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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朴槿惠) -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호남인1 2011. 12. 22. 17:49

 

 

 

 

 

박근혜(朴槿惠)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박근혜

 

 

박근혜(朴槿惠, 1952년 2월 2일 ~ , 대구광역시)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현재 제18대 국회의원이며 전 한나라당 대표이다. 아버지는 박정희대통령이고, 어머니는 육영수이다. 종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천주교 세례명은 율리아나, 불교 법명은 선덕화(善德華)이다.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일대) 출신.

 

 

 

이력

 

생애 초기

박근혜는 1952년 대구시 삼덕동에서 육군 정보학교장 박정희 대령과 부인 육영수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경력과 전처소생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형제자매로는 언니 박재옥과 동생 박근령(훗날 박서영으로 개명), 박지만이 있다.

 

장충초등학교를 다녔고,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가 어머니 육영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한 1974년부터 대통령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한 1979년 10월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1975년부터 최태민의 권유로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였다.

 

신혼초의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의 사진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가장 안정적이였던 시기라고 하는 1950년대 초의 사진입니다.

사진아래 오른쪽아기가  박근혜의원이겠죠

 

양친의 서거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인 박정희육영수 양친이 서거한 후 남동생인 박지만2002년까지 사창가여관 등에서 윤락녀와 어울리며 상습적인 마약 투약에 빠져 지낸 것 등으로 인하여 맏딸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하였다.

 

 

박지만씨의 결혼식

 

 

박근혜와 최태민

박근혜는 어머니인 육영수가 서거한 다음 해인 1975년에 위로, 격려편지와 전화를 준 최태민이라는 목사를 알게 된다.  한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난 시점은 1975년 3월 6일이라고 한다.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서 기업인을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로부터 1인당 2천만~5천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았다.

 

이에 대해 박정희대통령이었을 당시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2005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1977년 9월 12일 박정희가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을 거세하고, 최태민과 관련된 구국봉사단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자신의 비망록을 공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김재규의 변호인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 보충서'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하였는데, 이 두 서류에 992자 분량으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김재규 측은 10·26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하였고, 김재규 변호인 항소이유서의 밝힌 최태민 관련 전문은 아래와 같다.

 

피고인(김재규 본인)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으며,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아래와 같이 최태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맨 우측이 최태민

 

김재규 측에 이러한 증언과 관련하여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어 최태민을 수사를 하였던 백광현은 김재규가 10.26 후에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한 최태민 사건은 김재규가 억지로 10.26의 명분으로 주장하였을 뿐이라고 증언하였다.

 

이후 최태민은 활동이 문제 삼아져서 1980년신군부에 의하여 활동을 못하도록 잠시 강원도로 보내졌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서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에 따르면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또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었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

 

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서영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해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정치 입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었지만 정치 입문은 하지 않던 박근혜는 1998년에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국회의원 후보 출마 때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에서 탈당 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었으나 비젼이 없자 대선 전에 복귀했다.

2002년 5월 12일 북한을 방문,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 5월 14일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미래연합 - 한나라당 합당 성명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저와 우리 한국미래연합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요한 시기인 이번 대선에서 정치개혁을 이루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위하여 한나라당과 합당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현재 국가적으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정치개혁입니다.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심없이 국가발전의 틀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진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를 영원히 놓칠 지도 모릅니다.

정치개혁은 바로 한국미래연합의 창당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강력하고 실질적인 정치개혁을 이뤄 국가발전의 초석을 만들어야 합니다.대선을 앞두고 저는 한국미래연합을 대표하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정치개혁과 남북관계개선, 여성 문제, 지역갈등 문제, 정치보복금지 등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회창 후보께서는 이 5가지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며 반드시 실천할 것을 약속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리 정치를 실질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초정파적이고, 범국민적 차원의 ‘정치개혁위원회’를 만들 것도 약속하였습니다.

저 역시 이 후보의 ‘국민에게 드린 10대 약속’ 에 뜻을 같이 했습니다. 정치개혁과 이러한 약속들은 곧 국민과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고, 꼭 지켜질 것입니다.

 

한국미래연합은 정치개혁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서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지분이나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정치에서 앞으로 지분이나 계파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치개혁에 솔선수범하기 위해서 이번에 큰 결단을 내려주신 미래연합의 지구당 위원장님들을 비롯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저는 깊이 감동했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으로 정권을 교체해서 진정 국민을 위한 정부가 탄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치를 부정부패없고 국민의 신뢰받는 정치로 개혁하고, 그 토대 위에 국력을 결집하여 국민이 편안하고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국민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당 대표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이 다수(133석/273석)이던 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려고 단식농성을 했다. 비슷한 성향의 언론과 학계의 지원이 있었으나 한나라당은 국민의 외면을 받고 물거품이 되었다.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유례없는 급락으로 최병렬 대표마저 사퇴하게 된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

기존의 다선의원, 중진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고,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 외의 선전을 하였다. 이로써 '역풍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 구해낸셈이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됐다.

