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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라미드의 비밀을 찾아서 (3)

호남인1 2010. 10. 17. 00:18
<척도의 기준을 찾아라>

  
▲ 대피라미드의 조감도-오른쪽에 왕비들의 피라미드와 제1태양의 배가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이 조그맣게 보인다.  ⓒ
대피라미드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나는 시기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395년부터 11세기까지의 600년 간 서유럽은 대체로 암흑시대였다. 오랜 세월 동안 특별한 접촉이 없었던 서유럽과 아랍세계는 12세기에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접촉한다. 이 시기에 동양에서 발명된 제지법, 인쇄술, 나침반과 같은 중요한 기술이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특히 나침반의 전래는 원양 항해에 대한 욕구가 드높였고, 부수적으로 따르는 과학적 연구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해 항해와는 달리 먼바다로의 항해에는 천체 관측과 해도(海圖)가 필요하므로 정밀한 천문학적 지식과 지리학, 배 위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구의 개발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되면서 활과 칼을 이용하여 전투를 하던 유럽의 기사계급이 몰락한다. 또한 화약과 대포는 유럽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포에 의해 탄환이 날아가서 폭발하자 이 현상을 실제로 분석할 필요가 생겼다.

화약의 폭발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학과 물리학이, 폭발력의 연구에서 증기 기관의 아이디어가, 포신 제작을 위해서 제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탄환의 운동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동력학이 등장했고, 이것은 수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과학 기술이 발달될수록 무게와 길이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지도를 만드는 것도 급선무였다.

수많은 학자들이 척도의 기본 단위가 적혀 있을 고문서들을 뒤졌다. 곧바로 이집트에 있는 신비의 피라미드가 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피라미드야말로 그들이 찾고 있는 도량형의 척도라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대피라미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 나폴레옹의 피라미드 전투 장면-대피라미드 앞에서 나폴레옹군이 맘루크(아랍의 토착 귀족) 군을 격파하고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적극적으로 통치한다.  ⓒ
이 시점에서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그가 이집트 연구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1798년 7월 나폴레옹의 군대는 기자의 대피라미드 부근에서 맘루크(아랍의 토착 귀족)들을 정벌한 후 함께 원정에 참가한 프랑스 학자들에게 대피라미드의 비밀을 파악하도록 요청한다. 수학자 몽즈도 이 원정대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는 대피라미드의 체적이 2,600,000세제곱미터나 되며 이것만 갖고도 프랑스의 국경을 3미터의 높이에 0.3미터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집트의 원정에 참가한 프랑스 과학자들이 귀국하여 이집트에 대한 자료를 속속 발간하자 곧바로 이집트에 대한 신드롬이 일기 시작했다. 고고학자들 간에 미라, 조각, 오벨리스크에 관한 논쟁이 붙었고, 화가들은 그림의 배경으로 이집트의 각종 풍물을 그렸다. 황실의 재봉사도 이집트 문양을 사용했으며 장인들은 가구에 스핑크스와 악어를 조각했다. 영국의 귀족 해밀톤의 10대 공작 알렉산더는 스스로 미라가 되었다.

미국 역시 그 물결을 타고 테네시 주에 하이집트의 수도와 같은 이름인 ‘멤피스’라는 도시가 생겼고 1880년에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장식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오벨리스크를 수입했다.


<현대 과학이 찾은 피라미드>
현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라는 설이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고대 이집트가 동시대의 다른 문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도의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세르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과거에 구획된 토지의 경계를 알아낼 수 없게 되는 난처한 문제에 봉착했다. 이러한 경계를 정확히 찾기 위하여 이집트인들은 모든 경작지를 선으로 구분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기하학이 생겼는데 그들은 땅을 재는 것뿐만 아니라 바다, 하늘까지 영역을 넓혔다.’

  
▲ 쿠프의 조상-현존 유일한 쿠프의 조상으로 토목 공사 중에 목이 떨어진 채로 발견되자 수십 만 톤의 모래를 채로 걸러 목 부분을 발견. 쿠프는 폭군이 아니라 관대한 지배자로 여겨짐.  ⓒ
천문학적으로 볼 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임의적으로 방위를 알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방위의 평균 오차가 3분 6초이다. 케프렌의 경우는 5분, 미케리노스의 경우는 14분이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오차는 매우 미소한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에 북쪽을 의미하는 용자리 알파별을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지와 건물의 방위로 보아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단순한 추와 조준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 베이가 측량 장비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 천 년 전부터 태양, 달, 별,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는 등 천문학에 고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태양력을 사용했다. 이집트에서 달력의 사용을 보통 기원전 4241년으로 공인하고 있으므로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를 기원전 2500년으로 볼 때 태양력이 사용된 지는 이미 1700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달을 30일로 한 12개월에 여분으로 5일을 더해 1년으로 하였다.

