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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라미드의 비밀을 찾아서 (5)

호남인1 2010. 10. 17. 00:23
▲ 투모세스 4세의 석비-투모세스 4세는 원래 파라오가 될 자격이 아니었으나 스핑크스를 덮은 모래를 파주었기 때문에 파라오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
‘목소리는 하나인데 다리는 넷도 되고 둘도 되고 셋도 된다. 지상에스든 하늘에서든 바다에서든 이것보다 천변만화하는 것은 없다. 이것은 다리가 가장 많을 때 힘이 가장 약하고 걸음도 가장 느리다.’

오이디푸스에게 스핑크스가 낸 문제이다. 오이디푸스가 ‘사람’이라는 정답을 내자 스핑크스가 자살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대형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사자의 몸통(태양신과 동일시됨)과 사람의 얼굴이 결합된 기자의 스핑크스는 ‘교살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이며 원래 이집트어로는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의미의 셰세프 안크이다. 이 말은 조각을 뜻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스핑크스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근동(유럽에 가까운 동방의 여러 나라가 있는 지역, 터키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고대인들이 꿈꾸던 피조물 중 가장 완벽한 상상의 동물을 숭배하였다. 그 동물은 사자의 앞부분, 황소의 뒷부분,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구성되어 있는 스핑크스였다. 이 중에서 기제에 위치한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사람의 얼굴이 결합된 형태이지만 날개는 없다. 그리스에도 스핑크스가 있는데 주요한 차이점은 초기 이집트 스핑크스는 중왕국 시대까지 언제나 남성이었다는 점이다(중왕국 시대에 처음으로 날개를 단 스핑크스가 등장했다).

스핑크스는 쿠프 파라오가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채석장을 개발하는 도중에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회석으로 된 바위의 언덕 형태가 동물이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과 비슷하므로 조각가가 이 바위 언덕의 천연적인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고 스핑크스 조각의 영감을 얻었으리라 보는 것이다. 즉 천연적으로 동물 모습을 한 바위 언덕을 길이 73미터, 폭 11.6미터, 높이 20미터의 엎드려 있는 거대한 사자 형태와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정리한 것으로 스핑크스는 고대세계가 건축한 현존하는 최대의 조각상이다.

〈스핑크스의 모델〉
정통적인 학설에 의하면 스핑크스를 만든 파라오는 쿠프의 아들인 케프렌이다. 케프렌이 스핑크스를 만들었다는 것은 스핑크스의 거대한 발톱 사이에서 발견된 10여 개의 비석 때문이다. 이 비석들은 스핑크스 신인 하르마치스를 경배하기 위해서 파라오들이 세운 것으로 그 비석 중에 하나에는 투트모스 4세(기원전 1415년경)가 파라오가 된 경위가 적혀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스핑크스는 사막의 모래로 여러 번 뒤덮였다. 그래서 매번 스핑크스를 덮었던 모래를 파내야 했는데, 투모시스가 왕자일 때 사냥에 나갔다가 스핑크스 근처에서 잠깐 졸 때, 스핑크스(하르마치스)가 꿈에 직접 나타나서 말했다.


‘나를 보아라.
나의 아들아. 투트메(Touthmes)
나는 너의 아버지인
하르마치스-케프리-레-아툼(Harmakhis-khepri-re-atoum)이다.
나는 너에게 네가 살고 있는 대지의 왕국을 주겠다.
너는 이 왕국의 후계자로서 겝(keb)왕관에 흰색과 붉은 색(상‧하 이집트 통치하는 파라오의 왕관을 뜻함) 관을 쓰게 될 것이다.
두 왕국의 음식물과 국민들도 오랫동안 너의 것이 되리라.
나의 몸과 소망은 너에게로 향하여 있다.
너는 앞으로 나의 보호자가 되어라.
사막의 모래가 나를 덮고 있어 온 몸이 고통을 받고 있다.
나에게 다가 오너라, 나의 아들아.
너는 나의 기대이며 나는 너이고 너의 안내자다.’


