕조부터였다.이와 같은 원은 지금은 새재원터만이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오고 있고 나머지 원은 기록으로만 전해올뿐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참고자료 : 문경새재의 전설과 신앙/문경새재박물관

 

 

 

조령원(鳥嶺院)과 조령(鳥嶺)

 

조령원은 흔히 새재로 잘 알려진 조령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령산성 안의 제1관문에서 제2관문 사이에 있다.

조령은 '문경새재'라 하여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 교통로 상에 있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에 조령로를 관도(官道)로 개통시킴으로써 이 조령로는 교통로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숙종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조령에는 이른바 초곡성(主屹關, 제1관문), 중성(鳥谷關, 제2관문), 조령산성(鳥嶺關, 제3관문)을 축조함으로써 관방(關防)으로서 뿐만 아니라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통행인을 위한 숙박 시설을 설립하였으니 조령원, 동화원, 요광원, 관음원, 화봉원이었다. 그 중 조령원은 고려시대에는 초점원(草岾院)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조령원이라 하였다.

 

최근에 조령원터로 추정되는 곳을 1977년 두차례에 걸쳐 발굴하게 되었는데,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온돌유지가 노출되었으며,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석문과 석담의 축성 방식이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과 유사하며 석문은 방형석주(方形石柱)이다.

한편 제2관문에서 제3관문 사이에 동화원이 있다. 원래 동화원은 문경현 서북쪽 15리쯤에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보면 해가 뜨는 곳이 보이고 산에 핀 꽃이 화려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동화원에서 조령관까지는 약 1.2km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화전민이 많이 거주하여 조령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터만 남았으며, 동화원 역시 조령원과 마찬가지로 여행객을 위한 숙박처였다.

 

참고문헌 : 길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문경새재박물관

 

 

 

 

문경 조령원터에 대한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발굴 조사 자료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대 새재도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조령관문 일원은 사적 제147호와 경상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령원터는 문경읍 상초리 447-1번지 일대의 제1관문에서 제2관문으로 향하는 해발 290m 지점의 조령로 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제1관문에서 약 1.3km 떨어진 지점이다.

 

조령원터 온돌유구

 

두 차례에 걸쳐서 실시한 조령원터 조사에서는 모두 4개소의 건물지, 온돌유구 흔적, 성격불명의 석열 등이 노출되었다. 4개소의 건물지는 현존하는 돌담장과 불합리한 배치로 노출되어 모두가 동시대(同時代)의 유구로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조령원터 석열 유구

 

이 조사의 목적은 조령원터 내부의 온돌유구와 건물지에 대한 정비 또는 복원을 시행하기 위함이었으나 예상 외로 교란이 심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하였던 건물지의 배치상태와 규모, 특징 등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였다. 결국 시대를 달리하는 건물유구가 중복된 상태로 노출됨에 따라 정비대상 유구의 선정에서부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조선시대 원의 설치와 운영

 

유래

원우(院宇)라고도 하는데 역과 달리 일반 상인이나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여인숙으로서 상업과 민간 교통의 발달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원의 유래는 역이 신라 소지왕(炤知王) 때 이미 설립된 것으로 보아 고대 국가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설치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역원조」에 의하면 대로원(大櫓院)이 신라 김생(金生) 생존시(8세기 중엽)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9주 5소경제가 수립되면서 중앙과 지방 간의 행정 및 도로의 요충지나 고갯길 또는 하천변에 여행자를 위한 숙박 시설이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러 역참제의 확립과 주점(酒店)의 설치, 그리고 불교가 발달하면서 사원 근처나 교통상의 요지에는 불교식 이름을 가진 원이 많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가의 비보 사찰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성행하게 되었고, 수공업이나 사원전의 경작을 통한 잉여 생산물의 유통으로 사원이 사원 참배를 위해 왕래하는 일반인은 물론 상업에 종사하는 상여(商旅) 및 여행자들의 숙식 제공처로서 역할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고 있는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 개성(開城)의 천수원(天壽院)은 사원(寺院)의 후신이었으며, 각 읍의 원 이름을 보면 대사원(大寺院), 선원(禪院), 대비원(大悲院), 보통원(普通院), 도솔원(도率院), 미륵원(彌勒院) 등 불교식 이름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원의 설립자 중에는 승려도 있었다.

