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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의 모든것

호남인1 2011. 12. 13. 13:55

 

 

 

 

화성 [華城]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석전교축(石塼交築) 성곽.

 

팔달문

 

화성

사적  제3호 | 1963.01.21 지정 

시대 조선시대  위치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371,145㎡)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화홍문)

 

 

화성 [華城]

사적 제3호. 수원성곽(水原城郭)이라고도 한다. 1789년(정조 13) 정조가 생부인 장헌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치소(邑治所)는 물론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주시킨 다음 축조하기 시작했다.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이와 관련한 시말(始末)과 제도, 의식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94년 2월부터 축조가 시작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둘레는 5,520m이다. 시설물로는 4대문인 팔달문·장안문·창룡문·화서문을 비롯하여 암문·수문·적대·공심돈·봉돈·포루·장대·각루·포사와 성신사·사직단·공자묘·행궁 및 그외 부속건물들이 축조되었다.

그중 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인데,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세운 것으로 속이 텅 비어 있어 망루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적대(敵臺)·각루(角樓) 등도 새로운 설비였으며, 옹성(甕城)까지 제대로 갖춘 완벽한 시설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거중기(擧重器)·활차(滑車) 등 근대적인 기기를 축성공사에 사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2년 6개월이 소요된 공사에는 기술자 1,820명이 투입되었으며, 석재 18만 7,600개가 채취·운반되었고, 벽돌 69만 5,000여 장이 소요되었다. 연일수는 37만 6,342일, 총경비는 약 87만 3,520냥과 양곡 1,500석이었다. 종래의 전통적인 축성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한국 성곽이 갖는 약점을 중국이나 일본의 축성술로 보완한 화성은 그때까지의 축성기법을 가장 잘 집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성곽발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35년 일본이 '수원성곽'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화성'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李道學 글

 

 

 

수원 화성

 1997년 12월 24일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 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영어명       : Hwaseong Fortress

프랑스어명 : Forteresse de Hwaseong

지정번호 > 817

지역 > 아시아·태평양

 

 

화성의 지도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킬로미터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축성

조선 후기 정조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 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화성성벽(華城城壁)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指定)되었다, 둘례 5, 743m, 길이 5, 220m, 높이 4, 9m ~ 6, 2m이며 면적(面積)은 18만 8,048㎡ 인 수원성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華山) 아래(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와 봉담면 와우리)가 그 중심이었으나 정조가 1789년(정조 13) 그의 생부(生父)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을 양주(楊洲) 배봉산(拜峰山)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정조대왕은 수원부에 10만냥을 하사하여 집값과 이사비용을 보상하여 읍치(邑治)(관아)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集團) 이전 시키었고 신 읍치에 거주하게 될 주민에게는 10년 동안 면세 해택을 주웠다,

 

정조는 부친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華城遷都)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築城工事)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 중공하고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는 (註1)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註2) 채제공(蔡濟恭)이 성역(城役)을 주관하고 (註3) 조심태(趙心泰)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優雅)하고 장엄(莊嚴)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돌이 많이 있다는 채제공의 보고에 의해 부근 화서동 숙지산(熟知山)과 여기산(麗妓山) 팔달산에서 뜯어내 돌을 즉석에서 3등급으로 나누어 대석은 한 덩이가 한 수례 중석은 두 덩이가 한 수례 될 수 있도록 규격을 통일하고 석재나 목재(木材)등은 바퀴 달린 수례와 바퀴 없는(통나무 바침대) 두 가지 기구가 쓰였으며 채제공과 정약용의 의해 설계된  거중기(擧重機)와 대거(大擧)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성을 쌓았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 돌을 뜬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화성은 돌로 성곽(城郭)을 쌓은 석성이다, 네 개의 대문과 5개의 암문(暗門)이 있으며 두 곳의 수문(水門)(북수문(화홍문) 훼손(毁損) 된 남수문(지동시장 입구부근) 이 있다, 대문으로는 장안문(북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甕城)(성을 지키기 위해 항아리 단면 같은 모양)을 둘러 적이 쉽게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곽에는 장대(將臺) 2개 (지위소가 있는 사령부)

공심돈(空心墩) 3개(속이 비었다 하여 공심돈 지금의 초소와 같은 것)

봉돈(烽墩) 1개 (봉화를 피워 신호를 전하는 통신소)

노대(弩臺) 2개 (성밖의 동태를 살피는 지휘소)

각루(角樓) 4개(휴식을 즐기거나 주변을 감시하는 정자 같은 곳)

적대(敵臺) 4개, (성문 좌우에 높게 돌출된 감시소)

포루(舖樓) 5개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초소)

포루(砲樓) 5개 (화포로 적을 공격하는 공격소) (합 10개)

치성(雉城)(꿩은 제 몸을 풀슾에 잘 숨기다하여) (10개)

포사(舖舍) 3개 (각 방향의 경계를 맡은 군사가 성 밖이 위급한 사정을 대포로 시호를 보내는 시설물 일부 미 복원)

등 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화성(華城)의 수난기(受難記)

19세기 이후 국권(國權)이 쇠퇴(衰頹)하면서 방치되어 조금씩 훼손(毁損)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제에 의해 화성과 화성행궁은 파괴되기 시작 하였다, 해방 후 민족 분단의 비극(悲劇)인 한국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전쟁의 포화(砲火)속에 몇몇 시설물만을 남긴 채 원래(元來)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복원(復元)과 미래(未來)

화성은 1964년부터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그 후 1975년부터 5년 동안 실시된 복원 공사로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그리고 화성 행궁은 1995년부터 발급을 시작하여 2002년 대부분의 건물이 복원되어 제 모습을 갖추었다, 앞으로 화성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사업은 꾸준히 추진될 정망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정약용은 화성 축성을 계획한 실학자이다, 정조대왕의 각별한 총애(寵愛)를 받은 정약용은 화성 행차시 한강을 건너는데 쓰였던 배다리를 설계하였다 또한 새로운 성곽을 축성하는 방안을 연구하여 제출 하였고 실제 축성과정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서양식의 과학서적(科學書籍)을 참고하여 기중도설 등의 원리를 바탕으로 거중기 등의 새로운 장비들을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

채제공은 남인(南人)의 영수(領袖)로서 정조대왕의 왕권 강화에 절대적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초대 화성 유수로서 신도시 건설을 주관하여 화성유수부를 한성부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화성축성이 시작되자, 최고 책임자인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축성 전반을 지휘하였다, 채제공은 화성을 쌓는데 총책을 맡고서 빨리 서두리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의 원칙을 세워놓고 작업을 했다,

 

[보물로 지정된 채제공 초상]

문화재청은 '蔡濟恭先生(채제공선생) 초상 일괄(보물 제1477호)' 등 초상화 31점등을 보물로 지정했다.

 

 

 

 

조심태(趙心泰) (1740 ∼ 1799)

총리대신(總理大臣) 아래에서 실제 공사를 총괄하는 감동당상(監董堂上)(총리대신 아래직위)은 당시 화성(華城) 유수(留守)로 재임(在任)하던 조심태가 임명되었다, 조심태는 축성을 감독하는 이 외에도 채제공에게 수원의 번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수원의 자급자족의 경제활동이 가능한 신도시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정조대왕은 조심태 노고(勞苦)를 치하하여 1795년 원행(遠行) 때 당상관으로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목민관(牧民官) 조심태 (趙心泰)

조선조 영 정조때 무신으로 조심태(趙心泰)란 이가 있었다.

통제사 조경(趙儆)의 아들로 무예에 뛰어 났으며 음보(陰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게 되는 일을 일컬음)로 선전관이 되고, 1768년 영조 44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홍충도(洪忠道) 병마절도사, 함북(咸北) 병마절도사, 삼도 수군 통제사 등을 지냈다.1789년 (정조 13년) 수원(水原) 부사가 되어 현륭원(顯隆園)을 수원에 옮기는데 공을 세웠으며 민호(民戶)를 늘리고 병력을 강화하고 수원에 도호부를 설치케 했다.

그후 어영대장(御營大將)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한성부 판윤 (漢城府 判尹), 형조판서, 총융사(摠戎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장용대장(壯勇大將)에 올라 오위(五衛)의 개편 때 군제도식(軍制圖式)을 정하여 그의 주장 대로 군제를 개혁하여 왕의 칭송을 받았다.

지식에 해박하여 지리 군제 율령 농정에 이르기 까지 통달했고 글씨는 대자(大字)에 뛰어나 행궁(行宮)의 많은 문미편액(門楣扁額)을 썼다.

좌찬성에 추증 되었고 시호는 무의공(武毅公)이다.

 

 

 

이 조심태에 얽힌 민화(民話) 두가지를 소개 하고자 한다.

조심태가 수원 부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성 밖 인근 촌가에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칠세된 어린 아들과 살아가는 과수(寡守)가 살고 있었는데 미모가 뛰어나 인근에 소문이 날 정도 였다고 하였다.

어느 날 울타리 안쪽에서 집안 일을 하는데 지나가던 엉터리 중이 과수댁 임을 깔 보고 사립문 밖에서 해괴 하게도 마당 안을 향하여 하초를 들이밀어 내 놓고 소피를 보면서 희죽 대고 희롱까지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남녀 분별이 뚜렸한 당시의 관습하에서 과수댁은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의 그리움과 한스러움에 자신을 깔보는 세상과 심지어 중놈에게 까지 희롱 당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집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싸매고 식음을 폐하고 울고 있는데 서당엘 갔다 늦게 돌아온 어린 아들이 놀래며 묻기를 '어머니께서 어인 연고로 이렇게 슬퍼하십니까?' 하니 아들에게 차마 희롱 당한 말을 못하고 '네 알바 아니다" 라고 한뒤 계속 울기만 하니 진정 되기를 기다리던 어린 아들이 '소자의 슬픔이 어머니의 슬픔이요, 어머니의 슬픔이 소자의 슬픔 일진대 어찌 그렇게 우시는 사연을 소자에게 말씀 하시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 하시지 않으시면 소자도 이젠 자식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어른 스럽게 단호히 말하는 바람에 대견한 생각이 들어 아들 앞에서 울며 '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이젠 중놈까지 우리를 깔보고 있다 '라고 사실을 말하니 어린 아들이 분한 마음에 어머니와 서로 부등켜 안고 울며 날을 세우더니 그 이튿날 일봉 탄원서를 만들어 수원 성문으로 가서 부사를 만나겠다고 성문지기에게 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 달 가량 계속하여 포기치 않턴 중 어느 날 공무로 조심태가 성문 밖 나오다 소란한 이유를 물으니 문지기가  한 달 간의 어린 아이의 사연을 말하니 부사가 듣고 가까이 오게한 뒤 연유를 물었다.

 

어린 아들이 부사에게 제 어미의 사연을 말하고 통곡을 하니 부사 조심태도 명령을 하달하여 어서 그 괘씸한 중 놈을 잡아 들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 사이 세월도 지났지만 그 중은 오래 전 부터 관계에 종사하는 이들과 넓게 사교 하는 재주가 있어서 중을 아는 많은 고관 대작들이 오히려 왕에게 고하여 그 소행을 작은 일로 아뢰니 왕은 명 하기를 '곤장 한대로 그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부사 조심태는 그 중 놈을 당장 물고를 내려고 벼르는데 곤장 한대 가지고 서야 해볼 도리가 없어 어안이 벙벙하나 어명을 거역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오랜 동안 고민 하다가  꾀를 내어 암암리에 곤장 잘 치는 자를 모집 하였다.

 

'누구든지 곤장 한 대를 쳐서  이 중놈을 없애면 내 천금 보다 엄청난 상금을 그에게 주겠노라! 그러나 실패 할 때는 그 귀중한 곤장 한 대를 까먹은 죄를 그의 목숨과 맞바꾸어 또한 다스리리라!'

 

어떤 응모자가 있어 이에 응하리오.

아무리 천하를 다 사는 상금이어서 그 돈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라도 실패하면 자기 목이 달아난다는데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도박에는 아무나 대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놀랍게도 응모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조심태에의 묘

 

부사 조심태가 살펴 보니 더욱 기절할 일이었다.

응모한 사람은 다 늙어서 이미 곤장을 치는 관졸 근무에서 은퇴 한지도 오래 되었고 제일 무거운 행형 도구도 쳐 들기나 할지도 의심되는 정도로 비리비리 하게 말랐는데 걸음 걸이도 비실비실 신통치 않고 목소리도 힘 없이 앵앵거리는 정도였다.

부사가 이르기를 '지금 관아에 근무하는 호랑이 같은 천하 장사 포졸 들도 모두 실패 할까 보아 꺼리는 마당에 너 같은 자가 무슨 힘을 믿고 달려 드는지 모르겠다. 만일 아까운 곤장 한대가 없어져 날아가 그 중놈이 멀정 하면 그 땐 네 목이 어떻게 되는 줄이나 알겠느냐!'  하고 다짐 하는데 은퇴 관졸은 선선히 '실패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였고  다른 응모자가 나서지 않는데는 조심태 부사도 어찌 할 것인가?

 

행형 하는 날 부사 조심태는 수원 일판에 소문을 내었다.

곤장 한대를 치는 것을 보려고  성 안팎 백성들 까지 구름 같이 몰려 들었고 형틀 위에 볼기를 까고 엎드린 허연 살이 디룩디룩 찐 중놈 옆에 자기 키 보다 훨씬 기다란 곤장을 들고 선 은퇴 포졸과 단상 위에 좌정 하여 지켜 보는 부사의 눈초리와 늘어선 포졸들과 구경할 자리가 없어 성벽위까지 올라가 걸터앉은 백성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 보는 장면은 상상만 하여도 참으로 기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리라.

 

드디어 부사가 명을 내렸다.

'행형하라!'

명령을 받은 은퇴 포졸은 중놈으로 부터 먼 발치로 떨어져 나가 서더니만 갑자기 곤장을 머리위 까지 쳐들고 죽을 힘을 다하여 고함을 치면서 엎어진 중놈을 향하여 달려가서 다시 기합 소리를 내 지르며 벼락 같이 칠듯 하다가 갑자기 치지를 않고 멈추어 서더니만 높이 들었던 곤장을 천천히 내리고는 다시 원 위치 떨어진 곳으로 뒷 걸음쳐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러기를 수십 차례 반복 하니 해는 이미 중천을 지나가고 구경 하던 사람들은 모두 지루하여 하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 순간 그 은퇴 포졸이 벼락 같이 달려 들어 내려 치는 곤장의 넓적한 부분이 중놈 가랭이 사이 양 볼기짝으로 치올려 받히며 엉덩이 살과 곤장이 부딛히는 소리가 "짜악!" 하고 매섭게 났고 그것으로 형 집행은 끝난 것 이었다.

 

곤장 한대를 맞고 지루하게 엎드려 있던 중놈이 푸시시 털고 일어나서 옷 매무새를 갖추고 성문 쪽으로 이십여 걸음 희죽 희죽 웃고 걸어 가다가 멈춰 서는 듯 하더니 그 자리에 동그라지듯 엎어졌다. 기척이 없어 다시 살펴 보니 그 중놈은 이미 죽어 있었다. 곤장 한 대에 고꾸라 져 그 중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신세가 되었다.

 

다시 말해 보자면 처음엔 긴장하여 항문을 바짝 오므리고 대비하던 중놈이 늙은 포졸이 치지도 않고 수십 차례 같은 동작을 왔다갔다 반복 하는 바람에 어느 때 칠지 몰라 항문의 기운을 빼고 긴장을 풀고 늘어진 틈을 타 이 경험 많은 포졸이 냅다 올려치는 바람에 곤장 바람이 항문으로 장풍 처럼 왈칵 들어가 내장을 강타하고 간경에 급작히 부틷혀 히죽 히죽 웃다가 죽은 것이다.

 

 조심태의 묘비

 

조심태는 희색이 만면하여 그 포졸을 후하게 상주고 조정에 '어명에 의하여 곤장 한대로 행형 하였더니 물고 되었습니다.' 하니 조정에서 믿기지 않아 조사해 보니 사실 이었음으로 별 달리 문제 삼지 않았고 그 일 후에 부사 조심태는 그 모자를 잘 돌 보아 주어 당시 조심태 부사의 세심한 민심을 읽는 선정은 수원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사는 모든 백성들의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선정을 베푼 이가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성을 축조할 때는 종사자 들에게 너무 혹독하여 몰 인정 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또 다른 지혜를 내어 맡은 임무를 완성 하여 정조 대왕으로 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일꾼들이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을 받아 저녁에 집에 갈 때는 성 밖 문 앞에서 관에서 부리는 미모의 기생들로 하여금 갖은 아양을 다 떨어 가며 맛 있는 술을 팔게하여 그 술판 돈을 모아 다음날 지불할 임금을 장만하고 술에 취한 일꾼들은 집에 들어갈  때는 빈 털털이로 들어 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부사 조심태가 술을 빚어 경비를 적게 들이고 미인계를 써서 수원성을 축조 하였다 하여

 

'심태(心泰)가 태심(太甚)하니

수원(水原)이 원수(怨讐)로다!' 

 

라는 민요가 돌아 다닐 정도로 원성을 듣기도 하였다 한다.

목민관은 끊임없이 백성의 고충을 살피고 백성의 마음과 함께해야 천추만대에 칭송을 받게 된다. 조심태가 모든면에서 두드러 졌었고 정조왕의 명을 받아 수원성을 잘 축조하여 지금까지 수원성이 국가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 받기는 했지만 수원성에 얽힌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다.

형산의옥, 화씨의 벽에 비할 보물에 티가 있는 격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나라에서 정해진 년한이 있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은퇴하였다고 모두다 무지렁이가 아니라는 점을 여기 포졸에게서 알게되었고 그 전문성에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시사해 주는 바가 또한 아주 크다 라고 생각해 본다. 