 
▲ 케프렌의 조상-스핑크스의 건립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 조상을 발견할 때 조상이 살아있는 것 같이 사실적이라 인부들이 모두 도망갔다고 한다.   ⓒ
투모시스는 원래 파라오의 계승자가 아니었음에도 스핑크스의 계시에 따라 스핑크스를 덮고 있는 모래를 파 주었기 때문에 그 후 파라오가 되었다는 것이 스핑크스에 대한 정설로 내려온다. 비석 안에 하르마치스-케프리-레-아툼이란 이름에서 케프리 즉 케프렌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고 추정한 것이다. 특히 부근의 신전에서 유명한 케프렌의 조각상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이런 가설이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이 명문을 근거로 하여 스핑크스가 케프렌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텍스트는 단지 투모시스 4세가 스핑크스를 보수 작업했다는 사실만 뒷받침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선 스핑크스와 케프렌 파라오의 조각상의 얼굴이 다르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1993년 웨스트는 프랭크 도밍고에게 두 조각상을 면밀히 검토해 줄 것을 의뢰했고 도밍고는 두 인물의 동일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경찰의 표준적인 검사법을 사용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린 여러 장의 그림과 도표 및 측정치를 재검토한 후 나는 최후 결론이 당초 짐작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두 얼굴상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전면에서 본 모습의 비율과 특히 측면에서 본 각 부위의 비율을 검토한 결과 나는 스핑크스가 케프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케프렌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많은 증거들이 남아있다. 우선 스핑크스 뒤에 제4왕조의 왕인 쿠프, 케프렌, 미케리노스가 건설한 세 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스핑크스 앞발 전면에는 제4왕조 때 건설된 ‘스핑크스 신전’이 있다.

케프렌의 피라미드 바로 앞에 신전이 위치해 있는데 이 신전에서 시작된 석회암 둑길은 스핑크스를 둘러싼 담장의 한 모퉁이로 뻗어있고 배수로는 스핑크스 주변의 구덩이로 연결되어 있다. 케프렌의 둑길과 스핑크스의 담장은 동시에 설계되고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 스핑크스와 쿠프의 피라미드   ⓒ
반면에 일부 이집트 학자들은 스핑크스가 쿠프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핑크스가 이제까지 알려진 쿠프 시대에 건설되었을 가능성은 독일의 슈타들만 박사가 제시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 부근의 한 신전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쿠프가 스핑크스의 고리와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누구의 얼굴이 스핑크스와 유사한지에 대해서는 바르크스와 같은 법의학자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의 결론은 웨스트의 주장과 완전히 달랐다. 쿠프와 케프렌의 얼굴로 알려진 조상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쿠프의 얼굴은 스핑크스의 얼굴과 많이 다르다고 결론지었지만 케프렌의 귀와 아래턱 부분이 스핑크스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흥미 있는 것은 스핑크스의 턱이 후대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스핑크스에서 떨어져 나온 턱수염이 있는데 이것은 땋은 턱수염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제4왕조에서는 파라오의 턱수염으로 쐐기모양 턱수염을 했고 땋은 문양을 한 것은 제4왕조보다 약 1000년 후부터 사용되었다.


<스핑크스는 또 다른 문명이 건설>
스핑크스를 건설한 이유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추측된다.
첫째는 스핑크스 자체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다 주는 경외의 대상이며 의학과 인체에 대한 비밀을 갖고 있어 건설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핑크스가 인간에게 생과 사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므로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여 쿠프 또는 케프렌이 자신의 피라미드를 보호할 목적으로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세 번 째 설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제출된 세 가지 가설은 기존 이집트학의 통설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우선 1991년 미국의 지질학자인 로버트 쇼크, 토머스 도베키 교수 등은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케프렌보다 훨씬 선대인 기원전 7000년 혹은 그 이전에 스핑크스를 축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는 미국의 몽타주 전문가인 프랭크 도밍고가 제기한 가설로 스핑크스의 얼굴은 케프렌 파라오를 모델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카이로 박물관에 있는 케프렌의 조각상과 스핑크스의 얼굴을 세부적으로 대조했다.

마지막으로는 에이드리언 보발이 제기했다. 그는 첨단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기원전 1만 500년 무렵 춘분 아침 사자자리가 스핑크스의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랐을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사자 모양의 스핑크스가 이러한 천문학적인 발견을 의미하는 증거품으로 건설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보발과 그레이엄 핸콕이 공동으로 저술한 『신의 지문』과 『창세의 수호신』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통에 스핑크스가 전통적으로 알려진 시대인 기원전 2500년경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기 전인 기원전 1만 500년 무렵에 조각되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도 생겼다.

