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海印寺)
좌표: 35°48′03″N 128°05′51″E / 35.800935°N 128.097439°E / 35.800935; 128.097439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
고려대장경판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로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를 관리하고 있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三寶 : 佛寶·法寶·僧寶) 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도 한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가야산해인사고적〉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제자인 순응(順應)이 766년(혜공왕 2) 중국에 건너가서 법을 전수받고 귀국한 뒤 802년(애장왕 3)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곧 해인사·화엄사·범어사 등 화엄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창건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希郞) 법사가 태조가 헌납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크게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398년(태조 7)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겨옴으로써 호국사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해인사를 중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88년 덕종의 비인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인 인혜왕비가 학조(學祖)에게 명해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중건했으며 또 3년간에 걸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요사 등 160여 칸을 새로 건립했다.
1695년(숙종 21) 화재로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 등 여러 요사채가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등 나머지 요사채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했다.
그뒤에도 끊임없는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만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다.
이밖에도 대각국사 의천, 사명대사 등과 같은 고승이나 최치원·이거인(李居仁)·김정희·정인홍(鄭仁弘) 등 역대 명인들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을 비롯하여 명부전·응진전·삼성각·조사전·퇴설당(堆雪堂)·음향각·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經學院) 등이 있으나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264호)·원당암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고려각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동종을 비롯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수많은 유물들이 해인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브리태니커
해인사(海印寺)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三寶) 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석가모니이다.
남북국 시대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1]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決言大德)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18년에는 승통 희랑(僧統希朗)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았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속장경(續藏經)》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조선 성종 12년(1481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보관되어 있다.
해인사는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보현암
한국 전쟁
해인사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위기를 맞게 된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한민국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 명의 북한군 잔당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조종사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서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영상출처/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62N0OQ9BLAo$
해인사의 문화재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52호 해인사 장경판전과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조선 태조7년에 옮겨진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보물 제128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보물 264호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보물 제518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이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藏經板殿)은 국보 제52호로, 해인사에 딸린 건물의 하나이다.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남쪽의 것을 수다라전(修多羅殿), 북쪽의 것을 법조전(法寶殿)이라 하는데 여기에 고려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그 앞 두 동의 소당에는 보판(補板)과 잡판(雜板)을 소장하고 있다.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비로자나불상
해인사 비로자나불상은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이다.
1200년 된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으로서, 833년에 제작된 신라 목조 불상이다. 그동안 팔만대장경 전각의 법보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인데, 2005년 6월에 새로 금칠을 하던 과정에서 833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를 보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에 방문했으며, 대통령이 약속한 특별지원금 30여억원으로 비로자나 부처님 영구보존사업을 벌여왔으며 2년여만에 마무리됐다. 대비로전의 낙성식에 다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권양숙 여사는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法傳)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다. 고(故) 육영수 여사와 같은 법명이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3회 해인사를 방문,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못 지키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8월 30일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두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2007년 11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 축사를 하였다. 세 번째 해인사 방문이다.
2009년 5월 24일 해인사 승려 300여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했다. 하안거를 깨고 나와 조문을 한 것으로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신라말 애장왕 3년(802), 순응과 이정이라는 두 스님이 신령한 땅에 터를 정하고 해인사의 기틀을 잡았다.
해인사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해인사가 자리잡은 가야산은 먼 옛날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으며, 신라 때에는 나라에서 제사(中祀)를 지내던 곳으로, 나라를 지키는 네 곳(四鎭) 중의 하나였다.
최치원의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의하면, ‘순응이 이곳을 절을 지을 적에 판단하기를 가야산의 신령스럽고 빼어남은 문수보살의 이름과 어울릴 만하고, 산의 모양이 청량산(淸凉山)의 뛰어난 형세와 비슷하니 다섯 상투를 갈라 짠데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내었을 정도’로 빼어난 곳이었다.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1430미터)의 맥은 대덕산에서 온다. 대덕산에서부터 한 갈래는 덕유산으로 이어져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되고, 또 한 갈래는 우두치(牛頭峙)에서 修道山)으로 이어져 가야산에 이르러 해인사의 명당 터를 맺었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수많은 선인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산이다. 가야산과 해인사를 노래한 시(詩)들도 수없이 많다.