참조 : 감수자 : 유홍렬, <국사백과사전>, 동아문화사, 1975 /수원민화(水原民話)   

 

 

 

 

 

 

조심태와 곤장 한 대

 

 내가 수원에서 본 일이다.

 수원 부사 하나가 관사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한 장 짜리 조서를 읽으면서 "황송하오나 이 어명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좀 말해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과거 시제를 받기 직전의 유생 같이 전해온 특사의 입을 쳐다본다. 특사는 부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조서를 두드려 보고는 "틀림없소."하고 내어준다. 그는 "틀림없소."란 말에 절망한 얼굴로 조서를 받아서 소매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물러간다.

 

 그는 부사를 자꾸 보며 얼마를 있더니 또 다시 특사를 불러 세운다.

 "이것이 정말 주상께서 쓰시는 종이오이까?"

 하고 묻는다. 특사는 짜증 섞인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누가 못 믿겠습니까? 조작하면 사형은 안 당하나요? 그냥 도로 주십시오."

 부사는 손을 내밀었다. 특사는 이제야 웃으며 "좋소"하고 조서를 던져주었다.

 

 그는 얼른 소매에 넣고서 황망히 돌아간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얼마를 한숨 쉬며 걸어가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이를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는 것이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의 머리를 긁적일 때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는 다시 걷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형틀 앞 계단 꼭대기에 올라가더니 거기 있는 자기 자리에 앉아 형틀에 묶인 현륭원 관원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는 얼마나 형벌주기에 열중해 있던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굴 그리 벌 주고 싶더이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조서를 소매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달라고 했다.

 "걱정마시오. 상소하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저자 註-이미 형벌은 끝나고 관원은 죽어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괜한 것이 아닙니다. 사사로운 감정도 아닙니다. 누가 사사로운 일에 사람을 죽입니까? 개미 하나 죽여본 적 없습니다. 사형 하나 시키는 것도 죄인 백에 하나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벼르고 벼르던 일로 저 자에게 훈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흔 아홉 번을 별러 태형을 내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기를 여섯번 하여 겨우 이 귀한 사형 한 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벼르느라고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의 빰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힘껏 때렸단 말이오? 왕에게 미움 받아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 놈, 한 놈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원뮨출처/http://formerhwan.egloos.com/1955257

 

 

 

 수원 부사 조심태의 건의로 6만5천냥을 풀어 수원백성들에게 밑천을 대 주어 팔달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수원에는 가게와 상인이 많이 늘어나 두 집 건너 한 집이 상점이었다.

 

 

전 판서 조심태가 죽었다. 전교하기를, " 이 장신(將臣)은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중요한 직무를 전적으로 맡아 관서지방의 방어사부터 시작하여 북도와 남도의 병사를 계속 역임하다가 몇 해 사이에 마침내 장수로 승진하였다. 돌이켜보면 수원성을 건설하는 공사에 처음부터 정성을 쏟아 지대한 공을 세웠고, 말을 달리며 군사를 지휘하는 수고는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그 유례를 찾기가 드물었으므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인물로 크게 의지하고 믿어왔다.

군대의 생살권을 맡고 판서의 품계에 오른 정도로는 그 노력에 보답하고 공적을 표창하기에 충분하지 못한데 큰 나무가 그리도 빨리 시들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너무도 슬픈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죽은 판서 조심태의 집에 성복(成服)하는 날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 하고, 이어 담당 조(曹)로 하여금 품계를 올려주고 증직하며 충훈부에서 훈신으로 올려주는 규정에 따라 시호를 내리는 조치도 즉시 거행하게 함과 동시에 부의를 통상적인 규례로 내려주는 것 이외에 갑절로 늘려 보내주고 관을 짜는 재목도 좋은 것으로 골라 지급하게 하였다. 아울러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23년9월27일

 

 

 

거중기(擧重機)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다산(茶山) 정약용이 고안(考案)한 기계(機械)로 1792년 수원 화성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原理)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物件)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요즈음 크레인 같은 것

 

 

거중기

 

화성 미복원(未復元) 시설(施設) 현황(現況)

화성 성곽 5, 743m,와 48개 시설물이 있었으나 미복원 시설은 성곽 일부 팔달문 관광안내소에서 남수동 지동시장입구 수원천 까지 약 500m와 남암문, 남수문, 은구, 연못, 남공심돈, 팔달문 좌우의 남서적대, 남동적대, 중포사등 7개소이다, 또한 현존하는 41개의 시설 중에는 원형은 11개, 복원된 시설은 30개이다, 성내시설 중에서 미복원 시설은 중영(中營), 이아(貳衙)(감영이 있는 곳에 군아), 별효사청, 별궁관청, 강무당행각(講武堂行閣), 무고행각(武庫行閣), 수송고, 별주, 분봉상시, 연못 3개(북지, 남지 동지) 감옥1, 군무소1, 수문청4, 창고5, 수직청(守直廳)등 22개 시설이다, 성외시설 10개 중에서 미복원 시설은 지소(紙所), 사직단, 영화역등 3개이다,

 

이들 미복원 시설이 복구 되지 않은 이유는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화성 성벽에 붙여 있는 북은구(北隱溝)와 같이 화성복원공사 당시에 위차가 확인되었으나 당시에 주변 환경이 바뀌어 불필요한 시설로 인정되어 복원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남수문과 남암문, 남공심돈, 적대, 남은구(南隱溝)등은 복원당시 수원시의 중심시가지로 상설(常設) 시장와(市場化)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벽을 복원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성벽 자체를 복원하지 않아 현재까지 미복원 시설로 남아있는 것이다, 셋째 연못과 포사(舖舍)는 성벽과 떨어져 있는 시설물로 복원당시에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實情)이 었으므로 복원에서 제외된 시설들이다,

 

 

 

 

방어 시설(防禦 施設)

 

대문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장안문(長安門)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 장안문 3D영상

 

장안문(長安門) (북문(北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문으로 정조 18년(1794)에 국보1호 서울 숭례문(崇禮門)보다 크게 건축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큰 이문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뜻에서 장안문이라 하였다, 이 문은 홍예문(虹霓門)위에 2층의 누각(樓閣)을 설치하였으며 한국 전쟁 때 문루가 불타고 구조물(構造物)이 파괴(破壞)된 것을 1976년 복원(復元)하였다, 성벽 바깔에는 반월형(半月形)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것은 반으로 쪼갠 독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문의 좌우에는 옹성을 공격(攻擊)하는 적을 격퇴(擊退)할 수 있도록 만든 적대(敵臺)가 있으며 이것이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시설이다,

 

홍예로 되어 있는 문의 안과 밖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약 5, 85m) 너비 18척(약 5, 55m)이고 바깔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약 5, 3m) 너비 16척(약 4, 84m) 전체 두께는 40척(약 12, 11m)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문을 쌓을 때 쓰던 돌)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20, 53m) 높이가 23척 5촌(약 7, 11m) 바깔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약 12, 64m) 높이가 22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6, 47m)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옹성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는 곳에 타구는 10개 첩(堞)(가퀴)은 11개를 벌여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고 장(墻)에 세운 2층의 누는 전체 높이가 32척(약 10, 14m)이다 아래층의 안은 7포 바깔은 5포로 정면 칸의 너비는 22척 5촌(약 6, 93m)인데 바닥에는 널빤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한 칸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약 3, 7m)이며 새로 2칸이고 전체길이가 24척(약 7, 4m)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칸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칸에서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 서쪽 층계 아래네 전문(箭門)(활 쏘는문)이 있는데 장가 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는 연다, 위층은 안팎 모두 7포로 정면의 칸과 좌우 제 1협간은 널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약2, 77m)이며 그 세로가 2칸 전체 길이는 18척(약 5, 55m)인데 모두 널빤지를 깔고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았다, 장안문의 공사비는 화성의 부대시설 중 가장 많은 5만 8090냥 8전이 소요되었으며 문루의 편액은 전 참판(參判) 조윤형(曺允亨)(1795-1799)이 썼다,

 

 

 

 

팔달문(八達門)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팔달문(八達門)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 팔달문 3D영상

 

팔달문(八達門) (남문(南門)

보물제 402호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이문은 수원성의 남문으로서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과 함께 건립 되었다, 이 문은 석축(石築)과 홍예(紅霓) 위에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루가 있고 문루 주위에는 여장(女墻)을 둘러 쌓았으며 전면에는 반원형(半圓形)의 옹성(甕城)을 쌓고 좌우에는 적대(敵臺)를 두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축문방식은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으나 다만 문루의 네 귀통에 고주(高柱)를 세우지 않은 점이 약간 다르다, 문의 규모는 홍예의 높이가 3,17m 너비 3,56m 두께 6,4m이며 문주(門柱)는 전면이 9m(3칸) 측면이 3,6m(2칸)이다, 이 문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考證)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있다, 앞으로 성곽을 복원할 계획이다,

 

팔달문의 설화

흔히 수원사람을 ‘깍쟁이’라고 한다. 화성의 남쪽문인 팔달문은 바로 이 ‘깍쟁이’라는 단어의 고향이다. 그 비밀은 ‘팔달문’이라는 이름 속에 있다.

정조는 유독 이 화성의 남문을 사랑해서 직접 상량문을 써 주었다.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없는 곳이 없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팔달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상인들이나 과거를 보러 오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관문으로 교통과 물류의 요지였다.  “과연 사통팔달의 요지로구나. 부디 이 문으로 사람과 물자가 한없이 밀려들어오기를 바라노라.”그리하여 정조는 이 문에 ‘팔달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농업만큼이나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었던 중상주의자 정조는 이렇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팔달문에 시장을 열었다. 

 

그리고 수원 부사 조심태의 건의로 6만5천냥을 풀어 수원백성들에게 밑천을 대 주어 팔달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수원에는 가게와 상인이 많이 늘어나 두 집 건너 한 집이 상점이었다. 

당시에는 가게를 ‘가가’,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가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타지방 사람들이 수원사람을 보면 “당신도 가가쟁이오?”하고 물었는데 이것이 변해서 ‘깍쟁이’라는 말로 굳어졌다.그러니까 이 팔달문은 수원 깍쟁이의 고향인 셈이다. 상업이 번성하니 자연히 부자도 많이 났다. 수원 팔부자로 꼽히는 대부호들을 중심으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세력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던 곳도 팔달문 근처이다. 그래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의 문으로 불린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팔달문시장, 지동시장, 못골시장, 미나리광시장을 비롯한 9개의 재래시장이 밀집해 있어 정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팔달문은 기초가 튼튼한 문이다. 원래는 기초공사 때 3.2미터를 파기로 했는데 공사 중에 물이 나오자 4.5미터를 파서 모래와 석회로 단단하게 다지고 벽돌을 3층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 탓인지 팔달문은 복잡한 근현대사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재 보물 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달문(八達門)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안쪽에서 본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 (동문(東門)

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으로서 좌청룡 우백호을 통해 동쪽을 의미한다, 유좌(酉坐) 묘향(卯向)으로 앉았다, 장안문이나 팔달문과 비교하여 문의 규모도 작고 형태도 간략하다, 특히 석축위 누각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격식 또한 낮다, 여장 안에 있는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기둥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첨차(檐遮)(토막)가 2중으로 놓인 이익공(二翼工)으로 단층(單層) 팔자 지붕으로 되어있다, 수문청(水門廳)은 3칸으로 문안 북쪽 가장 자리에 있다, 창룡문의 경우 주변 지형이 편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에 적대를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북공심돈을 세웠다,

 

또 동문 바로 옆에는 쇠뇌(활의 한 가지, 여러개의 화살을 잇달아 쏘게 됨)을 쑬 수 있은 동북노대를 두어 멀리 팔달산 정상의 서노대와 마주 대하도록 했다, 창룡문의 특징(特徵)은 옹성의 출입문이 장안문이나 팔달문과 달리 한쪽 구석에 나있는 것이다, 일반 읍성의 경우 북쪽에 광청이 자리해서 동서 방향으로 길이나기 때문에 동문 서문이 주 통행문이 되었다, 그러나 화성에서는 남북방향으로 주 통행로가 열려있었기 때문에 동문과 서문으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것이다, 본래 화성 동쪽으로 용인(龍仁)으로 통하는 큰 길이나 있지만 남문주변에 가게가 늘어서 있고, 사람들의 왕래(往來)가 거의 없는 창룡문을 이용하지 않고 팔달문을 지나다닌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일반 읍성에서 사람들이 동문과 서문을 주로 이용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했으며 안쪽은 높이가 16척(약 4, 84m) 너비가 14척(약 4, 24m) 바깔쪽은 높이가 15척(약 4,54m) 너비가 12척(약 3,63m) 전체 두께는 30척(약 9,9m)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武砂)(옛날에 성문을 쌓을 때 쓰던 돌의 한 가지 홍예의 옆에 층층이 놓아 싸음)는 각각 아래 너비 30척 높이 18척(약 5,06m)이며 좌우의 와장대는 길이가 각각 20척(약 6,06m)이고 돌 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약 2,72m)이다 바깔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약 5,45m)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17척(약 5,15m) 양쪽 대문은 철엽(鐵葉)으로 싸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타구가 6개 있고 방은 총혈(銃穴)도 6개가 있다, 옹성과 성문의 좌측은 이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깔 문은 설치하지 않았다, 형태상으로 서울의 홍인지문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옹성 안쪽에 벽돌 누조(漏槽) 4개를 설치했으며 바깔 쪽에 4첩을 설치하고 원근 총안 14개를 설치하였다, 옹성의 뒤에는 회다짐을 하였고 그 남쪽 가장자리에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元城)에 통하게 되어있다, 창룡문의 공사비는 1만 3,335냥 7전 3푼이 소요 되었고 편액은 판중추부사 유언호(兪彦鎬)(1730-1796)가 썼다,

 

창룡문(蒼龍門)

 

 

화서문(華西門)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또 보물 403호 이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화서문(華西門) (서문(西門)

보물 제403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 25-2번지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을 지키는 대문이다, 화성에서 서해안 바닷가로 가기 위해서 통과하는 대문이다,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자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紅霓門)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초대 화성 유수(留守)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쓴 편액(偏額)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주위(周圍)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保護)되도록 하였다, 옹성(甕城)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空心墩)이 성벽(城壁)을 따라 연결(連結)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哨所) 구실(口實)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깔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澈底)한 방어(防禦)가 되도록 하였다 .

 

화서문(華西門)

 

 

 

 

 

수문

 

화홍문(華虹門) 북수문(北水門)

화성의 중간을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을 세웠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왕성 하였다, 북수문 편액은 화홍문이라 하였다,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로 장괘 한 물보라가 7개의 수구(水口)을 넘쳐나는 모습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북수문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물이 통과하는 수문에 쇠창살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차단(遮斷) 하도록 하였다,

 

 

 

 

 

화홍문(華虹門)

 

 

화홍문(華虹門)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7개의 수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누각이 있다. 또 수원팔경 중의 하나이다.

 

 

⦿ 미복원된 남수문(南水門)

(위치 팔달구 남수동인 지동시장 입구)

남수문은 수원천의 수량이 불어나는 것에 대비하여 북수문 보다 2개더 많은 9개의 수구를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한동안 공사를 중단 했다가 1795년(정조 19) 11월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정조 20) 1월 16일 만들었다, 화홍문에서 곧장 750보를 흘러 내려와 화성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으로 위치는 남공심돈의 북쪽으로부터 남수문의 서쪽까지 73보 수문의 동쪽으로부터 동남각루 아래까지 30보 거리이다, 수문위로는 문루대신에 벽돌을 쌓아 긴 포사(砲舍)를 만들었는데 화성의 성곽 간운데 가장 취약(脆弱)한 부분임을 고려한 조치였다, 포사는 사방에 벽을 치고 한가운데만 터서 출입하였는데 비상시에 수백 명의 군사를 배치할 수 있는 요새이다,

 

포(砲)는 수문의 ⅔ 를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다리를 이용하였다, 수문에는 바깔쪽에 포혈(砲穴)(화포쏜는 구멍) 57개를 뚫어 놓았으며 9개의 수문마다, 1개씩의 둥근 담이 수문위로 만들어졌다 동서 양쪽 가장자리에 성퀴를 설치하여 성벽에 접속시켰고 작은 홍예문을 만들어 포로 통하게 하였다, ,수원천 흐름을 따라 북쪽의 화홍문(북수문)과 마주한 채 수문으로 미관이 수려(秀麗)했던 남수문은 1922년 홍수 때 허물어 졌다고 하나 일제에 의해 1926년과 1927년 사이 강재로 헐려 건축 및 하수도 석재 등으로 사용되었다,

 

❋ 남수문과 남공심돈 남암문 등은 일제 감정기 때 시가지 확장으로 훼손된 이 후 현재까지 복원되지 않은 시설로 남아있다, 수원시는 이에 따라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총 120억원을 들여 남수문 일대를 복원하기로 하고 최근 발굴조사와 지장물 철거 등을 완료 했다,

 

화홍문(華虹門)

 

 

 

 

장대(將臺)

 

⦿ 서장대(西將臺) 일명 화성장대(華城將臺)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통제할 수 있다, 앞쪽 대석은 4층인데 전체 높이가 5척이다, 댓돌은 3개인데 층계(層階)는 4개이고 대의 너비는 98척이다, 대 아래의 동서로 42척이 기리를 두고 좌우에 크고 붉은 이 간(杆)(큰 깃대) 한쌍을 나누어 세웠다, 상대의 너비 87척 높이 2척이고 아래 측각의 규모는 9칸 인데 간운데 한 칸은 사방 13척 2촌이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위에 층각(層閣)을 세웠다,

 

 