그들은 기원전 3000년부터 달에 기초하는 태음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매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나일 강의 홍수가 일어나는 날과 큰개 별자리 시리우스별이 1년에 1회 동트기 직전에 나타나는 것을 정확히 탐지하여 일 년이 365.25일이 되는 것도 알았고, 이 순간을 1년의 시발점으로 정하였다.

또한 피라미드 텍스트를 보면 밤 동안의 시간을 결정하는 ‘데칸’에 대해서도 나타나 있다. 천체의 1년 사이클은 10일 단위의 36면으로 나뉘는데 이것을 ‘데칸’이라고 부른다. 데칸은 하루에 7면은 보이지 않고 29개면만 보이는데, 그 중 12개면만 남중하는 순간의 시간을 가르쳐준다는 것도 이집트인들은 알고 있었다.

  
▲ 쿠프의 빈석관-쿠프의 석관은 척도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전설 때문에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정밀 측정됨. 통로보다 폭이 넓어 사전에 석관을 올려놓고 통로 등을 시공한 것으로 추측됨.  ⓒ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체적과 표면적을 계산하고 수직을 세우는 것인데 이집트인들이 그 방법도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황금비율 ф와 원주율 π에 관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ф=1.618이고 π=3.1416이다.

우선 황금비율 ф=x/b, 즉 변심거리 x와 1/2밑변거리는 x/b=1+√5/2=1.618=ф이다. 실제 x/b를 쿠프의 대피라미드에 적용할 경우 h/b=27984/22=13992/11로 거의 14/11 비율에서 겨우 8/1000 오차가 난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하여 직각삼각형인 경우 h2=x2-b2 임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b2+bx-x2=0임을 유도하면 황금비율인 x/b =1+√5/2=1.618=ф가 나온다. 원주율 π의 경우 대피라미드의 밑변 둘레 절반과 높이의 비가 π와 같다는 것이다. 즉 4b/h=4×11/14=22/7=3.1428이 된다.

경사각 51도 49분 42초는 황금비율과 관련되며 밑변 둘레의 반과 변심거리의 비인 14/11인 경사각 51도 50분 35초는 π=22/7=3.1428을 준다. 밑면 부분 대각선의 피라미드 단면의 삼각형인 9/10은 경사각 51도 50분 39초를 갖는다. 정확한 π=3.1416의 경사각은 51도 51분 14초이다. 그 당시에 정확한 π=3.1416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모두 근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 피라미드의 기하학적 구조-건축물의 경사도는 삼각함수로 알 수 있는데 피라미드마다 이 값들이 매우 다양하다.   ⓒ
또한 현실을 건설할 때 의식적으로 기하학 지식을 적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쿠프의 현실은 바닥 면적이 20×10꾸데이며 높이는 11.172꾸데이다. 이를 계산해보면 서쪽과 동쪽 긴 단면의 대각선은 15꾸데가 된다. 이럴 경우 직각삼각형의 밑변이 10꾸데이고 높이는 √5가 된다. 이 15꾸데의 대각선은 보이는 것과 같이 긴 밑변과 긴 변 대각선이 3:4:5인 ‘직각삼각형’이 된다.

현실의 위치가 밑변의 절반이 되는 곳에 있다는 것도 이집트인들의 높은 기하학 수준을 보여준다. 어느 정도 측량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어진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면적이 2배인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현실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길이 단위>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척도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고 미터기를 포함한 척도단위를 규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척도 단위는 현대 문명이 발달되는 가장 중요한 요건도 되므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단원은 알렉스 헤브라의 『눈금으로 보는 과학』(향연)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이집트인들이 토지를 측량하면서 기하학의 원리를 발견하고 꾸데처럼 재현할 수 있는 단위를 발견했다. 이 단위는 남자의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로 정의되었지만 엄밀하게 현대와 같이 길이의 단위가 확정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다.

특히 꾸데와 같은 개념은 다른 고대인들도 사용했는데 그들은 큐빗(cubit)이라는 단위를 사용했다. 『성서』의 〈창세기〉에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큐빗에 넓이가 50큐빗, 높이가 30큐빗이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대략 450×75×45피트의 크기이다.