세계 4대 문명 중에 하나인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200년경에 비교적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시기에 도시, 신전, 상형문자, 탁월한 미술 등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가 로마에 멸망하기 전까지 약 3천 년간 이집트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스핑크스가 쇼크의 주장처럼 기원전 7000년에 건설되었거나 보발의 추정처럼 기원전 1만 500년 이전에 조각되었다면 그것을 누가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제일 먼저 제기된다. 그 해답이 밝혀진다면 세계 문명사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주장들은 이집트 최초의 기록보다 수천 년 앞선 시대에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정도로 잘 조직되고 부유한 미지의 또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나 오래되어 완전히 잊혀 진 또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살아오게 하는 여운을 남긴다. 사실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를 조정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아틀란티스와 같은 문명이 빙하기 동안 남극대륙에 실존했다는 증거로도 이용해왔다.


〈스핑크스 건축연대를 조정하자〉
 
▲ 스핑크스의 시대별 건설 부분 내역-스핑크스는 여러 번 보수되었으며 현재 인근에서 지하에 기록의 방이 있다는 설이 있다.  ⓒ
고대문명사에 있어 가히 핵폭탄을 터뜨린 것과 같은 쇼크와 보발의 주장은 불가사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특히 쇼크와 보발같이 새로운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여 기존 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더욱 재미있는 일이다. 새로운 주장이 어떤 내용인지 먼저 설명한다.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를 둘러싼 논쟁은 아마추어 이집트학자인 존 앤터니 웨스트로부터 발단이 되었다. 그는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의 실존설을 주장하면서 먼 옛날 화성에 존재했던 문명이 지구의 여러 고대문명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고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일반적인 생각보다 과학적으로 훨씬 발전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집트인들이 또 다른 선진문명으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슈발레르 드 뤼비크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하나의 위대한 문명이 이집트를 휩쓸었던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우리는 기자의 서쪽 암벽에 조각된 스핑크스가 홍수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사자 형상인 스핑크스의 머리 부분을 제외한 몸통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물의 침식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뤼비크의 글을 읽은 웨스트는 스핑크스 몸통에서 발견되는 심한 침식이 일반적으로 이집트 학자들의 견해인 바람과 모래에 의한 침식이 아니라 세차게 흐르는 물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이집트의 기록된 역사시대에 심한 홍수를 일으킨 강우현상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모순점은 있지만 웨스트는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다. 스핑크스에 대량 침식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홍수를 기원전 9000년 무렵 빙하기 말에 빙상이 녹을 때라고 올려 잡은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파라오시대 이전에 나바티아 우기라고 부르는 훨씬 습한 기후가 이집트에서 기원전 1만 5000년부터 기원전 5000년 사이에 간헐적으로 폭우를 특징으로 하는 습윤 기간을 겪었고 그 후로는 건조기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웨스트는 장기간에 걸친 침식을 감안할 때 스핑크스의 건축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7000~5000년 사이라고 추정했다.

빙하시대의 침식 시대까지 스핑크스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현대 문명사회의 연대에 관한 기존 통설을 뒤엎어야 하지만 웨스트는 오히려 그 사실에 고무되었다. 웨스트는 지질학자인 로버트 쇼크 교수를 설득하여 함께 이집트를 방문한 후 스핑크스 침식의 일차적인 요인은 심한 장마가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선 스핑크스가 비의 침식을 받은 암석의 특징인 물결 모양의 침식현상을 발견했다. 또한 스핑크스 둘레의 수로에도 비에 침식한 것과 유사한 형태를 발견했다. 반면에 기원전 250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기자 고원의 다른 유물들은 스핑크스와는 달리 모가 난 침식현상을 보인다고 기염을 토했다.

또 인공 지진을 일으켜 지질 구조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핑크스 서쪽, 즉 후면의 석회암은 표면에서 1.2미터 깊이까지 풍화를 겪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1.8~2.4미터로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기존의 주장처럼 스핑크스가 기원전 2500년에 축조되었다면 피라미드와 풍화 정도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측면과 전면을 먼저 만들고 후면은 나중에 건조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처음의 건조 시기는 풍화 정도를 감안할 때 기원전 5000년 이전이어야 한다.