밑에는 판자를 깔고 연잎 평난간으로 둘렀으며 뒤쪽에는 분힘을 드리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 화성장대(華城將臺)로 편액(扁額)을 붙였다, 사면에 각각 긴 시령을 내물렸는데 길이가 6척 5촌이고 내 모퉁이에 각각 시령 하나씩을 붙였는데 역시 사방 6척 5촌이다,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깔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여덟모의 돌기둥으로 밭치었는데 그 것이 그 대로 아래층의 반자(般子)가 되었으니 곧 조정(藻井)의 제도라는 것이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웠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옥상의 한 가운데에 절병통(節甁筒) 셋을 세웠는데 높이가 6척이다, 대위에서 위층 대마루 대들보까지 전체 길이가 21척이다, 단청에 오토(五土)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로 발랐다, 대 뒤에는 팔면으로 된 노대를 쌓고 그 뒤에 후당(後堂) 3간을 지었는데 군무를 보는 곳으로 쓰려는 것이다,

 

서쪽 두간은 온돌이고 동쪽 한간은 판자를 깔았다, 모두 창과 분합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다, 앞 기둥에는 평난간을 설치하고 뒷담 동쪽 끄트머리는 판자문을 내였다, 20대 남자의 방화로 손실되었다가 2006년 5월 2일 완성 되었다,

 

※ 외간(桅杆) (장대에 세우고 크고 붉은 깃대 대홍외간(大紅桅杆)이라고 함 높이 8m)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에 각각 한 쌍(좌우)의 깃대가 있다, 일반 깃대와 달리 도르래를 이용한 것이 특징 기를 창에 끼워 세우며 국왕이 군살훈련 할 때 시열(試閱)이라는 글자를 썻다,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

 

서장대(西將臺)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의 정상에 선 망대로 사방 100리가 내려다 보인다. 정조는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동장대(東將臺) 일명 연무대(練武臺)

 

장대(將臺)란 성곽(城郭)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군사들을 지휘(指揮)하는 지휘소를 말하며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2곳의 장대가 있다, 동장대는 군사들을 훈련을 지휘한다는 뜻으로 연무대(鍊武臺)라는 다른 이름을 각고 있다, 지형 상 높은 곳이 아니어서 성(城)밖을 감시하기 보다는 주변 공지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지휘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동장대는 앞이 넓게 트인 터에 사방으로 담을 두르고 그 안에 축대를 여러 번 쌓아 높은 대를 만들어 한가운데 네모난 건물을 세웠다,

 

 

3층으로 쌓은 대를 보면 아래대의 앞 쪽은 잡석을 쌓고 이어서 짧은 담을 둘러쳤다, 중대는 돌로 쌓았고 그 높이를 반으로 하여 4척(약 1,2m)쯤 물려 또 한 층을 쌓아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 편하게 하였다, 한 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였는데 흙을 판판하게 하고 바닥을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고도 장대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동장대 건물은 5칸 측면 4칸의 익공식(翼工式)(처마위에 얹어있는 접시받침) 단층 팔자 지붕이다, 군사 지휘소 건물답게 전면을 모두 개방했으며 바닥에 전(塼)돌을 깔았고 다시 한 단 높여서 가운데 기둥 열에 맞추어 전돌 바닥이 이어지고 제일 뒤쪽 퇴 칸은 높은 마루를 둘렸다, 따라서 이 마루는 바닥 중 제일 높은 곳이 되고 여기에 장수가 앉아 지휘를 하고 명령을 내리도록 하였다, 마루 주변엔 모두 난간을 둘렀다, 주변을 보면 탁 트인 넓은 공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안에서 벌어지는 큰 행사를 이곳에서 자주 치루었다, 그 대표적(代表的) 인 것이 호궤(犒饋)(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 행사였는데 축성 공사를 하면서 11번의 호궤행사가 6번이 동장대에서 행하여 졌다,

 

동장대(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화성 창룡문 근처에 있는 장대로, 장용영 군대의 훈련 장소로 쓰였다. 여기서 활쏘기를 할 수 있다.

 

 

 

 

노대(弩臺)

 

노대는 장대(將臺) 옆에 높은 대(坮)를 둔 곳이다 이곳에서는 특정한 깃발을 흔들어 화성 성곽 곳곳으로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또 쇠뇌라는 큰 화살을 쏘기도 하였다, 쇠뇌를 쏘는 군사를 노수(弩手)라고 하는데 무비지(武備誌)에 따르면 노대에 노수를 배치시켜 여기에서 쇠뇌를 쏘게 한다고 하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개가 있다,

 

동북노대

 

⦿ 서노대(西弩臺)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으면 서노대는 돌 축대(築臺) 사이를 벽돌을 채워 쌓아 높이 만든 시설물로 이곳에서는 군사명령에 따라 오방색 깃발을 흔들어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또 쇠노라는 큰 화살을 날리기도 하였다, 노대는 무비지(武備誌)에 이르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되 모양이 전붕(戰棚)과 같이 하고 안에 노수(弩手)가 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노대는 그 제도(制度)를 따른 것이지만 무비지에 있는 그대로 지은 것은 아니다, 무비지에는 육각(六角)으로 되어 있고 오르는 계단 두 개이며 노수가 들어가는 집이 있었다, 그러나 서노대는 팔각으로 깍아 지른 듯이 우뚝 서 있으며 오르는 계단(階段)도 한계로 하였고 집도 얹지 않았다, 돌계단에 기와 벽돌을 쌓아 면을 만들고 돌을 깍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돌계단 정 동향의 한 면을 틔어 설치하였다, 또 다시 방대(方臺)를 쌓았다, 건축 재료로 돌과 벽돌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여장(女墻)도 벽돌로 만들었는데 철형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고 각각 총안을 뚫었다, 서노대에 오르면 성 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오며 적으로부터 군사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서노대(西弩臺)

서장대 바로 옆에는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다.

 

동북노대

 

⦿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는 동북공심돈과 창룡문 사이 중간에 동북 방향 하여 자리하고 있다, 동북노대는 돌로 된 치(雉)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다, 군사들이 대 위에 올라서 오방색의 특정한 깃발을 흔들어 군사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또 노수를 배치시켜 쇠뇌라는 큰 화살을 쏘기도 하였다, 무비지를 따른 서노대와 비교해 볼 때 동북노대는 그 형태와 크기 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우선 바깔쪽의 두 모서리를 둥굴게 하고 사이에 현안(縣眼)을 두 구멍 뚫었다,

 

위에는 둥근 여장을 세면과 네 모통이에 각각 하나씩 만들었는데 바깔쪽 모퉁이의 여장은 굽게 접어 모두 방안(方眼) 세 구멍을 뚫어 놓았고 안쪽 두 모퉁이는 방안 없이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 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동북노대

 

 

 

 

공심돈 (空心墩)

 

화성 공심돈은 성곽주위와 비상시(非常時)에 적의 동향(動向)을 살피기 위한 망루(望樓)와 같은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의 3곳에 돈대(墩臺)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공심돈이라 불렀으며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이다, 정조는 공심돈의 모양(模樣)과 설계에 대해 지시(指示)했다, 그리고 화성 축성이 끝난 1797년 1월 화성에 내려온 정조는 공심돈을 보고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이러한 공심돈은 서양 (西洋) 중세(中世) 봉건제후(封建諸侯) 성(城)의 일부인 탑(塔)과 유사(類似)한데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화서문 바로 옆 북치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북공심돈은 중국 성서(城書)의 제도를 본 따서 치(雉)에다가 돈(墩)을 설치하였다, 즉 성벽의 일부를 약간 밖으로 돌출시켜 치를 만들고 그 위에 벽돌을 가지고 3층의 망루(望樓)를 세우고 망루 꼭대기에는 포사(舖舍)를 지어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서북공심돈의 높이는 치가 15척(약 4, 51m) 벽돌로 쌓은 것이 18척(약 5, 45m)에 망루 꼭대기의 단층 기와건물까지 하여도 전체 높이는 약 13m 불과 하지만 주변이 넓은 평지인데다 옆으로는 낮은 성벽이 연이어 있어서 더욱 높아 보인다, 치에는 서쪽과 북쪽 2개면에 각각 현안 두 구멍을 내었다,

 

성벽높이까지는 흙으로 바닥을 체웠으며 그 위에는 벽돌로 안이 빈 네모나 통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내부에 3개 층을 구성하였다, 2층과 3충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놓아 위아래로 통하도록 하였다, 돈대의 외벽에는 총혈(銃穴)울 듏고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가각 전안(箭眼)(활 쏘는 구멍)을 뚫어놓아 군사들이 밖을 내다보면서 작은 구멍으로는 백자총, 큰 구멍에는 불랑기(佛狼機)(옛날 대포) 포를 쏘았다, 지금으로는 초소와 같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두 판을 설치하여 누(樓)(다락집)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舖)(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초소)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서 불랑기를 쏘아댈 포열 20개(사방 1척)를 내었다, 성곽, 전축 및 누각 모두 200여 년 전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서북 공심돈은 바로 옆에 화서문과 함께 화성의 독득한 성곽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상징물로 널리 알려져 일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권수(卷首)]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의 옆에 있는 공심돈으로, 화살과 대포를 발사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대포를 쏠 때, 어디서 총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서북공심돈

 

 

 

⦿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의 북쪽 북노대의 서쪽 높은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어 비교적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최상층에 올라서면 화성 전체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이다, 동북공심돈은 요동(遙東)에 있는 계성의 평돈(平墩)을 모범으로 하여 내외의 두 겹으로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평돈이 있는 계성은 중국을 오가는 사신(使臣)들이 다니는 길목이므로 그 모습이 사신들을 통해서 국내에 알려진 것이라 집작한다,

 

동북공심돈

 

이러한 동북공심돈은 건축적으로 화성에서 유일하게 원형(圓形) 편면(片面)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공심돈 중에서 성벽 안쪽으로 성벽과 따로 떨어져서 세워졌다는 점이 다른 공심돈과 다른 점이다, 또한 소라처럼 나선형(螺旋形)으로 생신 내부를 주목할 만한데 이 때문에 소라각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동북공심돈의 크기는 높이 17척 5촌(약 5, 42m) 바깔 원둘레 122척(약 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약 1, 2m) 안쪽 원 둘레 71척(약 22m)으로 내원과 외원 사이에는 4척 5촌(약 1, 39m)의 공간이 비워져있다,

 

아래층 높이는 7척 3촌(약 2, 26m)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약 2m)으로 하여 모든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또 바깔쪽으로는 간운데 층에 26개 아래층의 14개(사방 각 1척) 총안(銃眼)을 뚫어서 공격방어를 용인하게 하며 밝은 빛을 끌어 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고 23개의 포혈(砲穴)을 만들어 다양한 위치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최상층의 여장 밑에는 배수(排水)를 위한 6개의 누혈(漏穴)을 뚫었다, 아래층에서 시작되는 구불구불한 벽돌 계단을 올라가면 5척(약 1, 55m) 높이의 여장이 둘러쳐진 최 상층에 다다르는데 이곳에는 전면 2칸 측면 1칸의 누각을 세워 병사들이 몸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동북공심돈의 출입구를 들어서서 바로 우측에는 공심 일부를 막아 온돌 한 칸을 짓고 방안(方眼)을 창(窓)으로 삼아 이곳을 지키는 병사가 들어가 거쳐하게 하였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달리 원형이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의 북쪽, 동북노대(東北弩臺)의 서북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비교적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최상층에 올라서면 화성 전체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이다.

 

이러한 동북공심돈은 건축적으로 화성에서 유일하게 원형 평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공심돈 중에서는 성벽 안쪽으로 성벽과 따로 떨어져서 세워졌다는 점이 다른 공심돈과 다른 점이다. 또한, 소라처럼 나선형으로 생긴 내부를 주목할 만한데, 이 때문에 '소라각'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의 크기는 높이 17척 5촌(약5.42m), 바깥 원 둘레 122척(약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약1.24m), 안쪽 원 둘레 71척(약22m)으로, 내원과 외원 사이에는 4척 5촌(약1.39m)의 공간이 비워져 있다. 아랫층 높이는 7척 3촌(약2.26m),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약2m)으로 하여, 모든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또 바깥 쪽으로는 가운데 층에 26개, 아래층의 14개(사방 각각 1척) 총안을 뚫어서 공격과 방어를 용이하게 하며 밝은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하였고, 23개의 포혈을 만들어 다양한 위치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최상층의 여장 밑에는 배수를 위한 6개의 누혈(漏穴)을 뚫었다. 아래 층에서 시작되는 구불구불한 벽돌 계단을 올라가면 5척(약1.55m) 높이의 여장이 둘러쳐진 최상층에 다다르는데, 이곳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누각을 세워 병사들이 몸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동북공심돈의 출입구를 들어서서 바로 우측에는 공심 일부를 막아 온돌 한 칸을 짓고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이 곳을 지키는 병사가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동북공심돈

 

 

⦿ 미 복원된 남공심돈(南空心墩)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모습이 같으나 약간 더 작다. 현재 미복원이다.

남공심돈은 남암문 옆에 성곽이 직각(直角)으로 꺽이는 지점에 있으며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설치 한 것으로 건축구조가 서북공심돈과 같으나 규모가 약간(若干) 작다, 위치는 암문의 동쪽으로부터 남공심돈의 서쪽까지 36, 58m(30보 4척) 공심돈의 북쪽으로부터 남수문의 서쪽까지 85, 994m(73보)의 거리에 있었다, 한가운데에 돈대를 벽돌로 쌓고 담 안쪽의 3면에는 공간을 두어 군사들이 전투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동쪽과 남쪽 2면에 현안(縣眼) 두 개씩을 내었고 각 방향으로 2개의 총안(銃眼)을 뚫어 놓았다, 대(坮)위에는 성 가퀴를 설치하고 1칸(1, 86m)짜리 집을 지었다, 1795년(정조 19) 10월 18일 완성되었으나 남공심돈은 1846년 홍수로 남수문이 무너질 때 남암문과 함께 훼손되어 한차례의 수개(修改)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2년 홍수 때에 역시 피해를 입어 복구(復舊)되지 않다가 남암문 일대가 시장으로 확대 되면서 미복원상태로 남았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암문 (暗門)

 

1796년(정조 20) 6월 18일 완공된 암문이란 성의 샛문이다, 화성에는 서남암문, 서암문 서북암문 북암문 동암문 5개가 존재 했으나 지금은 4개만 남아있다,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내어 사람들이 은밀(隱密)이 내왕하고, 가축(家畜)이 나 군수품(軍需品)을 조달(調達)하기 위하여 설치한 문으로 암문 가까이에 접근하기 전에는 암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정도이다,

 

암문이란 적의 눈에 잘 띄지않는 장소에 만들어진 비밀스런 문을 뜻한다.

 

수원화성에는 ´비밀의 문´이 존재한다. 이를 ´암문´이라 일컫는다. 암문은 숲이 우거진 곳이나 성곽 깊숙한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이 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암문은 쉽게 이야기 하면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출입할 수 있는 작은 문을 말한다.

 

수원화성에는 동암문, 서암문, 남암문, 북암문, 서남암문이 5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구원요청은 물론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군사를 이동시켜 암암리에 역습을 하는 등 중요한 용도로 사용됐다.

 

보통 암문은 평지보다는 산성에 주로 축조되는데 이는 지형적으로 설치가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암문은 문루없이 홍예형식과 평거형식 등이 있는데 수원화성에는 홍예형식으로 축조했다.

 

그렇다면, 암문은 언제부터 만들어 사용되었을까? 암문은 성곽의 일부분인 축조물이기 때문에 성곽의 기원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성곽의 기원은 언제부터 만들어 사용됐는지는 연대가 분명하지 않지만, BC 194년의 ´왕검성(王儉城)´과 BC 18년,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의 역사 기록으로 보아 성은 오래 전부터 축성되어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초기에 축성된 ´풍납토성´과 132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으로 보아 당시의 성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성곽은 시대를 거듭해 발전됐고, 또한 선조들의 지혜가 더해 ´암문´이라는 비밀통로를 만들어 실용적으로 사용됐다.

 

 

 

⦿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동북포루와 동장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노출 되지 않으면서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 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매워 폐쇄(閉鎖)하도록 하였다,

 

동암문

동암문(東暗門)은 동장대의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은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고 유일하게 포사(鋪舍)가 설치되어 있으며 남문밖에도 용도(勇道)를 따라가면 서남각루 화양루가 나온다, 암문에는 누각도 없거니와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있다,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암문과 달리 용도로 가기 위한 암문이다. 그래서 누각이 있다.

 

서남암문(西南暗門

 

서장대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서남암문


 

⦿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있는 것이 북암문이다, 적이 알지 못하도록 후미진 곳에 문을 내어 평상시에 사람 가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 암문이다, 비상시에는 문을 흙으로 체워 막아 버릴 수 있다,

 

북암문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북암문(北暗門)

 

 

⦿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 44보되는 곳 즉 팔달산 남쪽 기슭사이에 있다, 성을 쌓은 것이 꺽어져 있어 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문이 있는지 모른다, 벽돌로 홍예를 만들었는데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 바깍쪽은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곳의 제도와 같다, 문은 산의 허리에 있고 길은 성 위로 낫기 때문에 문 안의 체석(石)은 저절로 네모난 구덩이가 되었다, 돌 충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위로 드러난 길과 숨겨진 길을 통하게 하였다,

 

서암문(西暗門)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 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 바깥 쪽은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서암문은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남쪽 기슭 사이에 위치한 성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좁은 통로이다.

벽돌로 홍예(출입구)를 만들고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이 설치됐다. 돌층계를 북쪽에 설치해 아래 위로 드러난 길과 숨겨진 길을 통하도록 했다.

성 밖에서 보면 문이 있는지 잘 모를 정도이지만, 서암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면 주변에 서장대와 효원의 종각을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유물과 산책로가 일품이다.

 

서암문(西暗門)

 

 

⦿ 미복원된 남암문(南暗門)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남공심돈처럼 미복원이다.