초기에 사용된 1큐빗은 이 10½인치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2197~2178년에 라가시를 통치했던 수메르 왕 구데아의 비문에 나타난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많은 사원을 건립한 키가 작고, 뚱뚱하며, 쾌활한 늙은 난쟁이’였다. 구데아의 ‘비문에 새겨진’ 길이 표준은 그 이후 다른 큐빗들로 발전했다.

큐빗은 헤브루, 바빌론, 그리스, 로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나라마다 큐빗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18~23인치 길이로 정해졌다. 고대 그리스에서, 큐빗은 2/3큐빗(12.16인치)에 해당하는 피트(현대의 12.16인치)와 같이 쓰였다. 그들의 피트는 4팜 또는 16디짓으로 세분화되었다. 600피트는 1스타디온이 된다.

물론 이집트는 당대의 세계 중심이라는 자부심과 파라오라는 신이 다스린다는 신념에 걸맞게 척도에서도 신분의 구별이 있었다. 평민의 꾸데(6팜)와 주로 건축에 사용되었던 파라오의 꾸데(7팜, 현대 단위로는 20.6인치로 일반적으로 꾸데라 하면 이 수치를 의미함)를 사용했다.

현재 사용하는 피트/파운드/초 체계의 모태는 로마이다. 현재 피트는 12인치이지만 로마의 피트는 현대의 11.68인치에 해당하며 12유니시아에(uniciae, 부분이라는 뜻)로 나누어졌다. 5피트는 1파수스(passus, 두 걸음이라는 뜻)이며, 밀레 파수스(mille passus, 마일)는 1000파수스 또는 5000로마피트이다. 그리스에서처럼, 1½ 피트는 1큐빗에 해당했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거쳐 과학과 연구가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객관적인 표준 단위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비로소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문제는 당시의 측정의 체계는 여전히 인간의 신체 부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피트, 큐빗 등의 단위는 정확하지 않았고 지역적 편차가 컸다.

영국이 전 세계를 무대로 무역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자 척도의 중요성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1838년에 영국은 ‘영국왕립체계(British Imperial System)’의 기본 골격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미국에서 많이 사용되는 측정 체계가 이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나뉘었던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의 왕립 체계 도입을 거부했다. 그것은 다른 나라, 또는 적대적인 나라가 채택한 무게와 측정의 단위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측정 단위로 어떤 국가의 것을 채택한다는 것은 전쟁이 많은 지역에서는 매우 불리한 여건이 될 수 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각 나라들이 마차 바퀴의 크기를 독자적으로 정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전차였는데 각 나라의 전차 바퀴의 크기가 다르므로 다른 나라의 도로에서 곧바로 사용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각 나라의 전차에 맞는 바퀴자국으로 도로가 패여 있으므로 다른 나라의 전차가 도로에서 달리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로 인근 국가와 다른 크기의 마차 바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인근 국가의 마차가 자신의 국가 도로에서 신속하게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국 전차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활발히 달릴 수 없다는 것은 소위 기동력을 앞세우는 고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본 요소로 인식되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강자인 영국의 측정 단위를 대륙 국가들이 사용한다는 것은 영국의 침입을 인정하는 것으로까지 인식했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국의 피트법과는 개념이 다른 자연에 기초한 미터법이 제정된 이유이다.

<자연에 기초한 표준>
자연에 기초한 표준이라는 개념은 미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타났지만 학자들에 따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을 미터법의 창안자라고도 인정한다.

제퍼슨은 1초시(秒時) 사이즈의 고정된 막대기 진자(오늘날의 117.357인치)를 통합된 길이의 표준으로 주창했다. 이는 왼쪽에서 오른쪽 또는 그 반대로 움직이는 데 1초가 걸리는 진자의 길이에 해당했다. 더 나아가 제퍼슨은 1초시 진자의 2배 길이를 10으로 나눈 새로운 피트와, 그 피트를 다시 10으로 나눈 새로운 인치로 세분화되는 새로운 10진법적 체계도 계획했다. 제퍼슨의 인치는 오늘날의 단위로는 2.347인치가 된다.