 

6월 13일 오전 신라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5주년기념 기념 학술회의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학법을 직권상정해 처리했다. 당시 대표인 박근혜는 곧바로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됐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

 

국회의원 선출 선거 승리를 위한 한시적 당대표가 될 것이라는 일부 예상을 깨고 오랫동안 당대표 자리를 지켰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지충호가 휘두른 문구용 칼에 베어 얼굴에 심한 상처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에게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여 당 안팎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한나라당 현판을 떼어가는 박근혜 대표와 불법 천막당사 ⓒ 오마이뉴스

 

 

2007년 대선

2004년부터 한나라당의 위기와 재도약을 이끈 박근혜는 2007년 대선의 유력한 예비후보 중 하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당권과 대권의 분리 방침에 따라 2007년 대선을 1년 남긴 2006년 6월 16일에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에 돌입했다.

 

박근혜의 가장 큰 상대는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그 과정에서 청계천 복원, 버스노선 개편 등으로 인기를 끈 이명박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근혜는 이명박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전화상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명박에게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는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이명박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논란의 연장선상으로 이후에 대선 후보 자리를 박근혜에게 양보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출처/http://www.toda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17

나꼼수 정봉주 대법원 소환임박이 ‘박근혜 영상’ 불렀다.

 

 

이명박 정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나라당 내부에는 친이명박 계열과 친박근혜 계열의 논쟁이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박계 의원들의 숫자는 2011년 6월 현재 비공식적으로 90~1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의 대통령 선거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이재오, 이방호 등이 한나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상대적으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2008년 총선에서 이재오, 이방호 두 명은 적극적으로 이명박 계열의 정치인들을 후보로 내세우고, 공천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박근혜는 이에 대해 공천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수차례 비판하였으나 공천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근혜는 이에 대해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라고 격앙했다. 또 "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난 번에 경선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깨끗하게 승복했고, 한나라당에서 처음 제대로 경선을 한 것이 아니냐"며 "그로 인해 정치가 크게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잘못된 공천으로 그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공천을 가지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이 화합하기도 힘들고,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며 "정치 발전도 앞으로 기대할 필요가 없고, 한나라당의 발전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2008년 3월 12일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현역 의원 50% 물갈이에 합의했다는 설과 관련, "어마어마한 음모"라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박근혜는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하다하다 이런 술수까지 난무하는구나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며 "이 쪽(친박계)에 다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고 흥분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이 우리 핵심 누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끝까지 밝혀 내겠다"며 "이방호 사무총장이 친박계 핵심 인사가 누군지 못밝힌다면 영남권 물갈이를 50% 한다고 해 놓고 우리한테 다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원들과 이야기 나누는 이방호 사무총장

 

 

세종시 논란과 관련해 정부의 수정 의견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나라당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는 양상이다. 최근 박근혜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지지 비중이 1~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비중은 1~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북 지역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 해운대구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또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는 정운찬 총리의 논리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같은 비판은 10·28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행보에 속도를 붙이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세종시 조감도

 

 

친박연대 창당

대한민국 정당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한 정당이 친박연대이다. 박근혜라는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서청원, 홍사덕 등의 주도로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계 정치인들이 대거 탈당하여 친박연대를 창당하고, 다른 정치인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하였다. 박근혜는 이들과 행보를 같이하지는 않았지만 공천 결과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라는 강도높은 비판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라"는 발언을 통해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로 달성군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되었고, 이재오, 이방호는 낙선하였으며,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이라는 예상 외의 높은 지지율을 달성하였다. 친박 무소속 연대도 총 12명이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박근혜는 꾸준히 친박연대 및 무소속 친박 당선자들의 복당을 요구하였다. 친박 측과 앙금이 남아있던 강재섭 대표의 임기가 종료되고 박희태 전 의원이 대표로 부임한 뒤 마침내 친박 무소속연대 소속 의원과 친박연대의 지역구 의원 전원이 한나라당으로 복당하여 한나라당 내 친박의원 의석수는 6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친박연대의 전국구 의원 5명은 당명 개정, 독자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고 양정례, 서청원, 김노식은 당선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친박연대 출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정국' 6월 내내 그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한 차례 한 뒤 줄곧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본격적인 거리 투쟁으로 비화된 5월에도 그는 당을 떠난 친박 측근들의 복당 문제 얘기만 주로 했다. 이후 계속되는 복당요구에 네티즌들의 의해 '복당녀'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때문에 이미지가 실추하기도했다.