 

선초에 이르러 승려를 원주(院主)에 임명하거나 원우를 보수케 하고 있는 것은 후세의 원이 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원이 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여말선초 신흥 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억불숭유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찰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보겠다. 유불 교체 시기 사원의 정비 속에서 승려들을 원주 또는 원의 관리자로 활용하는 정책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원의 확립과 운영

조선왕조는 도로 교통상의 요지에 진(津)·관(關)을 설치하고, 읍치(邑治) 부근에는 객관(客館)을 건립하여 관리 및 여행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하였으며, 공무(公務)로 왕래하는 중요 도로변에는 역참을 신설하거나 정비하여 교통·통신망을 확립함과 아울러 원을 공적(公的) 숙박기관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특히 여말 선초에 이르러 몽고 및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창궐로 피폐해진 원을 복구, 재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조 6년에 편찬된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원의 보수, 원주의 차임, 원우의 유지에 관한 여러 규정이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 원의 정비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세종 7년(1425) 각 고을에 명하여 승속(僧俗)을 물론하고 착한 사람을 뽑아 원주로 삼고 지로(指路)와 거화(擧火) 등의 일에 전심하여 행인을 돕도록 하거나 도성 밖의 10리에 있는 원은 한성부로 하여금 수리하고 홍제원(弘濟院)의 예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였고,세종 10년(1428)에는 원주의 잡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세종22년(1440) 11월에는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여연(閭延)에 이르는 지역의 원을 영건케 하고 도로를 평탄하게 보수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책을 추진한 결과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둠으로써 제도적인 확립을 보게 되었다.

 

첫째, 원우는 도성의 성밖은 5부에서, 외방의 원은 수령이 관리하며, 원 부근의 백성을 원주로 삼아 수리케 한다.

둘째, 도성에서 개성, 죽산, 직산, 포천 등 대로의 원에는 원주 5호를, 도성에서 양근, 죽산에서 상주, 진천에서 성주, 직산에서 전주 등 중로에는 3호, 소로에는 2호를 배정하고 잡역을 면제한다.

셋째, 원위전(院位田)은 자경무세(自耕無稅)이며, 대로에는 1결 35부, 중로에는 90부, 소로에는 45부씩을 지급한다.

넷째, 원주에는 보인(保人) 3명을 지급하고 타역에서 종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규정 위에 조선시대의 원은 확립되었으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원우(院宇) 항목이 기록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역원(驛院) 항목이 추가되는 등 원의 명칭과 분포 및 소재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의 원수가 모두 1,309개나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쇠퇴하거나 혁파되었고, 상업과 유통 경제가 발달하게 되자 참(站) 또는 주점(酒店)·여점(旅店), 그리고 주막(酒幕)으로 개편된 경우도 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의하면 “참(站)이 있는 곳에는 원(院)이 있으며, 참점(站店)은 속칭 주막(酒幕)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는 한 예이다.

 

 

 

문경지역의 원

역에도 예외 없이 원이 설치되어 여행자에게 숙박을 제공하여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권근(權近)이 쓴 「견탄원기(犬灘院記)」에 “나라에서 역(驛)을 설치하여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어 상인과 행인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역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경 지역에는 새재원, 요광원, 관음원, 관갑원, 회연원, 개경원, 불정원, 보통원, 동화원, 견탄원, 화봉원이 건립되었다.

