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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廣寒樓] 보물 제281호

호남인1 2011. 3. 13. 06:54

 

 

 

광한루  [廣寒樓] 보물 제281호.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누각.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춘향전에 의해 많이 알려졌다.

 

인공정원 속에 건립된 대표적인 누인 광한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팔작지붕의 이익공계(二翼工系) 다락집이다. 지금은 동쪽에 3칸의 부속건물이 붙어 있고, 북쪽에 팔작지붕을 중첩한 3칸의 계단을 두어 4면의 모습이 모두 약간씩 다르다. 아래층의 기둥은 둥근 석주이며 의장효과를 위해 모서리에는 네모난 석주를 세웠다. 이익공계의 공포이면서도 쇠서와 세부기법에서는 다포계의 양식을 보인다. 朴彦坤 글 출처: 브리태니커

 

 

 

광한루(廣寒樓)는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누각이다. 조선 태조황희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년)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흡사하다"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년) 남원부사 신감에 의하여 다시 지어진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전면에는 "호남제일루"라는 이상억부사가 쓴 판액이 걸려 있다. 누각에는 83점의 편액이 있으며, 용성지에 실려 있는 것과 합하면 약 200여수가 된다. 김종직, 정철, 정인지, 강희맹, 백광훈, 이경여 등의 시가 있다. 또한 광한루는 판소리 춘향가의 주인공인 성춘향이몽룡이 만난 곳으로 유명하다.

 

광한루가 위치해 있는 광한루원은 사적 제3003호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신선사상,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송죽국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 표현된 곳이다. 1400년에 조영된 정원으로 황희 정승이 그 선조 황강평이 지은 일제라는 조그마한 서실을 헐고 그 자리에 광통루를 세운 것에서 연유한다.

광한루원에는 광한루 이외에 청허부, 완월정, 영주각, 춘향사당, 오작교가 있으며, 춘향의 어머니의 집인 월매집을 재현해 놓았다.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사는 옥경으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하며, 광한루원 정문을 지칭한다.

완월정은 지상 사람들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상상해 축조한 수중 정자이다. 춘향제 무대로도 활용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누각.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281호. 본래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의 재상이었던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이를 중건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가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에서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 버렸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인조 16) 재건한 것이며, 장의국(張義國)이 누 앞에 연못을 파고 오작교를 가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향으로 지당(池塘)에 면하여 있는 이 건물은 막돌바른층쌓기의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사각의 돌기둥을 세워 마루 밑에 이르게 하고 나무기둥을 그 위에 세웠다.

바닥은 원래 귀틀을 짜고 점판을 깐 우물마루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장마루로 되어 있다.

누 바닥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사방이 모두 개방되게 하여 누로서의 기능에 맞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쇠서〔牛舌〕하나를 내고, 위에 행공첨차를 놓아 외일출목을 이루고, 다시 위에 쇠서를 내어 전체적으로 이익공(二翼工)과 흡사한 주심포집으로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花盤 :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을 끼웠다.

가구(架構)는 7량(七樑)으로 대들보를 전면의 평주와 내진(內陣)의 평주 위에 걸고, 보 위에 동자루를 세워 종보를 받치며, 다시 그 위에 초각된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네 귀의 추녀에는 활주로 받쳤다.

이 누의 북쪽으로는 익랑식(翼廊式)으로 누에 오르는 층계를 달아내었는데 그 구조는 익공식으로 코끼리 등의 동물모양의 화반을 창방 위에 놓았다.

누의 동쪽으로 연달아 낸 익루(翼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삼면에는 퇴를 둘러 개방하였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따라서, 마루 밑에는 온돌방용 아궁이와 굴뚝이 사방으로 쌓은 벽체에 나 있다.

누 앞에는 연못·정자·다리 등으로 구성된 넓은 정원이 있으며, 이 정원 역시 조선시대 정원의 한 유구로 지목된다. 문화원형 백과사전

 

 

 

 

 

광한루원<廣寒樓苑>

 

광한루원<廣寒樓苑>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뛰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광한루원은 경북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만든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곳 모두 당시 건축기술과 그곳에서 생활했던 이들의 사회상과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불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믄드믄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적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현재 지정구역 4만 9 900m2(1만 5122평) 보호구역 17만 4 388m2(5만 2845평)에 이르게 되었다.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조 성립이후 궁궐의 후원을 꾸미면서 우리 조경문화는 음향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의 토대 위에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결합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광한루원은 바로 조선 전기 궁궐에서 완성된 조경문화가 널리 확산되는 과정의 산물이며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가득찬 독특한 누원이다.

 

광한루원은 조선초 황희가 1419년 선조인 황감평이 지은 일재라는 서실을 헐고 누정을 새로 짓고[광통루]라고 이름한테서 연유한다.

그후 개축과 증축 그리고 정원의 설치 등이 이루어져 오늘날 조선시대 정원을 대표하는 누원으로 변모 하였다.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더불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가 있는데 지방의 누각중 평양의 부벽루는 아직 가볼 수 없고 진주 촉석루는 1960년 복원되었고 밀양의 영남루는 1844년 복원된 것으로 광한루가 1626년 복원한 것으로 복원역사 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에는 건축물 21동과 원외에 상가 및 화장실 8동이 있으며 시설물은 초정 그네 벤취 휴지통 등 150여개가 있다. 문화원형 백과사전

 

 

 

 

 

 

 

 

 

 

 

 

 

 

 

 

 

 

 

 

 

 

 

 

 

 

 

 

 

 

 
적성가 : 춘향가 초입에 이몽룡이 광한루, 오작교 등 남원의 경치를
완상하며 남자의 호쾌한 기상을 읊은 부분으로 진양조장단에 꿋꿋한
우조의 창법으로 노래하고 있다. 창 조상현, 북 김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