가야산정은 불꽃 같은 돌산들의 비경을 이루었고, 그 산정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수려한 계곡미로 손꼽히는 절경인 홍류동천(紅流洞天)을 이루었다.
옛 기록들은 이런 가야산세를 일러 “산형(山形)은 천하 으뜸이고 지덕(地德)은 S해동(海東)의 제일”이라 적고 있다.
특히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왜란 때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 등이 모두 왜적의 화를 면치 못했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가야산은 왜적이 들지 못한 옛부터의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고 적었다. 즉 전쟁과 가뭄과 홍수의 재난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으로 불린다.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상도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은 끝이 뾰죽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은 듯하고 대단히 높고 또한 수려하다.”고 하였다.
석화성이란 돌꽃 산을 말하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불꽃모양처럼 타오르는 듯한 첨예한 산세를 화형(火形)의 산으로 분류한다.
가야산은 풍수의 오성론(五星論)으로 볼 때 화(火)의 기운을 담은 산이다.
화의 기운을 담은 산 형세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산봉우리가 불타오르듯이 뾰족하여 첨예(尖銳)한 모양을 띠고 있다.
화의 기운은 밝고 명랑하여 수도나 학문을 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본다.
물론 정통의 풍수에서는 양택(陽宅)이건 음택(陰宅)이건 화성(火星)의 산을 주산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인사는 화형의 산에서 나온 산줄기가 화의 기운을 탈바꿈한(풍수에서는 이를 剝換이라 한다)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해인사 자리의 특징은 가야산 상왕봉을 중심으로 가람 전체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높은 산들에서 형성된 긴 골짜기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간 자리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계곡이 깊게 형성된 곳에서는 계곡으로부터 벗어난 자리에 가람이 들어설 만한 터가 형성된다.
왜냐하면 그래야 수해(水害)를 막을 수 있고 주위의 높은 산이 내리누르듯이 가리지 않는 곳이면서 가람 앞으로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경각 자리와 대적광전 자리에서 보면 앞산의 높이도 적당하고 청룡, 백호가 아늑하게 잘 감싸주고 있다.
장경각 아래로 내려가면 청룡, 백호가 상대적으로 허약해 보이고 앞산인 안산(案山)도 좀 높아진다.
해인사 입지의 풍수적 특징 중의 또 하나는 대적광전의 좌향 문제이다.
해인사의 조산인 남산제일봉(321m)은 화기가 충천한 화산인데 해인사의 대웅전인 대적광전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므로 불이 많이 난다고 본다.
실제로 1695년에서 1871년까지 일곱 차례나 화재를 겪기도 했다. 1817년에 여섯 번째의 화재를 겪은 이후로는 대적광전의 좌향을 잡을 때 남산제일봉을 정면으로 삼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우향하여 정초하였다고 한다.
즉 풍수로 해석할 때, 남향이면 수도인은 많으나 화재가 빈발하게 되고, 지금같이 좌향을 잡으면 도인의 배출은 적으나 화재가 준다고 하여 할 수 없이 화재를 줄이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고 하니, 불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해인사를 형국론으로 풀면 행주형의 형세를 띠고 있다. 산 높은 곳에서 해인사 터를 보면 마치 배가 출항하려는 형세와 같다.
해인사측에서는 이를 비유컨대 석존이 큰 교화의 그물을 펴서 인천(人天)의 고기들을 거두어들여 이 산중의 모양새는 마치 거대한 방주(方舟)와 같다고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풍수에서 행주형은 주로 마을이나 도읍 터에 많이 비유되는 것으로 이것은 배가 사람과 만물을 가득 싣고 장차 출발하려는 것과 같이 이 형국의 땅에는 사람과 재화를 풍부하게 모이게 하여 번창하게 하는 소응이 있다고 본다.
행주형의 땅에는 키, 돛대, 닻 등을 구비하면 크게 길하다고 하고 그중 하나만 있어도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땅에 우물을 파는 것은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아 금기시 한다. 이렇듯 행주형으로 해인사를 적용시켜 볼 때 가야산은 선체(船體)에 해당하고 해인사는 선실(船室)로, 남산의 험한 바위들은 삿대, 장경각 뒤쪽의 바위(일명 돛대바위로 불렸음)는 돛대에 해당된다.