 

남북관계 경색이 지속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근혜는 '대북특사론'의 유력한 인물로 꼽혔다.

또한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의 유럽특사로 임명되어 계파갈등이 해빙될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복당녀 페러디

 

 

이명박과의 관계

2007년 대선 이전에 있었던 경선때부터 박근혜는 이명박과 경쟁을 해오며 갈등을 겪어왔다. 경선 당시 박근혜 진영은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주장을 하거나,위장전입 문제도 파헤쳐 이명박은 이때문에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했다.

이러한 갈등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친박계 의원들의 한나라당 복당 문제로 인해 박근혜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라는 말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으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때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용산참사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하였으며, 한나라당에 의해 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박근혜가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을 던지는 등 정책 문제에 대한 시각차이와 개인적인 갈등들이 복합적으로 남아있었다.

 

2009년 4월 7일 박근혜 전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이상득의원의 정치개입논란에 대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라며 “이번 사건은 정치의 수치”라고 정면 비판했다.

 

그러다가 2009년 이후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박근혜의 반대론과 관련해서 2월 9일 이명박이 "세계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며 '강도론'에 비유하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다음날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이명박과 친이계를 강도에 비유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자 청와대는 "박근혜에게 한 말이 아니고 원론적인 부분을 말한 것인데 박근혜가 과민반응했다"며 선후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대통령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박근혜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했으나, 박근혜는 "(발언이)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며 사과를 거부하였다.

그러던 과정에서 청와대가 박근혜를 '한나라당 전 대표'가 아닌 '박근혜 의원'으로 호칭을 바꾼 데 대해 친박계 의원들은 "전면전에 돌입하자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며 이동관의 사퇴까지 요구하였다.

또한 친이계 정두언 의원은 "대통령한테 막말까지 하는 것을 보니까 자신이 마치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며 박근혜를 비난했다. 이렇게 둘의 사그라들지 않는 갈등에 대해 중앙일보는 '경선과 대선을 거치며 둘 사이에 큰 불신이 생겼으며, 이명박도 박근혜와의 화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 이상득 의원.

 

정두언, 왜 이상득 의원 못 잡아 안달인고?

http://v.daum.net/link/18887358?srchid=IIMy3LCC000

 

 

2010년 8월 22일 이명박과 박근혜의 회동이 11개월만에 성사됐다. 95분동안 진행된 회담은 보좌관도 없이 완전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회담 내용들은 거의 공개가 되지 않아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동아일보는 "李-朴회동 ‘깜짝쇼 찔끔 공개’ 국민 무시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대통령이 여당의 실력자를 만나는 것은 중요한 국정행위다. 그런데도 비밀 회동 방식을 택하고, 더구나 회동 결과를 청와대가 당당히 발표하지 않고 박 전 대표 측이 ‘찔끔 공개’한 것은 ‘그들만의 정치'"라며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명지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김정일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여권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가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지 개인끼리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라며 비공개 회담은 음모론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 원안이 통과되고 나서 한동안 박근혜와 친이계와의 갈등은 잠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2010년 말부터 한나라당은 개헌 논의를 시작했는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박근혜는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친이계와의 갈등이 다시금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현재까지 한나라당이 추진한 개헌 논의 대부분은 친이계가 주도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이재오가 있다. 이재오는 박근혜가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대통령이 다 된듯이 행동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10일 낮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미소 띤 얼굴로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일요신문 /이명박-박근혜 회동 그후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80516181314440&p=ilyo

 

 

 

2010년 지방선거

2010년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달성군수로 출마했던 한나라당 후보를 박근혜가 적극적으로 유세에 지원했음에도 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박근혜는 "달성군민이 판단한 것도 존중한다"고만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차기 대선 후보로써의 지지율도 사상 최대치로 떨어져 25.1%를 기록하는 등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으나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담 이후 이탈했던 지지층 세력을 회복함과 동시에 미지지층도 끌어드리면서 최근에는 다시 30%의 지지율을 회복하며 35% ~ 4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는 2위인 손학규 후보와 20% ~ 25%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대선 행보

그동안 차기 대선 후보로 지지율 1위를 기록해왔던 박근혜는 각종 사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짧게 언급해오긴 하였으나, 이렇다할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0년 하반기부터 차기 대선 행보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12월 20일 열린 공청회로 이 자리에서는 복지가 화두가 되어 토론을 실시했다.