 

남암문은 팔달문 동쪽 남동적대와 남공심돈 사이 약간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적대의 동쪽으로부터 남암문의 서쪽까지 25, 916m(22보) 암문의 동쪽으로부터 남공심돈의 서쪽까지 36, 58m(30보 4척) 높이 3, 565m(11척 5촌)이다, 화성전도를 살펴보면 화성은 남공심돈에서 직각을 이루며 성벽이 꺽어지고 다시 두차례 더 꺽이면서 남수문과 연결 되는데 남암문은 남공심돈과 남적대의 엄호를 받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문 위에는 개판을 대고 그 위에 회를 덧붙여 안팎에다 성퀴(성위에 낮게 쌓은 담)를 겹으로 설치하였다,

 

남암문은 1846년 홍수로 남수문(南水門)이 무너질 때 물결의 기세(氣勢)가 넘쳐 제방(堤防)을 무너뜨리고 남암문으로 빠져나갈 때 문 바닥에 깔았던 전석(磚石)(벽돌)이 모두 물결에 충돌(衝突)하여 뒤집히고 움직였으며 문루도 따라서 잠깐사인에 기울었다고 한다, 이때의 충격으로 남암문은 1848년 중수되었으며 1875년에 한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남암문 일대는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성문 내장과 성문 외장이 있던 곳으로 1917년 제작된 1만분지 1 조선지도집성에는 이곳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1922년 홍수 때 또다시 허물어진 후 성벽 복원이 지지부지한 사이 시장(市場)이 확대되어 남아 있던 성벽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 현재까지 도로로 이용되면서 미복원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북암문(北暗門)

 

 

 

 

각루(角樓)

성벽 위의 모서리에 지은 누각.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것으로,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쓰였다.

 

각루(角樓)는 성곽 가운데 조망(眺望)하기에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한다, 즉 성(城)밖의 동태(動態)를 사시사철 잘 살필 수 있는 주요 요새지(要塞地)에 세우는 것으로서 화성에는 서북각루, 동북각루(일명 방화수류정) 동남각루 서남각루(일명 화양루)등 4개의 각루가 있다, 외간을 살펴보면 각루는 정성(正城)이 밖으로 조금 돌출(突出)하여 마치 치(雉)의 형태를 이루고 그 안쪽에 루(樓)(망대(望臺)를 세운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병서(兵書) 윤경의 보약(堡約)에는 각대가 있는데 이것은 중국 성제(城製)의 기본인 사각형의 방형(方形)을 짓고 네모서리마다, 각대(角臺)를 세운 것이다, 이러한 각루는 중국의 성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성제에도 적용(適用)되었다,

 

화성성곽에서는 지역지세를 따라 각루를 세웠다, 동북각루는 용두암이라는 바위위에, 서남각루는 용도의 끝 남쪽의 요새지에 동남각루는 구천의 위쪽 구릉 일자문성(一子文星)의 머리에 서북각루는 화서문 남쪽 산위 휘어굽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동북 각루는 용연(龍淵) 바로 위 연못과 바위가 어우러진 곳에 세워져 군사상 요지로서 뿐만 아니라 주변의 경치(景致)를 감상(感想)하기에도 매우 좋다,

 

서북각루의 야경

 

 

⦿ 동북각루(東北角樓) 일명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1794년(정조 18) 수원성곽을 축조 할 때 세운 누각(樓閣) 동북각루는 특히 경관(景觀)이 뛰어나 방화수류정이라는 당호(堂號)가 붙여져 방화수류정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수원성의 북수구문인 화홍문의 동쪽에 인접(隣接)한 높은 벼랑위에 있는데 그 아래에는 용연(龍淵) (또는 용지(龍池)라는 인공 연못이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아(亞)자 형 편면 구조이며 지붕은 8각 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더 세워 십(十)자 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삼절병통(三節甁桶)(지붕 마루의 가운데 세우는 탑 모향 장식)을 얹혀 있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정명도(程明道)의 시에서 따온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 썻다, 공사비가 다른 각루보다, 10배이상이 소요되어서 정조에게 불려가서 문책을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訪花水柳亭) 

방화수류정(訪花水柳亭)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화성은 아주 아름다운 성이다. 그 아름다움을 구성하는데 일등공신은 단연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본연의 임무인 군사 시설로서의 기능에서도 빼어난 존재다. 방화수류정의 군사적 공식 명칭은 동북각루이다. 화성에는 네 군데에 각루를 두었는데,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들이다.

 

 

 

그러면 어감조차도 딱딱한 각루는 무엇인가?

 

성의 굴곡부나 모퉁이, 돌출부 등의 요소에 지은 다락집을 각루라고 하고 혹은 초루(譙樓)라고도 한다. 즉, 각루는 짐승의 뿔처럼 튀어나온 땅 위에 높은 마루 집을 짓고 적들의 동정을 살피는 곳이며 총이나 포를 쏘기도 하는 요새다.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이자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춘일우성(春日偶成)-봄날 우연히 시를 짓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구름은 엷고 바람 살랑이니 한낮이 가까운데   雲淡風輕近午天 

꽃을 찾아서 버드나무 따라 앞 내를 찾아갔네.  訪花隨柳過前川 

벗은 내 마음 즐거운지 모르고                        傍人不識余心樂 

틈나면 소년들처럼 살아가라 이르네.               將謂偸閑學少年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의 산 이름이 화산(花山)이고, 새수원에는 버드내[유천(柳川)]가 흐르므로 이것도 정자 이름을 지을 때 고려되었을 것이다.

마루 밑에 숨은 저격수화성의 백미인 동북각루는 용머리(용두龍頭) 바위 위에 지었다. 용두암은 광교산의 한 기슭이 남쪽으로 뻗어 내렸다가 다시 서쪽으로 휘돌아 내려 그친 곳에 놓였다. 용이 서린 듯하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지세에 연못까지 만들었다. 

 

 갑인년(1794) 정월 15일 정조는, 

“용연 위에 우뚝 솟은 용두는 석벽에 웅크리고 앉아서 기맥이 모여들고 맺혀 정기와 신령함이 깃들었다. 더구나 물막이를 겸하는 공이 크니 마치 이 성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또한 '화성성역의궤'에,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한다.”고 하여 장안문과 화홍문을 비롯하여 동북성 전체를 관장하는 요새라고 표현하였다.

  

화홍문과 어울린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군사시설과 휴식시설의 멋진 만남을 구현하였다. 마루 밑에는 많은 군사가 들어가서 적을 향해 총을 쏘게 되었으므로 긴장된 공간이다. 그러나 용연 쪽의 성 밖에서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은 정자일 뿐이다.

더구나 용연의 물과 버드나무, 용두와 어우러진 자태에 넋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이는 묘한 유인책이다. 적군들이 방화수류정의 자태에 눈길을 빼앗긴 사이 마루 밑에서는 총구가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굉흡스님의 놀라운 재주 방화수류정은 작지만 평면은 복잡하다.

동서 방향으로 3칸인데 가운데 칸에 온돌을 놓았고, 이 방에서 북으로 한 칸을 붙이고 남쪽으로 반 칸을 물렸다. 그리고 서쪽의 한 칸은 또 길게 두 칸을 끌어내었다. 이렇게 평면이 복잡하다 보니 지붕은 더욱 복잡해진다. 팔작지붕이 모여서 열십자(十) 형태가 되면서 모임지붕처럼 되어 가운데에 절병통을 얹어 장식했고, 서쪽의 남쪽으로 길게 내려간 지붕도 팔작지붕으로 마감하였다. 

 

이렇게 복잡한 평면과 지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목공 기술이 필요하다. 강원도에서 온 굉흡(宏洽)이라는 스님의 재주가 뛰어났던지 그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멋들어진 처마 곡선을 그려내면서 구조적으로도 튼튼한 건물을 지어야 하니 어려운 일이다. 기둥은 물론이고 서까래가 튼튼하게 받쳐야 하는데 각이 진 부분이 많다보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방화수류정을 지은 도편수 굉흡스님은 포상도 받았다.

 

 

방화수류정(訪花水柳亭)

 

방화수류정 마루에 오르기 전에 시설한 월대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는데 우사(耦射-둘이 나란히 짝지어 화살을 쏨)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만한 넓이이다.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보고하거나 인사할 때, 그리고 화살을 쏠 때 이용하는 곳이다.

 

정사년(1797)정월 29일 정조는 이곳에서 활을 쏘아 3발을 맞힌 다음 시를 지어 내려주고 여러 신하에게 거기에 잇대어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임금이 내려준 시는, 봄날 성을 두루 돌아도 해는 아직 지지 않고 방화수류정의 구름 낀 경치 더욱 맑고 아름답구나. 수레를 세워놓고 세 번 쏘기가 묘하니 만 그루 버드나무 그림자 속에 화살은 꽃과 같네.라고 써서 한가하게 화성을 둘러보다가 방화수류정의 경치에 도취된 모습을 잘 그렸다.

만 그루 버드나무 그림자는 백성을, 꽃에 비유한 화살은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데 그렇다면 이는 대단한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하겠다.

 

이 월대의 아래를 보면 화강석 기둥을 양옆에 세우고 또 아래위에 놓아 그 사이를 벽돌로 막았다. 이전엔 잘 쓰지 않던 방법이었다.

이를 벽체석연(甓砌石緣)이라고 했다. 돌로 만든 액자 속에 벽돌로 쌓은 벽이라는 뜻일 게다. 주변과의 조화가 더 빛나는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그 홀로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주변과의 조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이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

북쪽의 용연과 용두암, 서쪽의 화홍문, 그리고 동쪽의 북암문과 벽돌성이 어우러져서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다. 즉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지 방화수류정의 자태가 아름다운 것은 그 자신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조화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작용한 탓이다. 마치 방화수류정은 우리에게 혼자 잘난 체하지 말고 주변과 잘 어울리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본문출처/수원뉴스/http://news.suwon.ne.kr/main/section/view?idx=339332

 

 

용연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본 용연. 화성성역의궤에는 이 용연이 반달 모양이었다고 한다.

 

⦿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으로 시야(視野)가 넓은 곳으로서 남수문 방면의 방어(防禦)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 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東南角樓)는 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세가 이곳에 이르러 가파르게 끊어졌으므로 누(樓)가 성 위로 나와서 멀리 남쪽 평야를 바라볼 수 있다.

규모는 장방형 도리에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며 5량4칸으로 지면에서 누(樓)의 밑까지 1.73m, 누(樓)의 높이는 2.27m 이다. 누(樓)면에는 모두 판자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층제와 서남 한칸 청판 아래에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다

 

 동남각루(東南角樓) 

 

 

⦿ 서남각루(西南角樓) 일명 화양루(華陽樓)

서남각루는 화성 4개 각루 중 하나로 화성 성곽 팔달산 서남쪽 끝머리에 있으며 일명 화양루라 부른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서남각루는 전면 2칸 측면 3칸으로 앞의 4칸은 바닥에 전돌을 깔아 3면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고 뒤의 2칸은 방으로 사용하였다,

 

 

서남각루

 

서남각루(西南角樓)는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하는데, 용도(甬道)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있다.

누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 21척, 동서 14척, 남쪽으로 2간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러치고, 삼면에 판문을 내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4간에는 메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 벽돌로부터 판자를 깐 데까지의 높이 1척 7촌 석체(石)에서 벽돌을 깐 데까지 높이 2척, 단청은 5토를 썼으며,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甬道)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낸 길이다.

지금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다. 만약에 이 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가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보이게된다. 비록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러므로 산 위의 3면에 돌로 성가퀴를 쌓았으니, 두께가 4척이고 안의 높이 5척이며, 북쪽으로 서남암문의 바깥 쪽과 이어지게 하였다. 좌우의 길이 각각 177보, 성가퀴 안의 너비 6보이다.암문에서 84보 되는, 동쪽에 하나의 치성(雉城)을 설치하였고, 또 10보쯤 서쪽에 하나의 치성을 설치하였다.남쪽 끝에서 15보 떨어진 곳에서 두 번 구부려서 넓혔다. 위의 구부러진 곳의 너비 9보, 아래의 구부러진 곳의 너비 11보로서, 이것이 화양루의 터다. 3면의 둘레는 367보이다.

 

서남각루(西南角樓)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일명 '화양루(華陽樓)' 라고도 하는데, 이 각루가 있는 곳은 성곽의 바깥쪽으로 서장대(西將臺)와 팔달문(八達門)의 중간지점 산기슭의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이다.

화양루가 있는 곳은 지세가 우뚝하고 높아서 만약 이곳을 적에게 내주게 되면 성안을 공격당하기 쉬울 수 있었다. 그래서 성벽에 서남암문(西南暗門)을 만들고, 암문 밖으로 좁고 긴 통로를 만들어 그 끝에 각루(角樓)를 별도로 세운 것이다. 즉 용도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서남각루(西南角樓)

 

서남각루의 규모는 6칸으로 남북 21척(약6.36m), 동서 14척(약4.24m)이다. 남쪽의 2칸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러친 후 세 면에 판문을 내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4칸에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고 매복을 서기 위하여 낸 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 보게 된다.

비록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실지로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므로 산 위의 세 면에 돌로 성가퀴를 쌓아 북쪽으로 서남암문의 바깥쪽과 이어지게 한 것이다.

 

서남각루(西南角樓)

 

 

 

⦿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5량 4칸으로 동서 18천(약 5, 45m) 남북 22척(약 6, 66m)인데 동북 3칸을 모두 판자로 깔고 사면에 평난간을 둘렀다, 위에는 판문(板門)을 설치하였고 바깔쪽 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箭眼)을 뚫었다, 내면에는 태극(太極)을 그려 넣었다, 평지(平地)에는 누의 바닥까지 5척 7촌(약 1, 73m) 누의 높이 7척 5촌(약 2, 27m)이다 서쪽 1칸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군사들이 북쪽으로 누각에 오를 수 있으며 동쪽과 남쪽 1칸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을 사용하여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군사가 머물 수 있게 하였다, 지붕아래에는 단청(丹靑)을 하고 들보 위에 회를 발랐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각루는 본디 성의 네 모서리에 누각을 세워서 사방을 관찰하기 위한 시설로 수원성은 지형의 특성을 잘 살린 성곽이므로 지세를 살펴 각루의 효과가 가장 큰 곳-동북, 서북, 동남에 지었다. 서북각루는 화서문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화서문(華西門)의 서남쪽 산기슭 성벽이 돌출되게 휘어 굽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성의 다른 각루(角樓)들과 더불어 성밖의 상황을 조망하기 알맞은 주요 요새지이다.

 

서북각루는 5량 4칸으로 동서 18척(약5.45m), 남북 22척(약6.66m)인데, 동북 3칸을 모두 판자로 깔고, 사면에 평난간을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였고, 바깥쪽 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箭眼)을 뚫었다. 내면에는 태극을 그려넣었다. 평지에서 누의 바닥까지 5척 7촌(약1.73m), 누의 높이 7척 5촌(약2.27m)이다. 서쪽과 남쪽 1칸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군사들이 북쪽으로 누각에 오를 수 있으며, 동쪽과 남쪽 1칸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을 사용하여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군사가 머물 수 있게 하였다. 지붕 아래에는 단청을 하고, 들보 위에 회를 발랐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西北角樓) 의 단청

 

 

 

 

 

봉돈(烽墩)

봉돈(烽墩)은 봉화를 올리는 시설로, 다섯 개의 연기구멍이 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기 위한 시설로 지방 먼 곳에 떨어진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중앙에 보고 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전기가 없던 조선시대에 통신은 봉화와 파발(擺撥)을 이용했다, 전쟁같이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에 서는 봉화대에 불을 피워 알리는데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신호를 보냈다, 5개의 화두가 쌓여 있고 위급한 정도에 따라 올라가는 불이다,

 

평상시(平常時)에는 밤낮으로 봉수(烽燧) 1개를 올리고 적군(敵軍)이 국경근처(國境近處)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到達)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侵犯)하면 봉수 4개 싸움이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린다, 이러한 시설은 서울 남산에도 있지만 성곽이 잘 남아 있는 수원의 봉돈이 더 고호적(顧護的)으로 보인다,

 

 

 

봉돈(烽墩)국내 대부분의 봉돈대는 토축 또는 석축으로 설치하고 있는데 수원성의 봉돈대는 전축으로 하여 그 규모로나 재재로나 외관이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고 장려하게 축조한 봉돈이다.

5개의 화두(火竇)를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성외의 지정면에서 6.63m이고 성내의 지반면에서는 3.63m나 된다. 화두대는 평면 ㄷ자형으로 4단의 계단 형식으로 축조하고, 좌우에 꺾인 계단을 두어 오르내리게 하였다. 봉돈 안쪽 좌우귀에 軍器庫와 兵守處 1間씩의 건물을 짓고 그 중간에 출입문을 내었다. 봉돈의 건축면적은35.62m2(10.8평)이다.

 

 

 

 

 

 

 

봉돈(烽墩).봉수(烽燧)

봉수(烽燧)는 연기와 불로 급한 일을 전달하던 중국과 한국의 고대 통신 수단이다. 높은 산에 있는 봉수대(烽燧臺)에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위급한 소식을 중앙으로 전했다. 동양에서는 물론 서양의 고대사회 및 미개사회에서 널리 상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법으로 제정하여 실시한 것은 고려 때, 즉 1149년(의종 3)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曺晋若)의 상주(上奏)에 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하되 평상시에는 한 번씩 올리고 2급(二急)에는 두 번, 3급(三急)에는 세 번, 4급(四急)에는 네 번씩 올리고, 봉수대에는 방정(防丁) 2명, 백정(白丁) 30명을 두고 각각 평전(平田) 1결(一結)을 주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봉수소에 배치되는 봉졸(烽卒 : 봉군)은 천역(賤役)에 속하는 것으로 국가관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 봉졸로 배치되는 예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세종 때에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는데, 평시에는 횃불을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접전을 하면 다섯 개를 올리되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는 봉졸들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하였다. 서울에서는 오원(五員)이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관할 진장(鎭將)에게 보고하였다.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봉수대는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봉수의 간선(幹線)은 직봉(職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慶興), 동남은 동래(東萊), 서북은 내륙(內陸)으로는 강계(江界), 해안 지방으로는 의주(義州), 서남은 순천(順川)의 5개 처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 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직봉 외에도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어 본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과 국경 방면의 전선초소(前線哨所)로부터 본진·본읍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었디.

