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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라미드의 비밀을 찾아서 (1)

호남인1 2010. 10. 17. 00:13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 유역에서 발달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다. 구석기시대 말인 약 1만 2000년 전부터 기상 변화로 인해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가자 사람들은 나일 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나일 강은 해마다 범람하여 처음부터 사람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관개 기술을 습득했다. 또한 자연 현상에 기초한 그들만의 신화를 창조해 나가면서 후세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문명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집트가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집트보다 먼저 선진 문명을 갖고 있는 지역이 여러 곳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다른 문명에 비해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아직도 4천 년 이상 오래된 거대한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 기자의 3대피라미드  ⓒ
그 중에서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는 피라미드는 압권이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어의 ‘pyramis’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것은 기제에 있는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깨로 만든 의식용 과자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음성학적으로 ‘m′r’ 또는 ‘mer’로 표현했으며 피라미드 형태를 상징하는 상형문자로 그렸다.

지난 수세기 동안에 사막의 유목민들은 피라미드에 도착하기 수 일 전부터 아득히 멀리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물을 볼 수 있었다. 지평선 상에 자그마한 삼각형으로 보이지만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피라미드는 점점 더 완벽한 기하학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쿠프의 대피라미드(이하 대피라미드는 쿠프의 피라미드를 뜻함)의 바닥 면적은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중량으로 거의 7백만 톤의 돌을 사용했다는 얘긴데 1천 톤의 열차 7천 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피라미드를 보자마자 놀라는 사람들은 곧바로 의문에 잠기게 된다.
신석기시대를 막 거친 고대 이집트인들이 왜,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기념물을 건설하였을까? 바퀴도 발명되지 않았고 말이나 노새 등 하역 동물도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의 밑변이 0.1퍼센트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대형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썰매와 끌기 위한 밧줄, 도르래, 미끄러져 내리기 쉬운 진흙과 경사로를 만들기 위한 벽돌 등 모든 도구와 재료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학자들이 거대한 피라미드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문명이 없었던 4500여 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발전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라미드에 ‘척도의 기준’이 들어있다는 말도 있고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킨 것이라는 설명도 전해져 많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피라미드를 철저하게 연구하도록 유혹했다.

또한 피라미드를 둘러싼 인간들의 속물근성에 따른 호기심도 피라미드 신드롬을 부채질하는데 기여를 했다. 피라미드를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 만들었으며 피라미드에는 신비한 ‘피라미드 파워’가 존재한다는 말도 있다. 피라미드에 대한 환상을 부채질한 것은 대피라미드 안에 아직도 엄청난 보물이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까. 피라미드에 숨어있는 과학 및 신비에 관하여 다섯 회에 걸쳐 설명한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

피라미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역사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각과 생활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신관 마네토가 분류한 31왕조 방식을 따른다. 그는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르메르부터 이집트 출신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 2세의 죽음(기원전 343년)까지를 기록했다. 그가 기술한 이집트 역사는 그가 태어나기 2700년 전부터의 이야기이므로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이 있지만 그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상하 이집트로 나뉘었던 이집트는 기원전 3200년경 전설적인 나르메르 시대에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트리니트 왕국: 1, 2왕조). 그 후 기원전, 2780~2280년까지의 500년간을 ‘고왕국’이라 하며 이 시대의 제3왕조에서 제6왕조까지를 이집트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피라미드 혹은 파라오 시대라고 한다. 유명한 이집트 기제 피라미드 및 스핑크스도 이 시대에 건조되었다.

제6왕조 이후 분열이 계속되어 기원전 2060년부터 중왕국을 이루다가 기원전 1700년경 제13왕조 때 말과 철을 사용하는 기마군단 힉소스인에게 점령당한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점령을 당한 것이다. 정복자인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에 동화되어 이집트화되었고 이집트인들의 끈질긴 독립 운동으로 물러나게 된다.

기원전 1550년부터 기원전 1070년까지를 ‘신왕조’라고 부른다. 아부심벨 신전을 건설한 람세스 2세, 영국인 카터에 의해 인류 최대의 유산이라고 불리는 황금관, 황금 마스크가 발굴된 투탕카멘의 묘, 이집트 철학 및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이크나톤, 최초의 통치 권력을 가진 하셉수트 여왕 등이 모두 이 왕조에 포함된다. 이 시대는 이집트 최후의 번영기, ‘신왕국’ 혹은 ‘제국시대’라고 불린다.