박근혜는 인사말을 통해 "서구 선진국들의 전통적 복지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며 맞춤식 생활보장형 복지국가를 제안했다.

이후 12월 27일 박근혜의 대선 구상을 내놓을 '국가미래연구원'이 출범했다. 출범식에는 대한민국내 학자들과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그 얘기는 감추고 무조건 복지만 잘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

 

 

 

정치 행보

박근혜는 한나라당 내에서 박정희 친화적인 정치성향을 대표한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이 대거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드는 등, 여전히 한나라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한나라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정책적 측면

2005년 열린우리당4대 개혁 법안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4대 개혁 입법' 논쟁 당시 사학법 개정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고무·찬양과 같은 독소 조항을 빼자고 주장했다.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북한 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내에서 김정일을 만난 정치인은 박근혜가 유일하다. 이는 박근혜가 남북 관계에 대해 한나라당 주류의 인식과는 다른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명박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정국'때에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미디어법에 대해서는 "직권상정하면 미디어법 반대표 던질 것"이라며 "여야합의처리를 할것을 요구한다"라며 반대입장을 나타냈다.  또한 미디어법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이 박근혜의 지적을 받아들였다며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직권상정에 찬성하였다.

 

세종시 법안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또는 원안 플러스 알파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청문회에서 5·16 군사정변은 구국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 박근혜는 뉴라이트 세력과 가까운 모습을 몇 차례 보여주며 역사 인식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면을 드러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길은 다르지 않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선진화를 위해 '공동체 자유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한다는 것도 같다"고 한 바 있다.[53]또한 뉴라이트 교과서를 극찬하며,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 등의 교과서 수정 움직임에 지지를 표한 바 있다.

 

• 일부에서는 자신을 보수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노선은 중도라고 주장한다. 박근혜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친박계'와 달리 '친이계'는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가 포진해있고, 4대 개혁 입법 대해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 사실과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이명박 후보가 실용주의를 내세웠기때문이라는 이유다.

 

출처/http://cafe.daum.net/nde1/7qaX/4876?docid=YQZn|7qaX|4876|20080930173633&srchid=IIMT90cA10

 

 

줄푸세

• '세금은 이고, 각종 규제는 고, 법기강은 운다'는 뜻으로 그의 대통령후보 경선시 주요 정책구호였다. '줄푸세'는 이후 제17대 이명박정부의 정책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 이 정책은 그의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 대표적 정책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신분제등으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던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라기보다는,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로부터 억압받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에 더 가깝다고 평가할 만하다.

 

 

 

 

의정 행보

 

천안함 침몰 사건

제 18대 국회에서 2010년 06월 29일에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도발 규탄 및 대응조치 촉구 결의(의안번호 1808656)의 원안가결을 찬성하였다.

 

 

연평도 포격

제 18대 국회에서 2010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하여 대한민국 해병 2명 및 대한민국 국민인 민간인 2명을 도륙한 연평도 포격을 규탄하기위한 북한의 무력도발행위 규탄 결의안(의안번호 1810030)을 찬성하였다.

 

 

탈북자

제 18대 국회에서 2010년 3월 2일에 탈북자들을 위한 지역적응센터, 상담사제도,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설립등을 위해 발의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의안번호 1807771)을 찬성하였다.

 

 

복수국적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회복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위해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

 

 

재외국민 참정권

제 18대 국회에서 2009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24조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약 240만명 대한민국 국민의 금지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회복하기위해 발의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1803725) , 주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안번호1803724), 그리고 국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0737)에 모두 찬성하였다.

 

천안함의혹제기 자료

 

출처/ http://cafe.daum.net/BetWin/J3Im/3008?docid=1O8i3|J3Im|3008|20110823141102&srchid=IIMxhAQu400&focusid=A_1458DF4E4E5335C7170C11

 

 

평가

박근혜는 정치인들이 자주 겪는 부정부패와 연루된 전력이 거의 없다. '수첩 공주'라는 별명을 얻게 한 박근혜의 신중한 태도는 안정적으로 당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전국적 선거때마다 보여주는 박근혜의 큰 영향력은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17대 총선 이후로 친박계 성향의 의원들이 한나라당에 공천을 받지 못하자 박근혜가 복당을 계속 요구함으로 인해 '복당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독재자의 딸이며,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보수적이며, 콘텐츠가 부족한 감성형 지도자"로 평가한다.  일부 야당의원들은 미디어법이후로 그를 기회주의자로 평가한다.