 

봉화가 서울에 연락되면 병조에서는 사람을 지정해서 다음날 새벽에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이를 임금에게 보고 하고, 만약 급할 때에는 밤중이라도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각 봉수대에 소속된 인원은 남산에는 군사 4인과 오원 2인, 연해와 변경 지방은 군사 10인과 오장 2인, 기타 내륙지방에는 군사 6인과 오장 2인을 배속하였는데 이들은 봉화대 근처의 거주자라야만 했다. 또한 봉화대에 배속되는 봉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으며 오직 망 보는 일에만 종사하게 했다.

 

그리고 봉화대는 표주(標柱)를 세워서 경계를 설정하고 거짓 봉화(烽火)나 단순한 방화(放火)를 막론하고 그것이 경계선의 백보(百步) 이내에서 일어났을 때는 병조에서 관할 단속했고, 백보 외에서 일어났을 때는 해당 진영에서 단속하게 했는데 이들은 대개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봉화대 근처에서는 무당이나 토속에 의한 잡신제사를 금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수원화성 [華城]의 봉돈(烽墩)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포루(砲樓)와 포루(鋪樓)는 헷갈리기 쉽다.

 

화성에는 포루(舖樓) 5개와 포루(砲樓) 5개 모두 10개가 있다, 포루(鋪樓)는 화포(火砲)를 장착한 것이 아니라 치성위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을 가리키는데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세운 것이며, 창룡문과 장안문 사이 동북포루 서암문 남쪽에 서포루 서쪽에 북포루 창룡문 남쪽에 동일포루 본동남쪽에 동이포루가 있다,

 

 

 

 

포루(砲樓)

포루(砲樓)는 공심돈과 비슷하게 치성처럼 돌출시킨 시설이고,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포루는 성벽에서 돌출시켜 벽돌을 이용 3중층으로 지은 누각건물로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성벽 아랫부분까지 구조물이 설치되었으나 성안에서는 외관상 단층누각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서포루(北西砲樓),

 

 

북동포루

 

 

⦿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북동쪽 장안문과 화홍문(華虹門)사이에 위치 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 벽돌로 쌓았으며 나무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북동포루

 

 

⦿ 동포루(東砲樓) 

동포루(東砲樓)

 

 

⦿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 20)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 할 수 있게 하였다,

 

 

동포루(東砲樓)

 

 

 

 

포루(鋪樓)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일포루(東一鋪樓), 동이포루(東二鋪樓), 북포루(北鋪樓), 서포루(西鋪樓)등이있다.

 

⦿ 서포루(西鋪樓)

 

서포루

 

⦿ 서포루(西鋪樓)

서장대 남쪽의 서암문과 서삼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서포루는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받는 것에 대비하여 치성위에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을 공격하는 시설물이다, 수원성에는 포루(鋪樓)가 5곳에 설치되었다, 포루는 다산이 수원성을 계획할 때 가장 강조한 방어시설중 하나이다,

 

체성까지는 돌로 치를 만들고 체성 위부터 누를 만든 점은 포루들의 공통적이나 누각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서포루는 돌로 된 치(雉)위에 바깔 여장(女墻)을 벽돌로 둘러치고 치(雉) 안에 포사(舖舍)를 만들었다, 서포루의 치성은 성밖으로 22척 8촌(약 6, 9m)이 나왔고 외면의 2칸의 규모이나 동 측면이 1칸으로 된 중층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나무 사다리를 두어 군사들이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서포루

 

성 안에서본 남포루

 

 

 

⦿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중 남쪽 서남포사(西南舖舍)(서남암문)와 남치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다.

 

여름의 남포루

 

 

 

 

 

남포루는 성 밖에서 보면, 성벽에서 밖으로 튀어나오게 3중층으로 지었으며, 성 안에서 보면 단층 누각만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루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포루를 밖으로 돌출시켜서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옆면에서 눈으로 보면서 공격할 수 있다면 상당히 유리하겠지요.

 

 

남포루(南砲樓),의 겨울

 

 

북포루(北鋪樓),

 

 

⦿ 북포루(北鋪樓)

서북공심돈과 북서포루(北西砲樓)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북포루는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성벽에 다가서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포루의 건축형식을 보면 치가 성밖으로 19척(약 5, 75m)으로 현안(縣眼) 1개를 내었다, 그 위에 중충 누각을 만들었는데 누는 정면 2칸 축면 2칸 내면 3칸의 규모이며 5량 집으로 팔자 지붕인 동북포루(東北砲樓)와 구조가 같다,

 

북포루의 상층 주위에는 전판문(箭板門)(화살 쏘는 문)을 달고 하층에는 성위로 여장이 3면을 둘러막아 이어져 있으며 누 밑으로는 각각 포 구명을 내어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갖춘 셈이다, 내부에는 나무 사다리를 놓아 군사들이 상층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그 앞으로 여닫이문을 달았다,

 

북포루

 

 

 

북포루

 

 

 

동일포루

 

 

⦿ 동일포루(東一鋪樓)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며 초소나 군사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동일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정조 20) 7월 10일 완공되었다, 평탄하고 넓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의 포루와 다르게 성벽에서 많이 돌출되었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일포루

 

 

동이포루

 

 

⦿ 동이포루(東二鋪樓)

동이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작은 건물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哨所)와 같은 곳이다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 동북포루(東北舖樓) (鋪와 舖는 同字)

동북포루(東北舖樓)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동장대(東將臺) 사이 성벽의 굴곡 돌출부(突出部)에 자리하고 있는 동북포루는 일명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생김새가 은거(隱居)한 선비들이 쓰는 모자인 각건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북포루는 각건대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으로 지세가 갑자기 높아져서 용두를 굽어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동북포루(東北鋪樓),

 

포루는 성곽을 골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입니다. 동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1796년(정조 20년) 5월 15일 완공되었습니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漏穴) 11개[사방 각 4촌]을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동북포루에 그려진 도깨비를 보세요.... 적이 무서워 하도록 성밖에서 보이는 쪽엔 도깨비를 그렸답니다

도깨비 코는 불량기를 쏠 수 있는 구멍입니다.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포루는 화포를 장착한 것이 아니고 치성위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을 가리키는데,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볼 수 없도 록 하기 위해 세운것이며 동북포루(東北鋪樓), 동일포루(東一鋪樓), 동이포루(東二鋪樓), 북포루(北鋪樓), 서포루(西鋪樓)등 다섯 군데에 설치하였다

 

 

동북포루(東北鋪樓

 

 

 

포사(鋪舍) (鋪와 舖는 同字)

 

⦿ 미 복원된 중포사(中舖舍)

포사는 성벽의 위험을 성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한다, 치성(雉城)위에 있는 것은 포루(舖樓)라고 하고 성안에 독립 건물로 만들었을 때는 포사(舖舍)라고 한다, 포사(舖舍)는 각 방향의 경계를 맡은 군사가 성 밖의 위급한 사정을 대포로 쏘아 알리면 포사에 있는 군사가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응답하여 성안의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신호를 보내는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3곳의 포사가 있었는데, 중포사(中舖舍)는 매향동의 첫 번째 산록(山麓)⦗영인화성성역의궤⦘에 각건대(角巾臺) 아래 376,96m(320보)거리로 지금의 삼일실업고등학교내 주거지역과 접한 작은 운동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창룡문 방향에서 발생하는 비상상황을 성안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포사(舖舍)를 설치한 지점은 산줄기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높이 솟구쳐 오른 곳은 군사가 숙직 할 수 있도록 온돌을 놓았고 1칸은 터서 나무 사다리를 놓아 위층과 통하게 하였다, 1796년(정조 20) 8월 6일 건물이 완공 되었다, 1975년 화성 복원공사 당시에 중포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공사에서 제외되어 현재까지 미복원 상태이다,

 

 

⦿ 내포사(內舖舍)

내포사는 화성 행궁의 안에 있는 포사로 미로한정(未老閒亭)(미로한정이란 행궁 후원에 만든 정자이다, 미로한정이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에서 북쪽 58, 9m(50보) 거리에 있었으며 1796년(정조 20) 9월 9일 건물이 완성 되었다, 내포사는 화성의 각 방향에서 전해오는 비상상황을 화성 행궁에 보고하고 다시 지휘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건물은 미로한정 북쪽 구릉의 능성 상에 있는 만큼 단층으로 만들었는데 온돌 1칸(1, 86m)을 놓고 반간(半間)을 물리어 벽돌을 깔았다, 왕의 행차가 있을 경우 낮에는 장수 2명 군사 4명이 지키고 인정(人定)(밤 11시경에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소리로 성문을 eke는다) 때에 교대한다, 내포사는 일제시 화성 행궁의 훼손과정에서 사라졌다가 2006년 복원되었다,

 

화성행궁안에 있는 내포사

 

⦿ 서남암문 포사(西南暗門舖舍). 서남포사(西南舖舍)

서남암문 포사는 화성의 서남쪽 서남각루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암문은 성곽의 중요한 지점에 축조하여 양식 무기 등을 은밀히 반입하는 성곽의 비밀 통로이다, 이곳은 다른 4개 암문과 달리 암문위에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포사라고 한다,

 

서남암문 포사

 

 

 

치(稚) . 치성(雉城) (꿩을 의미한다)

 

꿩은 제 몸을 풀숲에 숨기고 머리만 내밀어 밖을 잘 내다보면서 위험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동태를 살피기 때문에 성곽의 돌출된 부분을 그 용도에 맞게 치라고 표현을 하였다, 치는 성곽의 안에서 보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凸(볼록할 철자) 성곽위에는 누각이 없이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성 몸을 숨기고 적을 쏠 수 있게 만든 것 가퀴, 성첩(城堞) 치성(雉城)이라고도 함)만 쌓고 몇 군대의 총구를 내놓았다, 밑으로는 경사지게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치의 목적은 군데 군데 이 치(雉)를 만들어 성벽에 접근하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서삼치(西三稚)

 

치는 성을 돌출시킨 이며, 철(凸)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치(稚)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동이치

 

수원화성에는 10여개소의 치(雉)가 있으며 창룡문에서 시작하여 팔달문까지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화서문까지 남치, 서남치 서삼일치 서삼치, 장안문과 화홍문사이 북동치가 있으며 150m에 한 개씩 치를 두고 있다, 화성에는 단순히 치만을 둔 곳이 있지만 지형에 따라서는 치를 응용하여 공심돈, 포루(砲樓)와 포루(舖樓) 적대(敵臺)등을 세워 적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원래 치성의 기본 거리는 50타( 3- 4보)에 하나의 치를 둔다고 하였다, 기본적으로 치성위에 누각이 없이 여장만 설치되었으며 치성위에 지은 누각을 일반적으로 포루(舖樓)라 하고 구조가 약간 다르나 대포 등을 장비한 곳을 포루(砲樓)라 한다,

 

서일치

 

 

 

적대 (敵臺)

적대는 치와 비슷한 시설이며, 팔달문과 장안문 양 옆에 각각 두 개씩 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 남서적대(南西敵臺),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다. 그 중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미복원이다.

 

적대란 성문과 옹성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인 적대는 좌우에 높은 대를 쌓아 이곳에 군사를 배치해서 문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또 유사시에는 성문을 공격해 오는 적을 막는 것이다, 적대의 바깔쪽 몸체에는 새로 방향으로서 세 개의 현안(縣眼)이 길게나 있는데 이것은 성벽에 바짝 다가선 적에게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부어 공격하도록 고안된 시설이다,

 

화성(華城)의 적대는 정문인 장안문의 동서에 북동적대와 북서적대 그리고 팔달문의 동서에 남동적대와 남서적대를 각각 1개씩 세웠다, 장안문 좌우의 적대를 자세히 관찰하면 그 모습이 규형(圭形) 즉 성벽을 중간 부분까지는 안으로 들여 쌓다가 위쪽은 약간 밖으로 내밀어 쌓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적대는 장안문과 팔달문 양측에 대칭으로 서서 웅장(雄壯)한 문의 위용(偉容)을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한다,

 

북동적대

 

⦿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는 장안문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위에 세운 시설로서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한 북동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은데 밖으로 3개의 현안(縣眼)을 뚫고 벽돌로 쌓은 담장마다, 총구멍을 만들었다,

 

 

 북동적대(北東敵臺)에 배치된 홍이포(紅夷砲)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 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ⅿ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서 성곽 또는 포루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길이 215㎝ 구경 10㎝ 중량 1, 800㎏

 

 

북동적대

 

 

 

 

 

⦿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는 북동적대와 마찬가지로 장안문에서 화서문 쪽에 설치한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한 북서적대 규모는 26, 226m(22보 1척) 이다

 

  북서적대(北西敵臺)에 배치된 홍이포(紅夷砲)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 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며 사정거리가 700ⅿ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서 성곽 또는 포루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길이 215㎝ 구경 10㎝ 중량 1, 800㎏

 

 

북서적대(北西敵臺)

 

⦿ 미 복원된 남서적대(南西敵臺)

남서적대는 북서적대와 마찬가지로 팔달문 좌우 양편에 있어 각각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로 불린다, 남서적대의 규모는 북서적대 26, 226m(22보 1척)와 비숫한 27, 094m(23보)의 크기로 남은구(南隱溝)의 동에서 47, 43m(40보 1척)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 미 복원된 남동적대(南東敵臺)

남동적대 역시 팔달문을 중심으로 남서적대와 같은 규모(規模)로 26, 226m(22보 1척)의 크기로 팔달문의 동에서 48, 608m(41보 1척) 거리 남암문(미복원) 서쪽에서 25, 916m(22보)에 위치한 남동적대는 대청을 이루며 세워졌다, 1795년 2월 28일에 모두 완성되었으며 구조는 북서적대 형태와 크기가 비숫하나 현안이 2개로 북서적대보다 1개 적게 설치되었다, 남서적대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이 1922년 홍수 이후 헐리는 과정에서 함께 훼손되었고 적대부지가 모두 도로로 사용되고 있어 1975년 화성 복원공사에서 제외 되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화성행궁(華城行宮)과신풍루(新豊樓)

 

화성성곽 중앙에 위치한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顯隆園)에서 행차할 때 임시 거처(居處)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는 행궁보다 크고 웅장 하였으며 활용도(活用途)도 높아 경북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평상시에는 유수부(留守府)(지금의 시청) 관청(官廳)으로 사용하였다,

정조 13년(1789)에 화성행궁의 정문(正門)으로 누문(樓門)을 세우고 처음에는 조심태가 편액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6칸 규모에 2층 구조로 위층은 누(樓)마루를 만들고 아래는 3개의 널문을 설치하였는데 누마루에서 수원읍내에 늘어선 집들을 내려다보고 그 앞으로 통행(通行)하는 사람들을 통제(統制)하니 서울의 남쪽에서 삼남(三南)을 제어(制御)한 웅부(雄府)라는 뜻에서 진남루라고 한 것이다,

 

 화성행궁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회갑(回甲)을 앞두고 정조 18년(1794) 가을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增築) 할 때에는 누대 좌우에 남북군영(南北軍營)을 설치함과 더불어 누문 좌우로 행각을 늘려 짓고 단청을 다시 칠하여 산뜻하게 하며 누문 밖 어도(御道) 왼쪽에 두어 임금이 행차할 때 말을 타고 들어와 내리는 장소로 쓰이던 마랑(馬廊)을 고쳐 짓는 등 행궁의 정문을 새로운 행궁에 어울리도록 버젓하게 하였다, 이에 정조 19년(1795) 다시 편액을 쓰게 하여 신풍루(新豊樓)라하고 누 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라 이름 하였다,

 

 

 

정조는 중국 한(漢)나라가 나라를 시작한 풍패(豊沛)의 이름 따와 신풍리라는 이름을 지음으로써 화성 행궁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또한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패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풍(豊)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古事)를 생각해 볼 때 정조가 화성을 고향과 같은 고장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이러한 편액을 내린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정조 19년(1795) 을묘년(乙卯年) 원행 때에는 정조가 친히 참석(參席)한 가운데 신풍루 앞에서 가난한 백성(百姓)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행사(賑恤行事)(흉년에 구차한 백성을 구원하여 도화 줌)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때의 행사 모습은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에 잘 나타나 있다, 그 후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렸다,

 

 

 

낙남헌(落南軒)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은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말살 정책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 때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2단계로 행궁 주변을 복원하여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신풍루(新豊樓)

 

 

 

 

⦿ 화성행궁(華城行宮) 시설물(施設物)

 

신풍루(新豊樓)

화성행궁 정문 국왕에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사랑

 

 

 

 

 

좌익문(左翊門)

신풍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좌익문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奉壽堂)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이곳에서 정조대왕의 어머니 해경궁 홍씨의 화 갑연을 열었다,

 

▲ 봉수당에서 혜경궁홍씨 진찬연이 재현되고 있다.

 

 

봉수당진찬도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봉수당진찬도는《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8폭 중의 한 폭으로《화성능행도병》은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에 걸쳐 화성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행(行幸)했을 때의 주요 행사를 그린 병풍으로 그 중 <봉수당 진찬도>는 현륭원 행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로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을 기념하여 베풀어진 진찬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진찬례는 화성행궁에 도착한지 사흘째인 윤2월 13일에 봉수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연회에는 친인척 82명이 초대되었다 한다.