그 후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지배 하에 있다가 기원전 6세기 말에 페르시아에 점령당한다. 기원전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인들을 축출하고 이집트를 차지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그의 방대한 영토는 부하들에게 분할되는데, 우여곡절을 거쳐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로 돌아간다. 그가 이집트의 최후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이다.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51~30년)로 기원전 31년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였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이집트를 로마의 한 주로 편입한다. 이로써 3200년간 31왕조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이집트를 방문하여 피라미드나 거대한 기념물을 보고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압제에 억눌린 사람들이었다고 상상하기 쉽다. 죽음의 관념에 항상 사로잡혀 있고, 감독자의 난폭하고 잔인한 채찍 밑에서 평생 거대한 돌덩어리를 끌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그릇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가축의 사육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들은 소, 개, 염소, 고양이 등 모든 동물을 신성시하여 미라를 만들기도 했다.  ⓒ
이집트인들은 인생을 즐긴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또 수많은 고대 민족 중에서도 가장 근면한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이자 지배자인 파라오의 지배 하에서 이집트인들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나쁜 생활이 아니었다. 3200년 역사 동안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으나 평소의 생활은 대체로 평온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고대 민족들에 비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근심도 적었다.

고대 이집트의 농부는 노예가 아니었다. 파라오나 귀족, 신전의 신관을 위해서 땅을 경작하기는 했지만 신분은 자유로운 소작인이었다. 수확한 작물 대부분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나머지를 자신의 몫으로 사유화할 수 있었고 절약한 작물로 사후에 가지고 갈 인형(우샵티 혹은 샤웁티)이나 일상용품 등을 물물 교환할 수 있었다(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하기 전까지 화폐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의 계급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대를 내려가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가계에서 파라오가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며,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나온다. 벽돌공이나 상형문자를 새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되었다.

파라오 가문에서 파라오가 세습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파라오가 임명하는 재상이나 장군도 한 가문에서 계속 이어받는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파라오는 언제든지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을 재상이나 장군으로 임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앞에 정해진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려고 했다.

  
▲ 우샵티, 이집트인들은 내세를 믿었기에 사후에 노동을 대신할 우샵티나 샤웁티를 지참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이집트인들은 언제 사망하더라도 이들을 살 수 있는 현물을 지니고 다녔다.  ⓒ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파라오는 파라오며, 재상은 재상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놀이도 한다. 그들이 먹을 식량도 재배하여야 하고 물고기나 가축도 길러야 한다. 죽어서 신하나 하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살아서 대우를 잘해주어야 한다. 공연히 제도적인 틀을 바꿈으로써 잡음을 내어 신하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파라오의 선조가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더구나 관례적인 모순을 타파하여 파라오나 고관이 되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쿠데타나 세습 제도의 변경은 중요 사항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죽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세계의 중심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바로 세계인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문명을 본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따르려고 노력하였으므로 그들이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다른 문명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집트의 찬란했던 고대 문명이 과거만을 되씹는 문명으로 자리 잡게 되자 더 이상의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 스스로 자신 앞의 높은 벽을 깨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역사>

이집트의 피라미드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기제에 있는 3개의 피라미드를 연상하는데 이들은 이집트의 제 4왕조(기원전 2613~2494)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140여 개의 대?소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으며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도 80여 개가 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다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먼저 피라미드와 깊은 연관이 있는 미라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미라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인공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이다. 물론 고대 이집트가 유일하게 미라를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 미라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므로 미라 하면 거의 모두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연상하게 된다.