그런데 진자 표준이 가진 기본적인 결함은 정밀한 시간 측정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진자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 오차는 그 길이의 두 배로 나타난다. 길이의 오차율은 측정 시간의 오차율의 두 배이기 때문에, 진자의 주기는 길이 표준의 정확도보다 두 배로 정확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18세기의 시계들이 너무나도 부정확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중력, 대기의 압력, 주변 대기의 온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요소들이 진자의 진동 주기에 영향을 미친다. 제퍼슨의 진자 표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인간의 신체가 아닌 물리학에 기초한 단위로 나아가는 첫 번째 시도였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단위 척도에 관한 개념을 엄밀하게 생각한다면 지구의 크기가 얼마냐는 기초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고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정의에 의할 경우 단위 척도의 기준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고 알렉스 헤브라는 『눈금으로 보는 과학』에서 주장했다.

기원전 3세기에 키레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지금의 아스완) 사이의 남북 거리를 위도상의 차이와 비교하여 지구의 크기를 계산해 냈다. 이집트의 시에네는 게자리의 회귀선에 가까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하지에는 태양이 거의 정확히 머리 위에 위치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에라토스테네스는 어떤 우물에 태양 광선이 수직으로 비추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지구 표면이 둥글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태양이 머리 위에 위치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태양 광선은 우물이나 건물에 각도 α로 비쳐질 것인데, 이는 두 도시의 위도의 차이와 같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벨리스크가 드리운 그림자의 길이를 관찰함으로써 그 각도가 7도 12분, 즉 7.2도임을 계산했다. 원은 360도이므로 지구의 둘레는 360/7.2에 두 도시의 거리를 곱해 주면 나온다.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는 낙타로 50일간 여행해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데 낙타는 대개 하루에 100스타디온을 가므로, 그 거리는 5000스타디온이 된다. 그래서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가 5000×360/7.2=250,000스타디온이라고 결론지었다. 놀라운 것은 현대의 측정값은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보다 겨우 1퍼센트 정도 더 정확하며 이후로 거의 2000년 동안 이를 능가할 계산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구의 크기에 기초한 길이 표준을 제정하기 위한 노력은 1670년에 리용의 성 바울로 성당의 교구 사제였던 가브리엘 무통(Gabriel Mouton)이 지구의 거대한 둘레(자오선)의 한 분(分)을 길이의 새로운 표준으로 정하자고 제안하기 전까지는 다시 표면화되지 않았다.

1735년에 위도 1도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하기 위한 조사단이 적도 근처로 파견되었고, 그 이듬해에 또 다른 조사단이 같은 목적으로 라플란드에 파견되었다. 그 측정 결과들은 파리에 있는 천문대와 비슷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1743년에 지금의 에콰도르에 파견된 조사단은 ‘페루 측정 단위(Toise de Perou, 적도 근처인 페루, 에콰도르 등에서 측정한 자오선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여 정한 단위라는 뜻)’를 만들었는데, 이를 현대적 미터의 효시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여하튼 미터라는 단위는 프랑스의 외무장관 겸 나폴레옹의 시종장을 지낸 탈레랑(Charles-Maurice Talleyrand)이 1790년에 무게와 측정의 보편적 체계를 연구하도록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 지시할 때부터 표면화된다. 프랑스인들은 영국과는 전혀 다른 체계를 구상했다.

그들의 기본 아이디어는 길이의 단위를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가 도출한 사분 자오선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단,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대신 덩게르크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거리를 선택했다. 두 도시 모두 해수면 높이에 위치해 있고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 위에 걸쳐 있었으며, 당시에는 0도 자오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추후에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에 그 지위를 빼앗겼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페루 측정 단위로 3피트 11.296린느에 해당하는 최종적인 미터 표준이 정해졌는데, 사분 자오선(극점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1000만분의 1이라고 생각되었다. 미터(metre)는 측정(measure)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당시의 길이 단위인 페루 측정 단위 모델은 현재 파리 천문대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학자들이 지구의 타원도를 잘못 계산했기 때문에, 이 길이는 사분 자오선의 1000만분의 1에서 0.2밀리미터가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는 1889년에 90퍼센트의 백금과 10퍼센트의 이리듐 합금(이를 ‘1874 합금’이라고 부른다)으로 새로운 미터 막대기가 만들어질 때까지 표준으로 사용되었다. 합금의 비율을 이렇게 맞춘 이유는 오랜 세월에도 안정적이며 온도에 따른 팽창이 순수한 금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1795년에 프랑스 정부는 이 새로운 체계를 합법화했다. 하지만 각 국의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각 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지역마다 전통적인 단위들을 사용했다. 영국에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파운드-피트 법을 주장하자 영국을 반대하는 국가에서는 영국의 제안을 반대하면서 자동적으로 프랑스가 제창한 미터법을 대안으로 채택했다.