스핑크스의 모자와 장식을 포함한 스핑크스의 머리는 이집트 파라오 시대의 전형적인 이집트 양식인 것도 웨스트는 말끔한 해석을 펼쳤다. 그는 머리 부분이 케프렌 시대에 다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스핑크스의 머리가 몸통에 비해서 불균형적으로 작고 머리 부분의 침식 흔적이 훨씬 적은 이유도 후대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핑크스를 건설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쇼크가 기존 통설과는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근동지역에서 기원전 7천년 경에 농업이 시작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이미 건설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는 기원전 7000년에 이미 방어벽을 세웠고 나선형 계단이 설치된 거대한 탑도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고대인들이 스핑크스와 같은 대규모 건축물을 건설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쇼크는 근동지역에서 고대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이 이집트에서도 번영했는데 그들이 스핑크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크나 보발의 스핑크스 건립 연대를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정통학자들의 반박도 매우 구체적이다. 톨레도 대학교 지질학과 교수인 제임스 해럴 박사는 쇼크가 강우현상으로 생겼다는 침식은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핑크스는 상당 기간 동안 모래로 덮여 있었다. 투모시스 4세 역시 여러 세기 동안 모래 속에 잊혀져 있던 스핑크스를 파내야 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가 상당 기간을 젖은 모래에 묻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래 속의 습기가 화학적인 침식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나일 강으로부터 젖은 모래나 불어난 물이 밀려와 스핑크스가 침수되어도 같은 효과를 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고왕국 시대의 강우량만으로도 침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더구나 현재도 침식의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해럴 박사보다 먼저 쇼크의 가설을 반박했던 가우리 박사가 주장했다.


‘기자 지역에서 밤에 공기가 차가워지면 암석 표면에 이슬이 맺혀 석회암의 미세한 구멍 속으로 스며들어 암석의 염분과 결합하여 용액이 만들어진다. 해가 뜨면 습기가 증발하는데 염분용액은 결정화되어 미세한 구멍의 벽에 압력을 가한다. 암석 표면에 금이 가고 작은 석회암 조각이 염분 결정체의 압력에 밀려 표면에서 떨어져 나간다.’


가우리 박사는 폭우로 인한 홍수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스핑크스 측면의 파도 모양 무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즉 스핑크스의 몸통을 이룬 암석은 성분이 약간 다른 세 가지 석회암 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른 석회암층은 내무 구멍의 기포가 더 크며 염분의 결정화로 인해서 더욱 빨리 침식된다. 파도 모양의 무늬는 강도가 다른 석회암층의 침식 속도 차이로 생긴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쇼크는 스핑크스의 담장 내부에 있는 깊은 수로를 폭우의 또 다른 증거로 간주했다. 그러나 가우리는 이 수로들이 스핑크스가 조각되기 수백 만 년 전 지질시대에 지하수가 만든 작은 동굴들이라고 지적한다. 스핑크스 주변에 배수로를 팔 때 이 동굴들이 드러난 것이므로 스핑크스의 제작 연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스핑크스의 침식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천 년의 기간이 추가로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결국 스핑크스의 건축연대를 뒤로 물려야 한다는 주장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구나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경의 이집트에는 고도의 문명이 있었던 증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쇼크나 보발은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시기가 너무나도 오래 되어 지금까지 발굴된 장소보다 깊은 곳에 매몰되어 있거나 미지의 장소에 있다고 주장한다.
스핑크스가 기원전 2500년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집트 문명 이전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고대 왕조 이전의 이집트인들이 사냥과 채집 위주의 원시생활을 하였다는 지금까지의 대전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스핑크스 전문가인 시카고 대학교 마크 레너 교수는 석회석의 풍화와 같은 한 가지 현상에 입각해 이집트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펄쩍 뛴다. 그러나 페트리나 마에스페로 같은 유명한 이집트학자들도 스핑크스가 스핑크스의 보호를 받고 있는 피라미드보다 연대 상 훨씬 앞선다고 주장한 바 있어 스핑크스의 축조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피라미드의 건조 연대가 전술한 학자들의 주장처럼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현재 정설로 알려진 연대보다는 더 오래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프랑스과학협회 회장이었던 장 케리셀을 비롯한 학자들은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비롯하여 이집트에 산재한 다른 피라미드들의 석회석과 진흙으로 된 회반죽 모르타르를 연구하였다.

이집트인들의 회반죽용 재료는 천연 석고를 장작불로 태워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나무재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반죽을 사용했기 때문에 회반죽 속에 있는 나무재를 채취하면 C14를 사용한 연대 측정 기법으로 각 건축물들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 그 실험 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거의 모든 피라미드들이 이집트 역사에 공인된 건축 연대보다 374년이나 더 오래 되었다. C14로 연대를 측정하였을 경우 측정 오차는 50년에서 150년이므로 374년은 매우 커다란 오차인 것이다.