그림은 화면 상단에 봉수당을 포치하고, 중량문을 지나 하단의 좌익문을 연결하는 행각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 안쪽으로는 진찬광경이 그려져 있다.

봉수당 앞 계단에서 뜰에 이르기까지 임시로 덧마루를 설치하고, 대형 차일이 쳐진 백목장(白木帳)을 둘러 공간을 구분하였다. 봉수당 온돌방에 마련되어 있는 혜경궁과 내외명부의 자리는 주렴으로 가려져 있고, 보계의 왼편 앞쪽에는 병풍을 둘러쳐져 있으며, 그 안쪽에는 호피보료방석이 보이는데, 이는 정조의 자리임을 암시한다. 물론 위대한 인물을 그려 넣지 않는 조선시대 기록화방식을 따라 정조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호피방석이 2006년 보물 제1498호로 지정된 <조선후기 문인초상>의 방석과 유사하다는 점으로서, 정조 년간 상층계층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덧마루 위에는 융복(戎服)차림의 의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이 좌우로 나누어 쭉 앉아 있으며, 그 중앙에는 여령(女姈)들이 음악에 맞추어 일종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중앙문 밖에는 어가를 호위해 온 백관(百官)들이 융복(戎服)차림으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찬탁(饌卓)위에는 술잔과 함께 하사받은 꽃(종이꽃)이 꽃혀 있다.

 

 <봉수당진찬도>는 동국대학교 소장본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리움삼성미술관, 고궁박물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전체적인 형식은 같지만 세부묘사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동국대학교본은 다른 진찬도에 비해 채색의 농도가 짙고, 묘사가 대체로 정밀하며 마치 위에서 본 듯 축약된 병풍 화면형태나 병풍 폭의 꺽이는 부분묘사, 인물들의 실감나는 동작 표현 등은 여타본 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와나 함 등에 명암이 절묘하게 구사되어 있는 점 등은 행사가 행해졌던 시기보다는 좀 더 후인 19세기 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비록 단폭(單幅)으로만 전해오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가필의 흔적이 없고 19세기 기록화로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봉수당진찬도

 

 

 

미로한정(未老閒亭)

미로한정이란 행궁 후원에 만든 정자이다,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황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내포사(內舖舍)

내포사는 화성 행궁의 안에 있는 포사로 미로한정(未老閒亭)에서 북 쪽 58, 9m(50보) 거리에 있었으며 1796년(정조 20) 9월 9일 건물이 완성 되었다, 내포사는 화성의 각 방향에서 전해오는 비상상황을 화 성 행궁에 보고하고 다시 지휘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건물은 미로한정 북쪽 구릉의 능성 상에 있는 만큼 단층으로 만들었는데 온 돌 1칸(1, 86m)을 놓고 반간(半間)을 물리어 벽돌을 깔았다,

 

 

 

 

 

외정리소(外整理所)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행궁에서 치려지는 행사 준비 담당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경룡관(景龍館)

정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으로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한다,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 사용했던 부속건물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세워졌는데, 2층 구조로 만들고 2층은 누마루로 만들고 1층을 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이름붙였다.

 

 

 

 

 

서리처(書吏廳)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

 

 

 

 

 

비장청(裨將廳)

비장들이 대기 하거나 사무를 보던 곳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남군영(南軍營)

화성행궁의 24반 무예를 수련한 군사 진영

 

화성성역의궤" 에는 공해(관아)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1789년(정조13) 군영 24칸을 지은데다가 정조 18년 좌 우익량 21칸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북군영(北軍營)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북군영 군사들의 거소.

 

북군영과 집사청의 통문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친근위(기병)대의 병영이었다. 북 과 남군영이 신풍루 양쪽에 배치 되어있다..

 

북군영에는 조선시대의 조총, 궁시, 창검, 방패등이 전시되어있다..

 

 

 

 

유여택(維與宅)

정조대왕이 행차시 잠시 머물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이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 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유여택의 전경이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1800년 정조가 승하한 다음 현륭원재실에 있던 어진과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에 모신 대본 어진 일체를 1801년 (순조1년)화령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곳에 잠시 봉안하였다.

 

 

 

 

 

 

장락당(長樂堂)

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해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 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장락당-이 곳에서 대장금의 촬영이 있었다..극중에서 많이 보던 내실 복도의 모습이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長樂堂)은 을묘년 원행(園幸)에 대비하여 정조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할 때,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지은 행궁의 내당(內堂)이다. 정당(正堂) 7량 13칸과 남쪽 각도(閣道)외 12칸으로, 모두 25칸의 규모를 갖추었으며, 그 중 온돌이 8칸이다. 동,서,남 3면에 모두 퇴헌(退軒)이 있고, 서남쪽의 각도 3칸이 복내당(福來堂)의 뒤쪽 행각(行閣)과 통하게 되어있어 복내당의 서별당(西別堂)과 연결된다.

 

봉수당(奉壽堂)과 마찬가지로 동쪽을 향해 있으며, 봉수당의 서남쪽 모서리에 맞붙어있어, 봉수당과 서로 통하게 되어있는데, 장락당의 이러한 독특한 모양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을묘년 원행 때 봉수당에서 거행한 진찬례(進饌禮)에서 정조가 혜경궁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 혜경궁이 침소인 장락당에서 봉수당으로 편히 이동할 수 있도록 두 건물을 서로 통하도록 한 것이다. 복내당으로 통하는 2개의 작은 문을 다복(多福), 장복(長福)이라 한 것이나,

'오랜 즐거움'이란 건물의 이름에도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효성이 깃들어 있다.

장락당이라는 이름은 전한(前漢)의 도읍인 장안성(長安城)의 장락궁(長樂宮)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는 혜경궁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한나라 태후堂) 7량 1 혜경궁 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와 직접 어서(御書)로 편액(扁額)을 걸었다.

 

이 편액은 현재 문화재 관리국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복내당(福內堂)

해경궁의 내당으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 시에 머물렀던 곳이다. 복내(福內)라는 이름은 "일으켜 얻는 것은 밖으로부터요, 복을 낳는 것은 안으로부터"라는 한서(漢書)의 글귀에서 따왔다.

원래 정조13년(1789)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창건하여 5량 18칸, 내외 행각 29칸의 규모이던 것을 정조18년(1794)에 정조가 어서(御書)로 복내당이라 편액(扁額)하고(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북쪽 온돌방 4칸 반과 서별당 등을 증축하여 67.5칸의 규모를 갖추고 내당으로 삼았다. 서별당은 장락당(長樂堂)의 서행각과 이어지고, 구여문(九如門), 동행각에는 유복문(維福門), 외행각 북쪽 끝에는 구복문(九福門)이 있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뒤에 내명부가 실감있게 걸려있다..

 

 

 

복내당의 부엌-이 곳에서 대장금의 촬영이 있었다..

 

복내당 뒷뜰. 우물과 장독이 있다...

 

 

 

낙남헌(洛南軒)

1795년 행경궁 홍씨 화갑연 기간 중 과거시험과 양로연 등의 여러 행사가 치뤄졌다,

 

 

장남헌(壯南軒, 봉수당의 옛 이름) 북쪽에는 정조가 행차시에 활쏘기를 하던 활터가 있었는데, 정조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할 때, 그곳에 있던 득중정(得中亭)이라는 정자를 서쪽으로 옮기고, 그 터를 넓게 닦아서 낙남헌(洛南軒)을 새로 지었다.

 

낙남헌이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성 남궁(南宮)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를 치루던 행궁의 별당(別堂)이다. 뒤편에는 행사 중에 잠시 쉴 수 있도록 노래당(老來堂)이라는 온돌방을 두었고, 서쪽으로 이어진 행랑을 통해 득중정(得中亭)과 연결된다.

낙남헌은 넓은 마당을 두고 북쪽을 향해 있는데, 건물 앞쪽 부분의 담장은 홍살판으로 만들어,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치워버리고 마당을 넓혀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노래당(老來堂)

 

정조19년(1795) 을묘년 원행(園幸) 때에는 각종 행사가 치러졌다. 우화관(于華館)과 이곳에서 각각 문무과 별시(別試)를 시행하여, 별시에 급제한 문관 5인, 무관 56인에게 합격증을 내려주는 행사인 방방(放榜)을 행하였고, 회갑연 다음날에는 이곳에서 화성유수부에 사는 61세 이상된 노인들과 70세 이상의 문관, 음직(蔭職), 무관 및 본부 경내에 있는 조관(朝官)들에게 양로연을 베풀었다.

정조20년(1796)에는 이곳에서 화성성역이 잘 마무리됨을 기념하는 낙성잔치를 행하기도 하였다.

 

낙남헌은 정면5칸, 측면4칸에 7개의 대들보를 갖는 규모로, 초익공(初翼工) 양식의 팔작집이다. 봉수당과 장락당은 단청을 하지 않았으나 낙남헌에는 오토단청(五土丹靑)을 하였으며, 계단 좌우의 소맷돌인 우석(隅石)에는 궁궐이나 왕실 사당 등, 특별한 곳에만 사용하는 구름문양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낙남헌의 기단을 축조하는 데에는 방화수류정(防花隨柳亭)에서와 같이 돌로 네모난 틀을 짜고 틀 안은 벽돌로 면을 채우는 벽체석연(??石緣)이라는 새로운 표현방식이 사용되었다.

화성행궁의 건물 중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고,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쓴 편액(扁額)이 전해진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낙남헌양로연도

 

원행을묘정리의궤도는 정조대왕이 1795년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이 있는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행사를 그린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8폭의 병풍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 내용은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서장대야조도>, <득중정어사도>, <시흥환어행렬도>, <주교도>이다. <낙남헌양노연도>는 1795년 윤2월 14일 신시(오후 3-5시) 정조가 친림한 가운데 화성(華城)의 낙남헌(洛南軒)에서 베풀어진 양로연을 묘사한 궁중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정조가 수원에 모신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행행한 행사를 그려 병풍으로 꾸민 원행을묘도병(園幸乙卯圖屛) 중의 한 장면이다. 이 병풍은 당시 자비대령 화원인 최득현, 김득신, 이명규,장한종,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화관(于華館)

문과 별시 시험장

 

수원공립보통학교로 쓰인 우화관(1915년, 화성의 그림자)

 

 

수원신풍초교가 위치해 있는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246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화관이 있었던 것으로 수원시는 화성행궁 2단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이곳에 우화관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수원 신풍초등학교는 조선시대 정조 때 지어진 수원 화성행궁 내 우화관(지금의 공무원 관사) 자리에서 1896년 개교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이다. 수원시 화성 사업소는 신풍초교를 광교신도시로 이전시키고 우화관 복원 공사를 할 계획이다. 5일 학교 앞쪽으로 복원한 행궁 일부가 보인다

 

 

 

 

득중정(得中亭)

정조대왕이 행궁에서 활을 쏘신 곳으로 모두 명증시켜 득중정 이라 했다,

 

정조13년(1789)에 활터에 세운 정자, 즉 사정(射亭)이다. 이듬해 행차 때 정조는 이곳에서 활을 쏘아 4발 모두를 적중시켰고 이를 기념하여 어서(御書)로 득중정(得中亭)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다. 이 득중이라는 이름에서는 문무겸비의 국왕이 되고자 하였던 정조의 마음이 엿보인다.

 

 

 

정조18년(1794) 가을에 낙남헌(洛南軒)을 새로 지으면서 그 터에 있던 득중정을 노래당(老來堂) 뒤쪽으로 옮겨 지었다. 5량 규모에 온돌2칸을 포함한13칸의 건물에 부사(附舍) 7칸으로 모두 20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노래당에서 서쪽으로 이어져 노래당과 ㄱ 자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득한문(得閒門)을 통해 봉수당(奉壽堂) 서행각(西行閣)과 연결되어 있는데, 북쪽을 향하고 있는 대청 앞면에는 퇴칸을 두었고 이에 널문이 달려있어 비바람을 이중으로 막아준다. 계단 앞에는 동서 길이 8척, 남북 너비 6척의 어사대(御射臺)를 만들어, 위쪽에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정조19년(1795)과 정조21년(1797) 원행(園幸) 때에 정조와 신하들은 여기에서 활 쏘는 행사를 가졌는데, 이때의 기록이 화성성역의궤 부편 어사(御射) 부분에 남아있고, 낮밤으로 여러 차례 낙남헌(洛南軒)를 하였던 정조 19년(1795) 을묘년 원행때의 모습은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의 득중정어사도(御射圖)에 잘 묘사되어 있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원행을묘정리의궤도는 정조대왕이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행사를 그린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8폭의 병풍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 내용은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서장대야조도>, <득중정어사도>, <시흥환어행렬도>, <주교도>이다. 이 병풍은 당시 자비대령 화원인 최득현, 김득신,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는 윤2월 14일 양노연을 끝내고 어사대가 있는 득중정에서 활을 쏘고 불꽃놀이를 즐긴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집사청(執事廳)

행궁의 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행궁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려가지 비품을 관리 하는 관청

 

집사청의 입구 모습..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다.

 

집사청-집사들이 기거하던 건물로 지금의 대궐 관리사무소.

 

 

집사청 관리의 내실

 

 

 

 

노래당(老來堂)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 는 건물이다,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낙남헌(洛南軒)과 득중정(得中亭)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 중간에 잠시 쉬는 공간으로 마련한 건물이다. 온돌 3칸에 마루 1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 낙남헌과 'ㄱ'자를 이루며 이어져 있고, 남쪽 뒷물림으로는 득중정과 통하게 되어있다.

 

정조18년(1794)에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노래당이라는 이름에는 혜경궁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담았다. 이는 70 이 넘어서도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는 초(楚)나라 노래자(老來子)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노래당, 복내당(福來堂) 등의 상량문과, 정조21년(1797) 8월 원행 때에 정조가 지은 시 노래당구점(老來堂口占)에서는 정조를 노래자에 비유하는 표현들을 볼 수 있다.

노래당 속에 활짝 핀 좋은 얼굴/ 동산과 정자의 이름 거듭 걸어 늙을 틈이 없네 평상시엔 감히 늙었단 말 하지 못하고/ 가만히 노래자처럼 색동옷 입어보네. [화성성역의궤 부편2 어제(御製), 노래당구점]

“늙는 것(老來)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노래당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기도 하는데, 정조가 화성을 노후의 안식처로 삼고자 하였다는 견해에서이다. 정조의 이러한 마음은 노래당의 문 이름에서도 엿보인다고 한다.

 

정원의 동쪽을 회칠한 담장으로 가로 막고 담장 한가운데에 벽돌로 홍예문을 내어 난로문(難老門)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이름은 화성행궁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늙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다는 뜻을 지니는 것이고, 담장의 북쪽 끝 처마 계단 위에는 단선(單扇)으로 만든 작은 문을 두어 가풍문(歌風門)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화성에서 노래하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장춘각(藏春閣) 미복원

장춘각은 정조가 군사들의 무예를 구경하던 낙남헌과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화령전 사이에 복원된다.

 

 


기층헌(起層軒)

궁중음악에 쓰이던 편경이나 편종 등 각종 악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운한각(雲漢閣)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正殿)으로 정조의 초상을 봉안한 건물이다. 운한은 은하수를 말하는데, 『시경』대아 탕지십(蕩之什)「운한」첫 구절에“환한 저 은하수가 하늘에 밝게 둘러 있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고 한 데에서 따왔다. 이 시는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는 시로서 비오기를 빌면서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려졌다고 한다.

 

정조의 사당에 이 편액을 순조가 직접 써서 붙인 것은 하늘로 올라간 정조의 혼백이 나라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

순조가 쓴 원래 현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는 1975년 화성 복원 당시의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동향으로 격식이나 부재의 사용이 궁궐의 전각에 못지 않다. 건물 앞에는 제사 때 사람들이 모여 서고 악공(樂工)들이 제례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월대(月臺)가 마련되었으며, 월대 앞에는 세 군데에 계단이 마련되었다. 운한각에는 서북측 모서리부터 5칸의 행각을 마련하여 전사청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우천시를 대비한 시설이었다.

 

 

단청이 없는 운한각.

 

 

 

 

 

봉수당(奉壽堂)

정조13년(1789)에 수원 신읍을 영건(營建)할 때 지어, 1790년 원행(園幸) 때에 정조가 직접 편액(扁額)을 써서 장남헌(壯南軒), 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 하였다.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때에 정조가 머무르던 행궁 정당(正堂)이었으며, 평상시에는 부사(府使)가 집무하는 동헌(東軒)으로 쓰였다.

 

 

정조19년(1795)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뜻을 담아 정조가 새로이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게 편액(扁額)하게 하고, 회갑연 진찬례(進饌禮)를 여기서 거행하여 혜경궁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렸다.

봉수당은 나의 어머니에게 술잔을 올리고 오래 사는 것을 비는 곳이며 (奉壽堂卽奉我慈宮稱觴獻壽之所) [화성성역의궤 부편2 연설(筵說), 1796년 11월 19일] 진찬례에서 혜경궁은 거처인 장락당(長樂堂)에서 봉수당으로 이동해 정조의 잔을 받게 되었는데, 정조는 혜경궁이 건물을 이동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봉수당과 장락당을 서로 통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봉수당과 장락당은 두건물의 벽과 지붕이 한쪽 모서리에서 맞붙어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봉수당은 정면으로 삼문형식의 중양문(中陽門), 좌익문(左翊門)을 두고, 행궁정문인 신풍루(新豊樓)와 일직선이 되는 위치에 동쪽을 향하도록 앉아있어, 행궁 전체의 중심축을 이룬다. 정조13년(1789) 8월 19일에 상량하여, 9월 25일에 7량 21칸의 정당과 행각 43칸이 완공되었고, 정조18년(1794)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증축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봉수당내  정조대왕의 용상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원행을묘정리의궤도는 정조대왕이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행사를 그린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8폭의 병풍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 내용은 <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서장대야조도>, <득중정어사도>, <시흥환어행렬도>, <주교도>이다. 이 병풍은 당시 자비대령 화원인 최득현, 김득신,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봉수당진찬도>는 1795년 윤2월 13일 원행을묘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이 되는 해를 기하는 잔치를 화성(華城)의 봉수당(奉壽堂)에서 베푸는 장면이다.

