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政治.社會/<시사IN> 공식 블로그

9·11 테러 (September 11 attacks)

호남인1 2011. 5. 1. 13:04

 

 

 

 

9·11 테러 (September 11 attacks)

 

 

 

9·11 테러(September 11 attacks)는 2001년 9월 11일 항공기 납치 동시 다발 자살테러로 오전 8시 45분부터 오전10시 30분 사이(한국시각 ; 9월 12일 오후 9시 45분~ 오후 11시 30분)에 뉴욕 세계무역센터건물이 붕괴된 사건을 말한다.(* 부속건물 추가 붕괴는 미국 시각 오후 5시 20분) 이로 인해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워싱턴 D.C의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을 받은 대참사를 말한다.

 

 

사건은 4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간대별 상황은 다음과 같다.

 

 

07시 59분 92명의 승객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 소속 AA11편이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날아 올랐다. 이어 08시 1분 4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93편이 뉴저지주에서 샌프란시스코로, 08시 14분 6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175편이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09시 64명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의 AA77편이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각각 향했다.

 

 

이것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3초전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유럽 관광객이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이 사진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08시 45분 AA11편이 항로를 바꾸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09시 3분 UA175편이 남쪽 건물과 충돌하였다.

09시 40분 AA77편이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하고, 이어 약 9시 59분 경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붕괴된 뒤, 10시 3분 UA93편이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하였다.

10시 30분 경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여파로 인해 17시 20분 47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제 7 세계 무역 센터 빌딩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고, 세계 경제의 중심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인 뉴욕은 하루아침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미국의 자존심이 일거에 무너진 것은 차치하고,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로 인해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CNN 방송망을 타고 시시각각으로 사건실황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 역시 경악하였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천둥과 번개` Op.324

 

 

 

 

 

 

 

세계경제도 이 동시 다발 테러 앞에서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국제금리가 단숨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시장이 흔들렸다. 미국은 사건 직후 일주일간 증권시장을 열지도 못하였으며,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도 차단되었다.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제2의 진주만 공격'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미국 건국 이래 본토의 중심부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266명 전원 사망, 워싱턴 국방부 청사 사망 또는 실종 125명, 세계무역센터 사망 또는 실종 2,500~3,000명 등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명 피해만도 2,800~3,500명에 달한다. 경제적인 피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가치 11억 달러(1조 4300억 원),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약 52조 원),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약 52조 원) 외에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납치당한 4대의 항공기에는 3~5명의 납치범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조사 결과 범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출신의 조종사들로 알려졌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카에다(Al-Qaeda)를 주요 용의자로 보고 있으며, 그 밖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산하의 무장조직인 하마스(HAMAS), 이슬람원리주의 기구인 지하드,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다른 이슬람 테러조직들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09시 31분,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은 이 테러사건을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고, 이어 전국의 정부 건물에 대피령을 내리는 한편, 국제연합·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디즈니랜드 등 주요 건물을 폐쇄하였다. 같은 날 금융시장 폐장 결정을 내린 뒤, 뉴욕과 워싱턴에 해군의 구축함 등 장비를 파견하였다.

 

9월 12일 테러 개입자들에 대해 사전 경고 없이 보복할 것을 천명하고, 이튿날 부시 대통령은 '이 테러를 21세기 첫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9월 15일 빈 라덴이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상군 투입 결정을 내리는 한편, 아프가니스탄의 인접국인 파키스탄을 설득해 영공 개방 등의 약속을 받아내고, 작전명을 '무한 정의 작전'으로 명명한 뒤 보복전쟁에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 7일, 미국은 서아시아의 '항구적 자유 작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공항과 탈레반 국방부, 잘랄라바드공항, 칸다하르 탈레반 지휘사령부, 헤라트공항 유류저장고, 마자르 이샤리프 탈레반 군장비 집결지, 콘두즈 탈레반 지역군사작전 지휘소 등에 50기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 알카에다의 훈련 캠프와 탈레반 정부의 군사시설 등에 엄격히 제한된 선별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한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영국 연합군은 2001년 10월 9일 아프가니스탄 주변에 350여 기의 항공 전력을 배치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에서 자유로운 전·폭격기를 이용한 공습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하였다. 이어 다음달 22일 연합군은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탈레반과의 전쟁을 종결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던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카에다를 뿌리뽑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끝내지 않고 이후 중동으로 눈을 돌려 2003년 3월 20일에는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20일 만에 완전 함락시키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대 테러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9·11 테러 음모론

9·11 테러 자작극 음모론이란 부시 정권이 유태 세력과 공동으로 9·11 테러를 실시했다는 자작극 혐의를 말한다. ‘진보연구학회’를 이끄는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9·11사건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그룹이 초기에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 LIHOP(let it happen on purpose): 정부가 테러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았음에도 일부러 무시하거나 테러리스트들을 방조했다는 주장.

• MIHOP(made it happen on purpose):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테러를 계획했고, 알카에다와 협조관계를 맺고 있다는 주장으로, ‘루스 체인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의혹을 다룬 영화 ‘JFK’를 감독한 올리버 스톤은 9·11사건을 다룬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개봉하면서 “음모론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미국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9·11이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1] 하지만 급작스러운 테러상황에서 유대인이 장악한 언론이 실시간으로 그 장면을 촬영했으며, 쌍둥이 빌딩의 20%를 렌트하고 있는 유대인은 한 명도 죽지 않았는데다가 부시 정권이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한 것을 비추어 보아 유대인과 부시 정부의 합작 테러사건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윙딩스 음모론

 

윙딩스체와 일반 글씨체의 비교. 실제로 "3"의 건물 모양은 건물이 아닌 문서 모양이다.

 

알카에다컴퓨터로 테러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는 음모론이다. 당시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비행기 편명인 'Q33NY'를 워드에 입력한 후, 이를 윙딩스(wingdings) 글씨체로 바꾸어서 보면 테러를 암시하는 문양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테러에 이용된 비행기 4대 중 'Q33NY'라는 편명의 비행기는 없으며, 전문가들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이야기라고 지적하였다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 김대중 정권은 국가 안보 회의를 소집하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3]

•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뉴스 특보가 철야로 방송되고, 국제전화 불통 사태가 벌어지고, 주요 언론사 인터넷 홈페이지가 마비 되는 등 전국민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4]

• '그라운드 제로'라는 MBC방송국 특집드라마가 2007년 방송되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희생자 집계

 

 

 

 

 

 

 

 

 

 

  1. 9·11테러 ‘음모론’ 진실은 어디 있나?, 뉴스메이커 742호, 2007-09-18
  2. 음모론 제기한 ‘무서운 스펀지’, 시청률 상승 《TV리포트》2007년 11월 12일.
  3. 정부, 테러대비 비상근무 돌입2001-09-12《연합뉴스》
  4. 시민 경악, 미국 가족들 걱정으로 밤새2001-09-12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