이 연구 자료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현재 공인되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연대기를 조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연대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에 살았던 마네토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그가 기록한 왕조의 연대가 실제와는 차이가 많을 수 있다는 뜻이다.

<스핑크스를 살리자>
이집트는 한때 고대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였다. 건조한 기후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박물관 역할을 했으며 중동 지역에서 비교적 전쟁 피해를 겪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 아스완댐-아스완댐이 생긴 이래 이집트의 환경이 바뀌어 수많은 유산들이 습기로 인해 파괴의 우려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아스완댐으로 이집트의 지진이 증가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 오종석
문제는 1960년에 건설된 아스완 댐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스완 댐 건설로 수백 제곱마일의 지하수를 끌어올림으로써 광대한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지만 대신 엄청나게 습도가 증가되었다. 이 때문에 일 년 내내 강수량이 거의 없던 룩소르 지역에 두 달간 계속 비가 오는 등 기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기자 피라미드 주변에 산성 안개가 끼는 바람에 쿠프와 케프렌의 피라미드가 이미 파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도 있다. 특히 불충분한 하수 시설 때문에 땅 위를 흘러 다니는 하수가 스핑크스에까지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되며, 유물들이 차량에 의한 진동으로 흔들리고 공기 오염 때문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조사가 있다.

아스완 댐의 영향으로 지하수위가 상승하여 지표 가까이에 잠자고 있던 소금이 결정되어 유적을 침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나일강의 염분은 리터당 0.2그램인데 아스완 댐 저수지의 염분은 1.2그램이 넘는다. 더구나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관광객에 의한 오염 문제가 당면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하루 6000명의 관광객에 의해 한 시간당 150그램의 물과 많은 양의 칼로리가 침투해 벽 표면에 소금 성분이 응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관광객이 내뿜는 수증기뿐만 아니라 외피 부분의 돌들이 방수 역할을 하지 못하여 수분이 대피라미드의 안으로 직접 들어가고 있다. 석회 물질은 물에 의해 변질되고 용해된다. 쿠프 대피라미드의 경우 물의 접촉과 함께 강한 압력도 발산한다. 대피라미드가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으므로 급속도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핑크스에 대한 보존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스핑크스 붕괴의 위험은 두 부분으로 갈라진다. 그 하나는 동체(胴體)가 침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핑크스의 동체는 원래 커다란 산을 깎은 것인데 이 모암(母岩)이 깎여 나가는 것이 발견되었다. 모암을 지탱해주던 로마 시대에 붙여진 석회석 타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그 틈새로 수분을 포함한 공기가 들어가 붕괴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에는 스핑크스 동체 중에서 어깨 부분이 떨어져 내려 세계를 경악시킨 적도 있다.

또 하나는 목에 구멍이 난 부분이 스핑크스의 붕괴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머리 부분은 500톤이나 되기 때문에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턱수염이 나 있었는데 그것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 구멍으로 수분을 많이 함유한 새벽 공기가 들어가고 낮의 건조한 대기에 의해 수분이 증발하는 현상이 반복되어 작은 구멍이 점차 커져 머리 부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스핑크스의 목 부분을 보강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스핑크스를 보존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대영 박물관에 있는 수염 부분을 반환받아 원상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대영 박물관의 창고 속에서 잠자고 있는 턱수염을 원 위치에 붙이자는 이 안은 매우 주목을 받았으나, 많은 해외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다른 문화재에 대해서도 반환 운동이 거세질 것을 우려하여 거부하고 있다.

두 번 째 안은 목에 생긴 작은 구멍에 화학 용제를 주입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이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단 용제를 주입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손을 댈 수 없다는 데 있다.