 

 

 

화령전(華寧殿)

순조1년(180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된다.

 

 

화령전(華寧殿)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 - 2번지 사적 제115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 - 1800)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 받기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肖像畵)를 모셔놓고 정전인 운한각(雲漢閣)을 비롯하여 이안청(移安廳)(운한각에 모신 영전을 옮겨야 할 사정이 있을 때 임시 모셔두는 건물) 제정(際井)(제례의 사용될 정화수) 전사청(典祀廳)(제향을 위한 준비 하는 곳) 풍화당(風化堂)(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와서 머무는 건물)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남측협문 북측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하각의 건축법에 따라 지었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 노인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정조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졌는데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에 새로 제작한 군복을 입은 초상화이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며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대왕 초상화 .화성 박물관내

 

 

제정이란 곳인데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될 정화 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이라고도 합니다..

 

 

 

 

 

 

여민각(與民閣)

여민각(與民閣)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됐다.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12월 31일 밤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준공된 여민각은 정조대왕이 1796년 화성행궁을 건립하면서 행궁 앞 십자로(현재 종로 삼거리)에 설치됐던 종각 터에 세워졌다.

수원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됐던 종각과 종을 복원해 정조대왕의 위민(爲民) 정신을 담아 여민각이란 이름을 붙였다.

지난해부터 여민각에서 12월 31일 밤엔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열리고 있다.

 

 

종각(鐘閣) 일명 여민각(與民閣)

※ 옛 모습이 다시 태어나는 수원화성 종각 (여민각)은 2008년 8월 21일 오전 11시 30분 팔달구 팔달로 1가 6-9번지(종로사거리)에서 상량식(上梁式)이 열렸다, 종각은 1796년 조선 정조 때 화성을 축성하고 화성 행궁과 성신사(城神祠)(성신사는 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 등을 건립하면서 화성행궁 앞 십자로(종로)에 설치한 시설물로서 이로 인해 현재의 종로라는 지명이 생겼다,

 

전문가에 따르며 정조대왕은 수원 화성을 수도인 한성부와 같은 도성체제로 만들기 위해 서울처럼 성에 4대문을 만들고 중앙에 종루를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종각은 일제감정기와 6, 25를 겪으면서 사라졌고 종로라는 지명과 문헌상에만 나마 있는 상태이다,

 

이에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이사장 김인환)는 지난 2002년 수원시의 지원으로 화성내 미복원 시설에 대한 연구와 지표 조사를 실시해 성신사 이하 등과 함께 종각의 위치를 확인 했고 수원시 화성사업소는 2006년 10월 종로 일대를 수원도시계획 시설역사(施設役事)공원 부지로 결정했다, 수원시는 지난 1월과 2월 중 지장물 철거 공사와 종 제작에 착수했으며 5월에 종각 공사를 착공 2008년 10월 8일 45회 수원시 문화행사에 맞추어 준공하였다,

 

종각은 1013㎡(약 300평)의 부지에 건축되고 있는데 부지 매입비와 건축비, 종 제작비등에 65억윈과 시비 35억원등 총 100억원이 들었다 여기에 걸리게 될 종은 무형문화제 주철장 원관식 씨가 제조하고 있으며 약 20톤 규모로서 9억2000만원의 제작비가 소요된다, 화성사업소 학예연구사 김준혁 박사는 한양(漢陽)의 도성처럼 화성의 종각 좌우로 시전(市廛)이 운영되는 등 종루(鐘樓) 일대를 복원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종(鐘)의 4면에는 수원시민 모두 화합하여 즐겁고 집집 마다 부유하여 충만하고 수원시를 근본으로 세계로 창성하고 번영하라는 기원의 뜻으로 인인화락(人人和樂) 호호부실(戶戶富實) 수원위본(水原僞本) 세방창화(世邦昌華)‘’를 새겼으며 종각의 이름은 시민의 의견에 따라 더불어 사는 행복한 도시의 의미로 여민각(與民閣)이라 하였다, 여민은 백성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정조대왕이 재위동안 실천했던 대민정신이기도 하다, 앞으로 타종행사를 실시하고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등 이곳이 화성행궁과 함께 수원 문화와 역사 축제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성신사(城神祠)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화성 축성의 마지막 작업은 화성을 지켜주는 신령을 모시는 성신사(城神祠)를 만드는 것이었다.

3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화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은 성신사춘추상향축문(城神祠春秋常享祝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령께서 우리를 보호하여 시냇물이 흐르듯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화성성역의궤 권2 고유문(告由文)]

 

화성성역이 막바지에 다른 정조 18년(1796) 7월에 시작한 성신사 건축은 한 달도 되지 않아 마무리되고, 성신사의 위패(位牌)는 길일을 기다려 9월 19일에 정당(正堂)에 모셨다. 성신사는 팔달산 오른쪽 기슭 병풍바위(屛巖) 위에 동향하여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의궤의 묘사된 정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위패를 모신 정당은 3칸×3칸으로 전돌이 깔린 단 위에 올라서 있고, 사방에는 담이 둘러쳐 있다. 담의 전면에는 삼문(三門)을 두고, 삼문의 북쪽에는 외부를 향해 문이 열린 재실(齋室)을 두어 관리인이나 제사 참석인들이 사용하게 하였고, 남쪽으로는 담장 안쪽으로 열린 전사청이 있어 제사에 사용되는 용품을 보관하게 하였다. 사당 안 가운데 탁자 위에는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 음력 첫 달(孟朔)에 제사를 드렸다.

 

수원화성 행궁

 

옛 모습이 다시 태어나는 성신사(城神祠)

화성성역이 막바지에 다른, 정조18년(1796) 7월에 시작한 성신사 건축은 한 달도 되지 않아 마무리되고 성신사의 위패(位牌)는 길일(吉日)을 기다려 9월 19일에 정당(正堂)에 모섰다, 선신사는 팔달산 오른쪽 기슭 병풍바위(병암(屛巖)위에 동양하여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아 의궤(儀軌)의 모사된 정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위패를 모신 정당은 3칸×3칸으로 전(磚)돌이 깔린 단위에 올라서 있고 사방에는 담이 둘러쳐 있다, 담의 전면에 삼문(三門)을 두고 삼문의 북쪽에는 외부를 향해 문이 열린 재실(齋室)을 두어 관리인이나 제사 참석인(參席人)들이 사용하게 하였고 남쪽으로는 담장 안쪽으로 열린 전사청이 있어 제사에 사용되는 용품을 보관하게 하였다,

 

사당 안 가운데 탁자 위에는 위패을 모시고 매년 봄 가을 음력 첫달(맹삭(孟朔)에 제사를 드렸다,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성신사를 2008년 10월까지 복원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네스코 세게 문화유산 수원 화성을 지키는 신(神)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는 1796년 9월 1일 지금의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팔달산 기슭에 지어진 건축물로 1963년 사적 제3호로 지정됐지만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뒤 터만 남아 있다 시(市)는 12억원을 들여 팔달산에 세워져있는 강감찬(姜邯贊) 장군 동상(銅像)을 내달까지 광교공원으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사당(祠堂)를 짓고 주변 120m에 담을 세울 계획이다,

 

강감창 장군은 지금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에서 태어났지만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애국 조상 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전국 각 시 군마다, 위인의 동상을 세워 정신을 본받도록 지시함에 따라 연고가 없는 수원의 팔달산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신풍루 좌측 남쪽처마와 팔달산 효원 종각쪽 방향

 

 

 

 

 

효원의 종각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 만들었다.

 

 

 

● 효원(孝園)의 종(鐘)

팔달산 정상에 있는 이 종은 유서(由緖)깊은 효원의 성곽도시이자, 날로 발전해가는 수원시의 드높은 기상(氣象)은 나타내는 효의 상징(象徵)으로서 그간 주요행사에 타종(打鐘)해왔던 팔달종(유형문화재 69호)이 300여년이 경과하여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작고 소리가 탁하며 울림이 없어 더 이상 타종이 어려운 한계(限界)에 이르러 1991년 11울 4일 종주조추진위원회(鐘鑄造推進委員會)를 구성 그 제작을 전문가들에게 의례하여 1년여만에 왕성하였으며 종명은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收斂)하여 효원의 종으로 명명하였으며 또한 온 시민에게 효행심을 심어주고 영원한 화합과 전진을 다지는 한편 선진시민상(先進市民像)을 구현(具現)함으로서 시민이 한마음을 이루는 구심적(求心的) 표상으로 삼고자 재작된 것으로써 우리시의 상징물인 시목(市木)(은행) 市花(철쭉) 시조(市鳥)(비들기) 그리고 화성과 화홍문을 전면(全面)에 새겼으며 그 규모는 구경(口經) 2, 15m 높이 3, 54m이고 총중량이 3, 300관(貫)(약 12, 5톤)에 이르는 대형 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 효원의 타종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효의 도시 수원의 상징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종각을 항시 개방하여 관광객이 스스로 타종하면서 소원을 빌도록 하였다,

운행시간은 동절기 0900 ∼ 17,00 타종요금 1 ∼ 2인 1,000원 (1회 3타종) 3 ∼ 4인 2,000원

 

 

 

 

 

 

복원되지 못한 화성(華城) 시설물(施設物)

 

⦿ 남은구(南隱溝)

남은구는 숨겨진 도랑이란 뜻으로 성안의 물을 빼내기 위한 비밀(秘密) 배수구이다, 남서적대의 서쪽 40보 1척 남치(南雉)의 동쪽에서 남은구의 서쪽까지 71보 거리에 있다, 팔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신풍루를 지나 남지(南池)에 물을 대고 이 은구로 빠져나가게 되어있다, 성벽을 쌓을 자리에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짧은 기둥을 세 줄로 세워 네 개의 도랑을 만들었다,

 

그 안쪽으로 기둥을 보이지 않도록 엇갈리게 설치하여 사람이 은구로 성을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였고 도랑위에 돌을 얹어 성벽을 쌓았다, 남은구를 통과하던 개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남은구와 그 주변 성곽은 미복원상태이다,

 

 

⦿ 북은구(北隱溝)

북은구는 북서포루(北西砲樓)의 서쪽 90보 북포루(北舖樓)의 동쪽 37보 지점에 있다, 만든 방식은 남은구와 같고 도랑의 전체 넓이는 2보 5척이다, 성밖에서 들어오는 가느다란 도랑물이 흘러들어 성안의 북지(北池)에 물을 댄다, 북은구는 1975년 화성복원공사 당시 성벽의 및으로 유구(流溝)가 확인되었으나 심히 교란되었고 연못을 복원하지 못한다면 북은구의 복원도 어렵다는 이유로 복원공사에서 제외 되었다,

 

 

⦿ 남지(南池)

남지는 상하 두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팔달문과 팔달산 사이 현재 성벽이 끊어져 있는 곳에서 중앙극장 뒤편에 있었다, 일명 와룡지(臥龍池)라고도 한다, 상남지는 1794년(정조 18) 3월 14일 공사에 착수하여 4월 1일 공사를 마쳤다, 가운데에 작은 섬 1개를 만들고 홍련(紅蓮)과 백련(白蓮)을 심었다, 하삼지는 1796년(정조 20) 7월 7일 공사에 착수하여 7월 27일 공사를 마쳤다, 가운데에 2개의 작은 섬을 만들었다, 하남지는 상남지와 규모가 같고 깊이가 더 깊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은구도(隱溝圖)에는 바로 남지의 원형(原形)을 담고 있는 것으로 당시의 연못조경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성전도에는 상하 연못 사이에 정자(亭子)가 그려져 있어 이 곳이 유락(遊樂)의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창의 남에는 상지 가운데 작은 섬 하나와 하지에 섬 두 개가 있으며 두 못의 사이에 정자(亭子)터가 있다고 기록 되어있다,

 

 

⦿ 북지(北池)

북은구(北隱溝) 안쪽에 있는 북지는 성 밖의 도랑물을 끌어서 만든 연못이다, 1794년(정조 18) 3월 14일 공사에 착수(着手)하여 4월 4일 공사를 마쳤다 ⦗화성전도(華城全圖⦘에 그러진 북지는 하나의 연못으로 북지 앞에 담을 둘러친 2채의 누각(樓閣)이 있었다. 북지는 북은구 안에 있는데 성 밖의 도랑의 물을 끌어대었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수원성 복원 정화지의 조사기록에는 상북지는 완전히 유실되었고 하북지 일부가 남아있어 복원이 가능하였으나 이미 주택가가 들어서 있어 화성복원공사 때 제외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위의 기록을 미루어 보면 북지는 어는 때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1개의 연못이 추가로 만들어져 상하 연못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지에는 수초와 연꽃을 심고 가꾸어져 19세기 초반 정리된 수원 팔경(八景) 중 북지상연(北池賞蓮) 연꽃 곱게 피어난 북지)이란 아름다운 경관(景觀)으로 발전한 것으로 짐작된다,

 

 

⦿ 동지(東池)

동지는 상하 2개의 연못으로 만들어 졌다, 1795년(정조 18) 4월 7일 공사에 착수하여 4월 21일 공사를 마쳤다 동지는 오교(午橋)를 건너 매향동(梅香洞) 어귀와 구천동(龜川洞)의 북방에 있었는데 1894년에 작성된 ⦗기전영지⦘에 의하면 동지(東池)는 없고 동창지(東倉池)로 불리우는 연못이 기재되어있다, 아마도 동지 주변(周邊)에 창고가 있어 연못을 기록(記錄)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전도⦘를 살펴보면 동포루(東砲樓)와 동이치(東二雉)사이에 2개의 연못이 그려져 있은 것을 볼 수 있다, 1975년 화성복원공사 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미쳐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 군무소(軍務所)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군무소는 이른바 군무의 필요에 응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서노대와 화성장대 중간 북쪽에 위치하였던 이 집은 화성장대 뒤에 건립한 후당(後堂)으로 전면 3칸(5, 58m) 측면 1칸(1, 86m)에 남측면에서 반칸퇴(半間退)를 달고 북측에서 전(塼)돌 담장을 둘렸고 동측 담 끝에 홍예문을 설치하였다, 1975년 복원공사에서 지표(地表)가 교란(攪亂)되고 주춧돌도 없어 복원에서 제외되어 미복원 상대이다, 수원시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점차적으로 발굴 조사하여 복원할 예정이다,

 

 

 

화성의 기타 시설물

 

 

지지대(遲遲臺)

경기도 유형 문화제 제24호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번지)

 

지지대비 비각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효심(孝心)이 느꼐지는 지지대 고개는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境界)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렀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느리고 더딜 지(遲)자를 쓴 지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고 돌아오던 언덕에 위치한다, 화산의 현륭원 참배(參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멈추어 서게 하고 한참을 머무르며 부친의 묘역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렀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 장조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화산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주 늦어져 이 고개를 느리고 더딜지 (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지지대 고개에서는 1807년 순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비문을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쓴 지지대비를 만날 수 있다,

 

 

지지대비 비문탁본과 비각

 

 

 

 

 

만석거(萬石渠) (만석공원)

만석거란 ? 저수지가 축조되어 1만석이나 더 생산 하였다 해서 만석거라 불렀다, 장안문의 북쪽 5리 정도 떨어진 지하동(芝荷洞) 입구 진목정(眞木亭) 아래에 있었던 만석거는 화성성역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정조 18년(1794)에 전국적으로 극심(極甚)한 가뭄이 발생하여 축조가 결정되었다,

 

 

만석거(일왕저수지)

 

같은 해 11월에 화성성역을 중단(中斷)을 결정하면서 장안문 북쪽의 황무지(荒蕪地)를 개간(開墾)하고 안정된 농업경영을 위해 수리(水利)시설을 축조하였다, 만석거는 정조 19년(1795) 3월 1일 축조공사(築造工事)가 시작되어 5월 18일에 와성되었다, 만석거의 수로 입구에는 중국의 강남지역에서 널리 보급되었던 형태(形態)의 수문인 수갑(水閘)을 설치하였다, 만석거의 제원을 보면 둘레가 1022보 깊은 곳이 11척 얕은 곳이 7척 전체 길이가, 725척 아래쪽의 두께는 52척 위쪽의 두께는 17척(모두포백척 사용) 남짓이었다, 만석거의 축조 재원(築造財源)은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예산(豫算)(內下錢) 2만냥 중의 잔금 5,700냥으로 충당하였다,

 

둑은 남쪽의 흙 낭떠러지에서 시작해서 북쪽의 돌, 낭떠러지에 이르는데 북단에 수구(水口)를 파서 만석거 수원(水源)인 광교천(光敎川)이 통하는 길을 만들었고 수구를 통하는 물 길를 여의동이라고 하였다, 수구 위에는 여의교(如意橋)라고 부르는 나무다리를 제방(堤防)의 너비와 나란하게 하여 가마가 통할 수 있께 하였다, 이것은 제방의 축조가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조는 만석거를 지나 장안문을 통과 하여 현륭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원행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만석공원에 있는 여의정

 

 

제방이 시작되는 남단에는 또 하나의 수구를 만들어 이 곳을 통해 관내수를 뽑아낼 수 있게 횡으로 막아 수로가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수문을 열어 관개수를 내보내게 되면 당시 개간한 대유평(大有坪) 전체에 물을 댈 수 있었다, 또한 저수지 가운데는 작은 섬을 두어 화목(花木)을 조화(造化)롭게 심고 호수(湖水)에 연꽃을 심었으며 호수 남단의 약간 높은 곳에는 영화정을 세워 정자에서 만석거 부근을 조망(眺望) 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영화정

 

만석거의 관리를 위해 감관(監官) 1명 감고(監考) 1명을 두었으며 매년 소요되는 수리비용은 태유평의 조(租) 중에서 100석을 할당하였다, 만석거의 축조를 통해 화성 장안문 밖의 천박(淺薄)한 황무지에는 옥토(沃土)로 변모하여 그 해에는 100석이 넘는 수확(收穫)을 거두었다, 특히 정조 21년(1797) 정조 22년(1798)에 연속 된 전국적인 가뭄에 그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 당시 삼남지역(三南地域)은 전부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 지역은 만석거로 인해 가뭄을 무사하게 극복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만석거는 송죽동에 만석공원으로 개발 매립되어 원래 수면의 반 이상이 주차장 데니스장 자전거관장 도로등으로 변하였고 현재는 원래의 ⅓ 가량만인 남아 있다,

 

 

 

 

 

 

 

 

 

 

 

축만제(祝萬提) 서호공원(西湖公園)

정조 23년(1799)에 또 하나의 제언(提言) 축만제를 화성의 서쪽 5리의 평지에 축조한다, 축만제는 길이 1246척 너비 720척 높이 8척 두께 7척 5푼 깊이 7척이며 2개의 수문이 설치된 대교모 저수지로 이를 통해 농업용수의 혜택을 받은 전답은 232 석락(石落)(* 섬지기)에 이른다 축만제는 농업용 저수지외에도 낙조(落照)와 잉어가 유명하였으며 특히 잉어는 약용(藥用)으로써 궁중(宮中)에 진상(進上)되었다고 한다,

 

 

서호의 철새와 1970년대의 서호

 

축만제도 만석거와 마찬가지로 관리 인원으로 감관 1명 감고 1명을 두었다, 축만제는 후에 서호(西湖)로 개명되었고 현재에도 화성 인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다, 축만제의 남쪽에는 서오의 경관(景觀)과 풍치(風致)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항미정(杭眉亭)(경기도 향토 유적 1호)이있다,

 

향미정

 

향미정은 순조 31년(1831)에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朴綺秀)공이 건립한 정자로 석양에 비치는 서호 주위에 여기산(麗妓山) 그림자를 보고 읊은 소동파(蘇東波)의 시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美)이니라“ 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현재 화서 2동에 서호공원으로 조성 되어있으며 공원(公園)내에는 농업과학기술원의 행정 및 연구시설이 인접하여있고 서울대학교 농생대 캠퍼스도 위치하여 한국농업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흙길이 바로 축만제의 제방이다.