 

영조대의 『여지도서』중「문경현조」에 의하면 거의 큰 변화 없이 존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령원(鳥嶺院,조령 동쪽), 요광원(要光院,요성역 서쪽), 관음원(觀音院,계립령 아래), 관갑원(串岬院,관갑 북쪽), 회연원(回淵院,용연 위), 문경원(聞慶院,호계현 서쪽), 불정원(佛井院,호계현 서쪽), 보통원(普通院,호계현 남쪽 45리), 동화원(桐華院, 문경현 서북쪽), 견탄원(犬灘院,견탄 북쪽), 화봉원(華封院,초곡원,문경현 남쪽)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원의 전모를 상세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기록에 전하는 일부 원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조령원(鳥嶺院)과 조령(鳥嶺)

조령원은 흔히 새재로 잘 알려진 조령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령산성 안의 제1관문에서 제2관문 사이에 있다.  조령원은 ‘문경새재’라 하여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 교통로 상에 있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에 조령로를 관도(官道)로 개통시킴으로써 이 조령로는 교통로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었다. 그리하여 숙종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조령에는 이른바 초곡성(主屹關, 제1관문), 중성(제2관문), 조령산성(제3관문)을 축조함으로써 관방(關防)으로서뿐만 아니라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통행인을 위한 숙박시설을 설립하였으니 조령원, 동화원, 요광원, 관음원, 화봉원이었다. 그 중 조령원은 고려시대에는 초점원(草岾院)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조령원이라 하였다.

 

 

최근에 조령원터로 추정되는 곳을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하게 되었는데,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온돌유지가 노출되었으며,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석문과 석담의 축성 방식이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과 유사하며 석문은 방형석주(方形石柱)이다.

 

현재 제2관문에서 제3관문 사이에 동화원이 있다. 원래 동화원은 문경현 서북쪽 15리쯤에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보면 해가 뜨는 것이 보이고 산에 핀 꽃이 화려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동화원에서 조령관까지는 약 1.2㎞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화전민이 많이 거주하여 조령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터만 남았으며 동화원 역시 조령원과 마찬가지로 여행객을 위한 숙박처였다.

 

 

견탄원(犬灘院)과 견탄(犬灘)

견탄원은 견탄 북쪽에 있는 원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용연(龍淵)의 하류이다. 또한 일찍이 이곳에는 나루의 하나인 견탄진(犬灘津)이 있었던 곳이다.

 

견탄원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권근의 「견탄원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를 가려면 반드시 큰 재를 넘어 약 백리 길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냇가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길을 열어 사람과 말이 겨우 통행한다. ......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냇가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이다.”라고 견탄의 유래를 말하고, 이어서 견탄원의 건립 배경과 운영 실태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 전에는 원(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 진공(眞公)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짓고 또 길손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이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라고 하여 아마도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원이 여말에 퇴락하자 선초에 화엄대사 진공이 다시 수리하여 견탄원을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견탄원은 가장 험난한 산 속에 건립되어 통행하는 여행객들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짐승으로부터의 두려움이나 도적들로부터의 걱정을 덜어주어 공덕보은지설(功德報恩之說)의 불덕을 실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화봉원(華封院)과 민광문(閔光文)

화봉원은 문경현 북쪽 4리쯤에 있는데 속칭 초곡원(草谷院)이라 한다. 아마도 이 초곡원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원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고려시대 유희(劉曦)의 시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즉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驛)을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의 경계를 밟았다.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궁벽한 군 하나 있으니 문경이라 한다. 군 변두리에 새 원(院) 집 형세 매우 엄숙하고 작은 누각이 더욱 기관(奇觀)이라, 훌륭한 글 옛 팔영(八詠)을 압도한다.

 

아름답도다. 이 집 누가 지었는고. 그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은 민(閔)씨로다. 내가 민공 문하의 사람이었는데 이제 이 건물 창건한 것을 보고 더욱 공경하네.”라고 술회하고 있는 데에서 고려시대 초곡원은 아마도 민광문(閔光文)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곡원은 ‘찬란하게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이어’ 누각이 기관(奇觀)일 정도의 상당한 규모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상 살핀 바와 같이 문경현의 경내에는 무려 11개나 되는 원이 설치되어 행인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영남 지역과기호 지역을 잇는 조령로가 군사로,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원문출처 / http://sanbut.com/munhwa/woon.htm#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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