  
▲ 마스터파, 피라미드의 기원인 마스터파는 왕족이나 고관의 무덤으로 지하에 미라를 안치했다.  ⓒ
왕조 시대 이전의 고대 이집트에선 사망한 사람들을 사막의 약간 깊은 구덩이에 놓고 모래로 덮어 매장했다. 그러면 건조한 공기와 더운 모래 때문에 시신은 급속히 탈수되어 수의가 썩기도 전에 자연적인 방법으로 완전하게 보존 처리가 되곤 하였다. 이렇게 매장된 미라를 우연히 발견한 이집트인들은 죽은 후에도 살아가려면 시신 보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던 원시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차츰 커다란 무덤을 만들고 관을 사용하자 시신이 모래와 직접 접촉하는 자연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미라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던 미라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시신을 영구히 보관하는 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공들여 사자(死者)를 미라로 만들고 모래나 자갈로 커다란 봉분을 만들었음에도 끊임없이 불어 닥치는 사막의 바람이 무덤을 파괴하거나 자칼 등의 동물이 돌을 파헤쳐 시체들을 훼손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용도로 개발된 것이 진흙 벽돌로 상부가 평평하고 옆이 경사진 무덤 마스타파였다. 피라미드의 기원이 되는 마스타파란 현대 아랍 말로 ‘벤치’라는 뜻의 직사각형의 묘로서, 무덤 모양이 이집트인들의 집 앞에 놓여 있는 흙벽돌로 만든 벤치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마스타파 무덤들은 아비도스, 나카다, 사카라, 기제, 메이둠, 아부시르 등지에서 발견된다. 초기의 마스타파들은 암반을 파고 내려가서 매장실을 만든 다음 장례가 끝난 뒤 천장을 나무 등으로 메우고 그 위에 흙벽돌로 직사각형의 언덕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큰 마스타파가 만들어져 지상 또는 지하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고 그 중 한 방에는 죽은 사람의 미라를 안치했고 다른 방에는 사자를 위한 물건들을 넣었다.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것도 나타났는데 마스타파를 다 만든 다음에 매장하기 쉽도록 매장실로 통하는 계단식 통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 마스타파는 곧 피라미드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 조세르 피라미드, 제3왕조 두 번째 왕인 조세르는 연마된 돌을 사용하여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지하에서 무려 4만여 개의 병과 돌식기들이 발견되었다(사진 raju35)  ⓒ
제1왕조(기원전 3,000년경)의 파라오 중에는 가까운 사막의 절벽에서 절개한 석회암을 묘혈(墓穴, 무덤 구멍) 바닥에 깔았고 제2왕조의 파라오는 묘실 내부 전면을 석회암으로 두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곧 석회석들을 대규모로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세계 최초의 돌로 된 피라미드는 사카라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 제3왕조(기원전 2,600년경) ‘죠세르’ 시대에서 시작되었다.

죠세르는 제3왕조 두 번째 왕인데 연마된 돌을 사용한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제4왕조의 스네프루는 쿠프의 아버지로 피라미드의 전형을 세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반적으로 3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이루어 놓은 피라미드의 건설 방법을 토대로 이집트의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건설될 수 있었다.

스네푸르를 상속한 쿠프(기원전, 2551~2528년) 때부터 피라미드의 석조술은 더욱 발전하여 쿠프, 케프렌, 미케리노스의 3대 피라미드가 세워진다. 소위 기제의 3대 피라미드로 카이로(카이로 이름은 기제에서 따왔다) 교외에 있으며 이 중에서 쿠프의 피라미드가 가장 크며 피라미드의 비밀이나 신비, 과학성을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기제의 대피라미드라 불리는 쿠프의 피라미드가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로 이 글에서도 대피라미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중세 시대에 카이로와 기제의 건물을 짓기 위해 무분별하게 석회암으로 된 외부 피복이 벗겨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일명 파라오의 현실(玄室)에는 반암으로 된 대형 석관이 비어 있는 채로 놓여 있다. 현실 안의 보물들은 모두 도굴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도 피라미드 안에 있는 다른 공간에 부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장례를 집전하는 계곡의 신전은 나스레 엘 시만 마을 아래에 묻혀 있으며 앞으로 대대적인 발굴이 계획되고 있다.

쿠프의 아들(동생이라는 설도 있음)인 케프렌(기원전, 2520~2494년)은 쿠프와 비슷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214.5×214.5미터의 바닥 면적에, 높이는 143.5미터, 경사각은 53도 7분 48초이다. 이 경사각은 직삼각형 3:4:5 비율을 사용한 것이다. 케프렌의 피라미드는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약간 높은 지면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원래 높이는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3미터 낮지만 더 높게 보인다.