 

 

 

호수중앙의 섬이 바라다보이는 서허공원의 풍경

 

 

서허공원의 석양

 

 

 

일월저수지(日月貯水池) (일월공원(日月公園)

일월저수지는 만석거, 서호(축만제) 일월저수지 순이다, 만석거은 정조의 애민정신(愛民情神)이 풍년을 불러왔고 서호 낙조(落照)는 수원팔경(水原八景) 중 하나이다, 두 곳 모두 역사(歷史)가 깊다, 일월저수지는 1939년 12월 3일 수원농지 개량조합이 농업용수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유입(流入)되는 자연 저수지가 없어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 내에서 발생하는 오폐수(汚廢水)를 처리(處理)해 1일 1,300톤을 일월공원 유지(維持) 용수로 방류하고 있다,

 

일월공원은 수원시와 농촌지흥청(農村振興廳) 작물(作物)과 학원이 서수원 일월공원 내에 도심 속의 밀 보리밭 자연(自然) 학습장을 공동(共同)으로 조성 시민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수원시는 겨울 작물을 수확한 후에도 논촌진흥청과 협조해 콩, 조, 수수, 기장, 해바라기등 여름 작물 체험장(體驗場)을 시민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광교저수지(光敎貯水池) (광교유원지(光敎遊園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에 있는 광교저수지는 註(1) 광교산 582m 기슭에 있으며 1943년에 완공되었다, 제방(堤防) 길이와 높이는 각각 373m, 185m이며 총저수량(總貯水量)은 243만t 만수면적(滿水面積) 033㎢ 이다, 북쪽에 솟은 광교산 백운산(白雲山) 564m 등에서 발원(發源)한 작은 계류(溪流)들을 막아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건설 하였으며 수원천 홍수 조절 및 용수공급 1953년부터는 수원시의 상수도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지만 본 저수지의 보호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저수아래 연무동쪽에는 수원시내를 지르는 광교천을 막아 조성(造成)된 광교유원지(光敎遊園地)가 있으며 규모가 큰 광교수영장도 있다, 유원지의 총 면적은 0037㎢ 수영장(水泳場) 시설규모 약 002㎢이다,

※ 註(1) 광교산은 경기도 수원시와 용인시에 있는 높이 582m의 산이다, 수원의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월내 이름은 광악산(光嶽山)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광교산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화성행궁

 

화성행궁의 야경

 

 

정조의 어쇄

 

 

 

 

 

화성행궁(華城行宮)앞 광장(廣場) 조성(造成)

일제시대 민족정기(民族精氣) 말살(抹殺) 정책으로 훼손(毁損)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복원된 화성행궁 앞에 과거와 미래의 꿈을 함께 펼칠 수 있는 광장이 지난 5월부터 만들어 지고 있다, 면적만도 2만 2331㎡ 자그마치 7천여평이며 사업비도 총 781억 5,000만원이 소요되는 큰 사업이다,

 

 전체 완공은 2008년 11월초 이다, 광장에는 옛 정조시대의 명단수와 신풍교가 복원됐으며 광장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어도(御道)(정조대왕이 화성행궁에 행차하던 길)와 옛길이 조성된다, 옛길은 신풍루 앞쪽에 만들어 보행자도로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분수와 인공 물길 등 주변 공간과 조경공간 휴식공간이 조성된다, 광장의 좌우 바닥에는 화성능행반차도(華城陵幸班‘次圖) 가운데 장용영(壯勇營)(정조 때 수원에 설치한 군영)의 군사훈련 모습을 담은 서장대성조도’와 혜경궁홍씨의 회갑연(回甲宴)을 그린 ‘봉수당진선도(奉壽堂珍饌圖)(화성을 완성한 뒤 벌인 잔치를 그린 그림)‘와 ’신풍루사미도(정조가 쌀을 나눠주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그려진다,

 

또 광장의 입구엔 조선시대 註1 장용영(將勇榮) 군사들이 익혔던 호국전통무예인 무예 24기 공연(公演) 장용영 수위의식(守衛儀式) 등 각종 공연과 행사 공간으로 활용될 마당이 마련된다, 화성행궁 앞 광장이 완공되면 역사 관광문화 공간으로서 앞으로 수원화성문화제등 축제와 문화예술 행사의 장소로 활용될 뿐 아니라 시민들의 열린 휴식공간으로서 화성과 화성행궁 종각(鐘閣) 등과 어우러진 문화 관광명소로서 더 많은 관광객(觀光客)과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올 것으로 예상(豫想)됨에 ,따라 지역의 경제 활성화(活性化)에도 한몫을 할 것을 기대된다,

 

원문출처 洪 淳 元의 블로그 http://cafe.daum.net/sw1932

 

 

 

화성과 화셩행궁안내도

 

 

화성행궁 전경

 

 

 

 

전각과 전각의 지붕과 처마도리 부용의 극치적 아름다움이

 

 

행궁 600여 전각중 일부

 

 

중양문전에는 체험현장

 

 

 

 

화성의 성곽과 담쟁이의 단풍

 

 

 

 

 

장용영(將勇營) 24技란

장용영(壯勇營)은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창설한 국왕 직속 친위 부대이다

 

1785년에 정예의 군사를 선발하여 만든 국왕호위부대 장용위를 확대 개편하여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을 제치고 총 병력 12,000명 규모의 최대 군영으로 육성 되었다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성으로 이장한뒤 형륭원이라 하고 수원에 장용영(壯勇營) 소속의 병력을 주둔시켜 호위를 전담케 하였다

1793년에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고 "수원화성"에 장용영 외영을 설치하여 군사도시로 육성하였다.

장용영은 국왕에게 절대 충성을 바친 치위부대로서 정조는 1793년 수원에 외영(外營)을 설치 행궁을 지키게 했다, 무예 24기는 화성에 주둔했던 당대 조선의 최정애 부대 장용영 외영군사(外營軍士)들이 익혔던 무예로서 역사 가치는 물론 예술적 체육적 가치가 아주 높은 문화유산이다,

 

 

 

1784년(정조 8)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를 실시하여 무과에서 무려 2,000여 명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이듬해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경과에 급제한 무사들을 흡수하여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호위 전담부대를 창설하였다. 그 뒤 1793년 그 규모를 확대하여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규장각과 함께 정조대 왕권 강화의 상징적 기구가 되었지만, 정조가 죽자 1802년(순조 2)에 폐지되고 말았다. 장용영은 크게 도성(都城) 중심의 내영(內營)과 그 외곽인 화성(華城 : 水原) 중심의 외영(外營)으로 편제되어 기존의 5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795년 다른 군영의 군대를 흡수해서 5사(司) 23초(哨)의 편제를 갖추었고, 장용사(壯勇使 : 장용영대장)가 이를 지휘하였다.

 

 

 

 

장용영 제조

장용영 제조는 군량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선발은 호조나 선혜청의 당상 가운데 이조가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왕의 낙점을 받아 임명하였다.

 

 

징용대장

정조 17년(1793) 서울에 설치했던 장용영 내영의 대장을 말한다. 정조 17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시킬 때, 수원에 장용영의 외영을 설치하면서 상대적으로 왕의 호위를 담당한 서울의 본영을 내영이라 하였다. 그리고 장용영의 우두머리였던 장용영병방을 어영청의 제도를 본따 관직은 사(使) 로 하고 문서에서는 대장으로 호칭하도록 하였다.

 

 

장용외영

장용영은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宿衛所)의 혁파 이후 1785년(정조 9년)에 설치된 금군(禁軍) 조직으로서의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발전시킨 군영이었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수원에 주둔하였다.

 

 

정용위

정조는 1785년(정조 9) 국왕의 호위를 위해 정예 금군으로 구성된 친위체제인 장용위를 창설하였다. 그 뒤 1793년 1월에 수원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의 호위를 위해 수원을 화성으로 개칭하고 장용영의 외영을 설치한 다음 수원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켜 장용외사의 직을 겸하도록 하였다.그리고 왕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던 서울의 본영을 자연히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용위는 내, 외영제를 갖춘 명실상부한 군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정조연간에는 가장 정예한 친위부대였다.

 

 

장용영 무사들의 조총사격훈련.

 

정조의 군제개혁

정조는 일련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정책을 시도하면서 특히 군사제도의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정조는 기득권의 저항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의 의의를 부단히 설파하는 한편, 왕의 뜻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친위부대로서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정조의 군제 재편성의 핵심은 당시의 오군영( 五軍營) 중심체제를 조금씩 줄여 국왕의 장용영으로 전환 집중시키면서, 군령체계를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오위(五衛)체계의 복구와 병조판서의 위상강화, 오군영체제의 축소 및 군영대장의 권한 제한, 장용영의 설치와 화성축조 등으로 나타났다.

출처: 문화원형백과사전

 

 

장용영과 무예24기

 

정조대왕때 실학자인 이덕무와 박제가에 의해 "무예도보통지"를 출판하였다.

무예의 달인이었던 백동수가 무예24기의 자세를 통일하여 무예도보통지를 펴내고 무사들에게 가르쳤다.

무예도보통지에는 24가지의 군사무예에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그림을 곁들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지상무에18기에 마상무예6기로 구성 총 4권으로 1권에는 장창,기창등이 있고 2권에는 쌍수도,에도등이 있으며 3권에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나라 고유검법인 본국검과 제독건,쌍검,월도등이 있고 4권에는 권법과 곤방등이 기록 되어있다. 실제로 장용영 군사 훈련시 교범으로 사용되었다.

 

 

 

 

정식 명칭은 24반 무예이다.

 

무예도보통지에는 24반무예가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다.

제1권 : 장창, 죽장창, 기창, 당파, 낭선제2권 : 쌍수도, 예도, 왜검, 교전부제3권 :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월도, 마상월도, 협도, 등패, 요도, 표창부제4권 : 권법, 곤방, 편곤,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

 

24반 무예의 형성 과정

 

우리 무예가 조선 건국 이후 임진 조국전쟁 시기까지 거의 200여년이나 계속된 평화무드 속에서 무예 자체는 궁시일시(활쏘기 기술 하가지)로 축소되고, 외래 침략세력에 대한 경각심은 이완되어 그야말로 무방비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이를 모체로 우리의 24반 무예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24반 무예는 비록 중국의 『기효신서』나 『무비지』를 참조하고, 그들을 통하여 실전무예를 전수받은 바 있지만, 이를 집대성하고 창조적으로 개량하였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것들을 발굴하여 이 바탕 위에 외래의 것을 주체적으로 소화 흡수한 것이다.

 

24반무예가 형성되는 과정은 시간적으로 200여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이 경과하였으며 공간적으로는 동양 3국이 망라되었고, 형성 초기부터 일류 명사와 재사들이 동원되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형성된 24반무예는 구한국군대가 해산되기까지 조선왕조의 체제를 수호하고 겨레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온 호국무예였으며,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서부터 시작된 의병투쟁에서도 직접적 전투수단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24반무예는 우리의 전통무예이며 우리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지키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사단법인 국술원총재이며 국술원창시자인 서인혁국사의 국술교본 인사말에서도 엿볼수 있는데 그글을 몇자 옮겨본다.

 

『우리 한국의 전통무술은 그 뿌리가 깊고 다양하며 우수하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국술원은 한국의 전통무술인 궁중무술, 사도무술, 불교무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수십년간 우리의 전통무술을 종합하여 그 술기들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국술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오랜 세월 연구하고 개발한 술기들을 이처럼 엮어 놓으니 저는 감개가 무량합니다.

 

우리 국술의 술기는 그만큼 뛰어나며 한국 전통무술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국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수련하시길 바랍니다.저는 국술을 수련하는 모든 분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술인은 술기를 수련하고 연마하는 것 이상으로 무인 정신으로 마음을 수련하여야 하며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무인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가지 소개할까 합니다.서기 1790년에 정조왕은 이덕무를 통해 (무예도보통지)라는 4권의 책을 저술하여 무술을 익히는데 도움을 주게 했는데, 이 무예를 익힐 때 먼저 다섯 가지 이외의 어떠한 기술과 기법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정신은 첫째는 덕망, 둘째는 신뢰성, 셋째는 지성, 넷째는 용감성, 다섯째는 정신수양이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철칙은 현재 국술원의 정신과 같으며 국술의 기술이나 기법은 이 다섯 가지 정신을 수련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인정신은 이처럼 충, 예, 신, 인, 덕이 그 근본 정신이어야 하며 이는 곧 무인의 정신이며 국술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저는 국술인 모두가 이 국술 정신으로 마음과 정신을 수련하면서 국술의 술기를 연마할 것을 ...............................』

 

 

 

 

 

이와 같이 우리의 24반 무예는 아직도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될 것이며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화성행궁 수위식을 재연하는 장용영 무사들.

 

 

군사훈련과 수위 교대식을 알리는 취타대의 연주모습.

 

 

백성을(관광객들)위무하는 정조대왕, 

 

 

정조대왕의 집무모습

 

 

수위교대식에  참여키 위해 행차하는 정조대왕.

 

 

사도세자가 갇혔던 뒤주와 똑같은 뒤주.체험현장으로 활용

 

 

 

 

 

출처/화성행궁에서의 기연

 

이명박 정부에 고함 / '나는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

http://blog.daum.net/hqlove365/190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

 

 

팔달문(八達門)

 

 

 

 

 

 

 

 

장안문(長安門)

 

 

 

 

 

 

 

화서문(華西門)

 

 

 

 

 

 

 

 

 

 

 

 

 

화홍문(華虹門)

 

 

 

 

 

 

 

 

 

 

 

 

 

 

 

 

 

서장대(西將臺)

 

 

동남각루(東南角樓) 

 

 

서남각루(西南角樓)

 

 

 

 

 

 

 

 

 

 

 

 

화성 안내도

 

 

 

 

 

 

 

⦿ 정조대왕 기념 조형물

건립목적 ─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조하고 효를 몸소 실천하며 끝없는 개 혁과 애민정신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신 정조대왕을 기리 는 역사적인 조형물을 21 C 문화의 세기에 걸 맞는 수원의 상징물로 건립하여 후세의 영원한 산 교육장이 되도록 함,

 

작품성명 ─ 화성의 성곽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단순, 함축시킨 미니멀 추상 의 현대적 조형미,

─ 공간의 음과 양이 상하 좌우 입체적으로 소통되는 다기능 복 합 공간 구조,

─ 조형물의 중심부 만천위에 사용을 초월해 우리 앞에 우뚝 선 정조대왕동상,

─ 작품의 내외 벽 동선을 따라 실사부각한 원형도와 도설 업 적 등 여사기록

─ 역사도시 수원의 오늘과 앞날의 발전을 상징하는 미래비전 수원 “부조,,

제작 김 인 겸 참가작가 이 두 한, 김 동 숙

중공 2003년 6월 수원시

 

 

 

 

 

 

 

 

화성안내도

 

 

 동북포루

 

 

용연의 봄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겨울

 

 

화성의 야경

 

 

 

 

 

 

 

 

 

 

 

 

 

 

 

 

 

 

 

 

 

 

 

 

 

 

 

 

 

 

 

 

 

화성관광열차

 

 

 

화성관광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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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다음카페 꽃향기많은집.수원뉴스외 다수

본문출처/문화원향백과사전. 한국어워키백과. 홍순원의블로그외..

본문은 한국어워키백과와 홍순원의 블로그의글중 수원화성을 인용.이를 기초로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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