결국 1875년에 미국을 포함한 17개국이 미터 조약을 체결했다. 물론 스위스의 몇몇 주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하던 1801년에 이미 미터 체계를 채택하였고, 2년 뒤인 1803년에 이탈리아의 밀라노가 그 뒤를 이었다.

미터법으로 영국의 야드(3피트)는 3600/3937미터로, 파운드는 1/2.2046킬로그램의 무게로 정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1인치당 정확히 25.4밀리미터로 약간 수정되었는데, 원래의 환산법보다 0.0000508밀리미터가 더 짧았다. 그에 따라서 피트 역시 정확히 0.3048미터로 환산되었다.

미터 체계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자연에 기초한 길이 표준으로서 미터의 지위는 오히려 사라진다. 사분 자오선의 길이는 미터 체계의 이전 체계가 목표로 했던 것처럼 정확히 100만 미터가 아니라 10,001,945.5미터다.

사실, 사분 자오선의 길이와 미터 표준 막대기 사이의 관계가 정수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수용된 재현 가능한 길이 표준의 존재인데 불행하게도 완전한 표준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매우 정교한 장비로 과거에 제작된 미터기를 정기적으로 점검해 봤더니 1/1000밀리미터 단위로 오차가 발생한다는 것이 발견됐다. 이것이 <미국국립표준국>으로 하여금 1미터를 방사성 동위원소 크립톤-86으로부터 방출되는 주황색 광선 파장의 1,650,763.73배의 길이라고 다시 정의하게 된 이유이다.

현재는 1983년에 프랑스 계량기검사협회(CGPM)가 도입한 ‘진공 상태의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거리’라는 새로운 정의를 채택했다. 즉 길이에 시간이 수반되는 것이다. 이것은 제퍼슨의 아이디어가 전적으로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퍼슨이 제안한 시간이 포함된 길이의 표준 개념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수치에만 관심>
  
▲ 현실 구조도-고대 이집트 인들은 상당한 수학적 지식과 기하학을 숙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
이집트로 돌아간다. 수많은 피라미드들을 건설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식이 현대 척도가 태어나는데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그들이 숙지한 기하학은 경험적인 수치 단계를 넘어서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피라미드의 경사각을 예로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측정된 다양한 경사각을 삼각함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① tg.α=h/b=17/18, 7/6, 6/5, 5/4, 14/11, 4/3, 7/5, 3/2, 14/9, 2/1
② tg.β=h/d=2/3, 14/17, 6/7, 8/9, 9/10, 1/1

만일 피라미드 건축에 높은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적용됐다면 다양한 경사각이 아니라 일률적인 값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반면에 이집트인들의 과학 수준이 현대로 보아서 매우 초보적인 단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취한 업적은 그야말로 놀랄 만하다. 고도의 수학이 아니라 간단한 산수, 그것도 더하기와 빼기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은, 곱하기와 나누기는 더하기와 빼기를 갖가지로 활용하여 얻었다. 가령 21에 25를 곱할 경우 다음에 표시하듯이 우선 21을 배로 하고 다시 그것을 배로 해나갔다.

1=21, 2=42, 4=84, 8=168, 16=336

이렇게 배로 한 회수를 더한 수가 곱수인 25가 될 때까지 계속한다. 21을 16배 한 수와 8배 한 수, 1배를 한 21을 합하면 25가 된다. 여기에서 오른쪽 수 336, 168, 21을 합하여 정답인 525를 얻는다.
나누기도 비슷한 방법으로 했다. 49를 8로 나눌 경우 우선 나누는 수를 배로 한다.

1=8, 2=16, 4=32, 8=64

다음에 그들은 시행착오 끝에 2배와 4배를 한 수를 합하면 49에 가장 가까운 수인 48이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서 정답 6과1/8을 구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인에게 분수는 언제나 장애가 되었다. 그것은 분자가 1이 되는 분수, 즉 단위분수(單位分數)밖에 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간단하게 13/16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은 1/2+1/4+1/10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수를 무한히 배로 해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곱하기를 하고 있는 셈이며, 또 단위분수를 사용하는 것은 전체에 대한 부분이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과정 속에 숨어 있는 기본 원리나 간단한 계산 방법을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집트인들의 수학이 초보 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한 것은 추상적인 이론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실용적인 면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조사의 결론은 간단하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은 풀어야 할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면 가장 적절한 경험상의 지식을 적용하거나 변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새로운 지식에 대해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출처 : 만다
글쓴이 : 티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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