배의 무게중심에 해당되는 곳에 삼층석탑(대적광전 앞마당)을 세워 중심을 잡았다.
또 산의 등허리에 나무를 심어 배를 붙잡아 매었으니 그것이 천년고목의 학사대 전나무요, 또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 큰 느티나무를 심어 땅에 뿌리를 박아 놓았으니 그것이 개산(開山) 당시에 심은 느티나무였다.
그런데 그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은 돛대바위가 맡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래 화기가 승(勝)한 땅의 기운은 발산되어 자칫 산란되기 쉬운 법이다. 그러한 곳에는 기운을 지긋이 눌러 안정시켜줌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대자연은 절묘하게도 해인사 명당이 시작되는 맥의 목줄기에 바위를 세워 땅 기운을 안정시켜 놓았던 것이다.
일제 시대 때 대적광전 앞의 축대공사를 하면서 돛대바위를 그 공사용 석재로 깨트려 사용하면서 파괴되었던 곳은 현재 수미정상사리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야산 해인사 수미정상 사리탑>
연기문을 보면 돛대바위가 당시에 무참히 파괴되어 밑 뿌리만 남아 버려져 있었다고 적혀 있다.
바위가 깨어지고 난 뒤 어찌된 영문인지 해인사는 여러 가지로 불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60년이 지난 1986년에야 뜻 있는 스님들이 힘을 모아서 그 자리에 돛대바위를 대신할 탑(장경각 뒤편의 <가야산 해인사 수미정상 사리탑>)을 세우니, 그 뒤로 다시 본래의 안정이 되찾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미정상탑 자리가 하마터면 선방이 될 뻔한 적이 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닉슨이 한국을 방문하면 그에게 자랑할만한 세계적인 보물을 있었는데 담당비서관이 추천한 보물이 바로 해인사 대장경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화재를 방지하고 폭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영구적인 장경각을 다시 지으려했다.
그때 도면에는 지금 장경각과 똑같은 크기로 지하1층, 지상1층의 콘크리트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장경판고 두 동의 건물을 2층으로 포개어 놓은 형태로 설계되었다.
위치는 지금 수미정상탑 자리인 장경각 바로 뒷 쪽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안은 해인사 스님들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대의 주요 논거는 여러 가지였지만 풍수적 측면에서는 해인사가 터를 잡은 모습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기 때문에 땅을 파고 지하를 만드는 일은 배 밑을 뚫는 일이므로 배가 가라앉고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무가 주된 건축 부재로 이용된 사찰에서 싸늘한 콘크리트 재료가 주는 이질감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른 곳에 신장경각을 짓게 되었다.
새로 지은 장경각을 두고 한동안 뒷 얘기도 많았지만 지금은 선원으로 십년째 사용하고 있다.
해인사 홈페이지의 <당우 둘러보기 26번>에는 수미정상사리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장경각 뒤쪽에 있는 이 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 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높이 약 14미터, 8각7층석탑이다.” 해인사가 터를 잡은 모습을 일러 행주형국이라하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어왔다.
이런 생각은 가람의 변경이나 건설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행주형의 터에서 금기시하는 “우물을 파지 않는” 전통이라든지, 무거운 석물이나 시설물들을 함부로 놓지 않는 전통은 모두 행주형국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다.
행주형은 물 좋은 수변환경(水邊環境)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명당의 유형이다. 고구려의 장수왕 때에 천도한 평양, 백제의 문주왕 때에 본격적으로 도읍지가 된 공주가, 그리고 평양과 남원, 안동 하회마을, 낙안읍성 등이 모두 행주형의 명당이다.
한 때 논란이 되었던 해인사의 “세계 최대 청동불상 건립”은 해인사의 풍수적 특성(행주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이다. 자연과 조화되게 가람을 변경하고 배치를 해왔던 해인사의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원형 백과사전
시진출처 / http://cafe.daum.net/ilnam9911/LmzR/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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