일반적으로 두 번 째 피라미드라고 불리며 아직도 반들반들한 외피가 정상 부분에 있어 현존하는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케프렌의 ‘계곡의 신전’은 스핑크스 옆에 있으며 어떠한 장식도 없다. 각 방의 벽체는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시공되었으며 바닥은 알바트르 석재로 되어 있다. 계곡의 신전에서 발견된 디오리트 석재로 된 케프렌 조상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조상 중 하나다. 케프렌의 피라미드는 1000년 전 아랍인들에게 약탈당했는데 그들이 침입했었다는 낙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미케리노스(기원전, 2494~2472년)의 피라미드는 쿠프와 케프렌의 피라미드에 비하여 10분의 1 규모밖에 안 될 정도로 매우 작다.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는 그 높이의 3분의 1까지 시공하기 매우 어려운 화강석으로 피복되었다. 내부의 하향 경사로와 시신이 있는 현실도 화강석으로 되어 있지만 석재들이 다듬어져 있지 않고 난삽한 것이 많아 졸속하게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라미드 건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13왕조까지 지속되었으나 대형 피라미드들은 사실상 제4, 5왕조(기원전, 2475~2323년)를 포함하여 500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그 후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땅에 떨어지고 실질적인 지배자로 지방 제후들이 등장하면서 수난을 당한다. 파라오의 권위가 떨어지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피라미드가 조직적으로 약탈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대에 들어서 도굴은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는 자신이 건설하는 피라미드의 부장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라오가 직접 선대의 피라미드를 공개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도굴되었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도 기원전 2000년 이전에 약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피라미드 건설이 쇠퇴한 또 다른 이유는 비실용적이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미라를 영구히 보존하는 데도 문제점이 발견되었지만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하여 엄청난 대지 면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테베의 신왕국은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경작지를 전용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미라를 영구 보관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나일강 서쪽 절벽 밑의 바위를 파고 현실을 만들어서 매장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무덤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외부에 남겨놓지 않았다.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멘 파라오를 제외한 모든 무덤이 도굴되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

  
▲ 피라미드 배치도, 대피라미드의 조감도로 오른쪽에 왕비들의 피라미드와 제1태양의 배가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이 조그맣게 보인다.  ⓒ
쿠프의 대피라미드 규모는 이집트 정부가 1925년에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대피라미드의 바닥면 길이는 남쪽 면 230.45미터, 동쪽 230.39미터, 서쪽 230.36미터, 북쪽 230.24미터이다.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146.60미터로 확인됐고 기울기는 51°52′였다.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되었으며 무게가 거의 700만 톤에 달한다.

피라미드의 내부는 건설 중에 최소한 두 번은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것은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 왕이 죽을 경우에 대비해서 두 개의 묘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면 상향 경사로와 하향 경사로로 나뉘는데 각도는 똑같이 26도이다. 하향 경사로 마지막에 첫 번째로 계획된 장례방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지표면에서 약 30미터 하부에 있다.

이 장례방이 완성되기 전에 더 이상 공사를 하지 않고 제2의 장례방을 건설하기 시작한 듯하다. 이른바 왕비의 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하로부터 21미터 높이에 있으며 10꾸데(이집트의 척도 단위로 약 52.4센티미터)의 길이로 천장은 궁륭으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수평 갤러리와 대회랑이 연결되는데 이 갤러리는 장례 후에 화강석의 틀어막기로 차단하게 되어 있다.

대회랑은 돌출부가 있는 높은 천장으로 길이 46미터, 폭 1.2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높이는 8.5미터나 된다. 이 회랑을 거쳐 허리를 구부려야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복도의 끝에 입구를 폐쇄하기 위한 용도의 공간이 있다. 이것은 상향 통로를 경사지게 하여 화강석 석재가 미끄러져 내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대회랑을 따라가면 세 번째 방인 파라오의 현실에 도달하는데, 현재는 뚜껑이 없이 비어 있는 석관만 남아 있다. 쿠프의 현실은 지상 42미터 높이에 만들어져 있다. 현실의 입구는 좁은 통로이므로 쉽게 막아버릴 수 있다. 현실 자체는 폭 5미터, 길이 10.5미터, 높이 6미터인데, 천장은 총 중량이 400톤에 이르며 9개의 석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보다 특이한 것은 천체창이 있다는 것이다. 1638년 영국의 수학자 존 그리브가 길이의 척도가 대피라미드에 숨겨져 있다는 믿음을 갖고 대피라미드 안을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쥐들이 살고 있었다. 낯선 인간들이 대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오자 박쥐들이 공격을 해왔지만 총을 쏘면서 박쥐를 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윌리엄 해리는 박쥐들이 살고 있는 것을 근거로 대피라미드 내에 외부와 통하는 구멍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추측은 옳았다.

대피라미드의 현실에는 남쪽과 북쪽으로 높이 20센티미터, 폭 22센티미터의 환기 구멍이 있다. 미국의 천문학자 트림블은 남쪽의 환기 구멍이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의 오리온자리 세 별에 정확하게 조준되어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을 근거로 환기 구멍이라기보다는 천체창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실제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에서 완성된 천체창은 쿠프의 대피라미드에만 있다. 왕비의 방이라고 알려진 곳에도 천체창이 있으나 미완성이며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천체창을 계획하기는 하였으나 완성하지는 않았다.
출처 : 만다
글쓴이 : 티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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