세 번 째는 더 좋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안이다.
몇몇 연구원들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급격한 퇴화의 주범은 나일강 상부에 건립한 아스완 댐뿐만 아니라 자동차 공해와 열악한 인근의 주거 환경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현재 카이로에는 거의 1500만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특히 관광객들은 기제 지역에 되도록 가깝게 자동차를 주차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이 내뿜는 배기가스 등으로 주변 대기가 매우 혼탁해졌다. 또한 피라미드 주변의 거주자들이 마구잡이로 지하수를 개발하기 때문에 지반이 침하하고 오수가 지표면으로 스며들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유적까지 침투하고 있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자동차를 추방하여 그 진동에 의한 자극을 완화시키거나 관광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등의 대책도 나왔다. 대신 관광객들을 전동차로 운송하는 것이다. 일본은 스핑크스 전체를 투명 재료로 씌워 공해를 차단하자고 제안하였다. 아스완 댐의 물을 우회하여 고대처럼 정기적으로 나일강 유역에 홍수가 일어나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화재 보존의 문제는 문화재를 갖고 있는 해당 국가의 제반 여건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유적 보존 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지만 아직도 가난이 가장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빈곤한 국가에 무조건 유적 보존을 최우선 정책으로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재원의 부족을 이유로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이집트 당국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이집트를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기 위한 것임에도 그 관광객으로부터 나오는 자금을 이집트 정부가 군비 확장 등에 쓰고 있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비록 피라미드, 스핑크스, 투탕카멘 등 세계의 유산이 이집트에 위치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인류의 자산이므로 그에 의하여 벌어들인 수입금은 인류를 위하여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동 평화가 문화재 보존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 지적도 틀리지 않다. 어쨌든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화두로 생각된다.

〈스핑크스의 신화는 계속 된다〉
 
▲ 스핑크스의 턱-스핑크스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지나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턱수염(원)을 반환받아 원위치에 부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영국측에서 반환을 거부하고있다.   ⓒ
스핑크스가 남다른 주목을 받은 것은 스핑크스 안에 비밀의 방이 있다는 가설 때문이다. 중세시대에 아랍 학자 알 마크리지와 알 코다이는 스핑크스의 아래에 방이 있고 거기에 세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새 개의 통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초기 유럽인들에게 전해졌고 16세기 말 요한네스 헬퍼리치 같은 사람은 그 이야기에 살을 붙여 머리로 올라가는 터널이 있다고 말했다. 이 통로를 이용하여 고대 사제들은 스핑크스가 신탁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유명한 가스통 마스페로, 카빌리아 등 많은 고고학자들이 스핑크스와 신전을 조사했으나 소문과 같은 방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예언가인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1877~1945)가 스핑크스 아래에 비밀 정보가 있다는 주장을 다시 하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케이시는 초능력으로 스핑크스를 투시했는데 스핑크스 오른쪽 발밑에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찾고 싶어 하는 ‘기록의 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는 20세기에 그것을 발견하면 엄청난 재앙이 따른다고 부연했다.

그의 예언이 워낙 유명하므로 1978년과 1992〜1993년에 이집트에서 드디어 그가 예언한 장소를 조사토록 허가했다. 지진계로 위치를 추정한 후 7미터나 파고 들어갔는데 스핑크스 주변지대에 이상(빈 구멍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전기 저항의 변화)이 발견되었으나 전자기 조사를 포함한 후속 조사에서 그 이상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균열과 구멍에 기인한다고 발표되었다. 또한 이집트 정부는 탐사대가 사용한 드릴이 너무나 진동이 커서 스핑크스 자체를 손상시킬 수 있다며 이들을 철수시켰다. 물론 탐사대는 이집트인들이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 두려워 고의적으로 계속 탐사를 방해했다고 말하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 2월 스핑크스로부터 200미터 떨어진 지하에서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2000년까지 물이 차 있었던 지하였는데 물을 퍼내자 기원전 500년경의 수많은 화강석 석관들이 발견된 것이다. 또한 이 지하 수갱은 마치 미로처럼 매우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스핑크스와 연결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특히 오시리스 신앙이 번성했고 대홍수라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이때의 영향으로 스핑크스가 물에 침식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스핑크스의 코가 떨어졌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사격훈련을 위해 총을 쏘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전투에서 부하들에게 “수 천 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보고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집트 문명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나폴레옹이 부하들에게 스핑크스를 훼손하는 일을 허락했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역사가 마크리지는 스핑크스를 훼손한 범인으로 수피교도를 들었다. 이들은 9세기에 이집트에 들어왔는데 스핑크스를 우상이라고 여기고 파괴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스핑크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아버지로 불렸고 스핑크스에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수피교도들은 부하들의 이런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스핑크스는 돌이지 신이 아니다’라는 주문을 걸고 얼굴을 훼손했다고 한다. 이때에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턱수염도 함께 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 : 만다
글쓴이 : 티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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