 

미디어법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했고, 일부 수정된 미디어법을 찬성하여 다시 한번 박근혜의 영향력을 확인했다. 하지만 미디어법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로 그의 원칙주의는 깨졌고 지지자들에게도 큰 비판을 받았다.

 

유명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적극 활용하여 지지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의 미니홈피는 2008년 4월에 730만명이 넘는 방문자를 기록했다.

 

2007년 대선 이후로 박근혜는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내준적이 한 번도 없으나 2011년 9월 이후로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에 힘입어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59.0%, 박근혜 32.6%로 안철수가 압도적인 지지율을 나타내면서 '박근혜 대세론'이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

 

안철수원장

 

 

 

 

 

비판

 

권위주의

한나라당이명박계는 “박근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폐쇄적 조직문화가 팽배해 있다”며 “두 차례 대선에서 실패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친박계 의원은 “국민들은 박 전 대표를 더 이상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있는 정치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지도자로 바라보고 있다”며 “박 전 대표를 흠집내기 위한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친이계는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이라며 비판했다. 한나라당 강명순 의원은 "자신은 유신시절 빈민운동을 하느라 고생했는데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잘 먹고 잘 지낸 만큼 빚을 갚아야한다"며 비판했다.

 

 

독재자의 딸

일각에서는 박근혜 의원이 '독재자의 딸'인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즉 "박근혜를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를 완전히 복권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광에 대해서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그 신화를 누리려고 하는 한,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여자정치인이라는점에서 진보적 여성주의의의 전망에 대해 "박근혜 지지는 순진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작동할 확률이 거의 없다"며 "합리적 정책 개발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며 일축했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지역주의의 망령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판단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다.

 

 

한마디 정치

2008년 대선이 끝난 후로 박근혜는 이렇다할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바가 없다.

미국소 수입 협상에 대한 반발이 일던 가운데 이명박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거나, 미디어법 상정시 "반대표를 던질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입장을 밝히거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당시 이명박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차기 정권에서 계속 추진 할 것을 약속하는 등 중요한 사안에서 짧은 말을 던지는 일명 '한마디 정치'를 해왔다.

 

2010년까지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지켜온 박근혜의 이런 의견들은 당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친이계측은 정부에 협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근혜의 모호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를 당대표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방안을 고려해왔지만 박근혜는 이를 모두 거부했으며 친박계 의원이 당대표를 맡는 것조차 반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지지율 1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 몸사리기만 하는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명박과 화해를 하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비판들 속에서 이명박 정권 취임 초기에 실시했던 자기 대선 후보들 지지율 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은 2010년 이후로 30%까지 하락했다.

 

박근혜 지지율 3주 연속 20%대, 5~8% 빠져

기사원문/http://v.daum.net/link/20634014?srchid=IIMVFtcC000

 

 

핵심 쟁점 회피

2010년 12월, 새해 예산안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어 여야간의 갈등이 극화된 상황에서 박근혜가 복지 정책을 강조하며 나타나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박 전 대표는 날치기로 그 많은 복지 예산이 완전히 삭감될 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유리할때만 고개를 든다"며 박근혜의 행보에 비판을 제기했다.

조선일보도 사설에서 "박 전 대표는 왜 내키는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국민이 박 전 대표에 대해 궁금한 일을 물을 기회는 만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거북한 주제를 피하려 한다는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 박근혜의 이러한 미지근한 행보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한 비판도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조국 교수는 "박근혜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도 지지하는 사람은 30몇%나 된다"라며 "내용도 모르고 좋아하는 것은 감성의 정치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박근혜의 말에 신뢰를 보낸다. "박근혜의 신중함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에 젖어있는 국민에게 위로와 신뢰를 준다"는 평가가 있다.

 

 

이명박과의 관계

박근혜는 이명박과 거리를 두며 차별화를 꾀하고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이명박과 크게 다를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는 "만약 박근혜씨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서 대통령이 된다면 이름만, 대통령 이름만 바뀌는 거지 정책은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하는 것과 거의 똑같다고 나는 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박근혜는 민감한 사안에서 이명박과 다른 의견을 내보이거나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던 경우가 많은것이 주요 비판 대상으로 떠오른다.

2011년 8월에 서울에서 실시된 무상급식 논란과 관련해 이명박은 오세훈의 정책을 지지하며 투표에 참여했으나, 박근혜는 "서울시민들의 입장에 따라야 한다"라며 자신의 소신은 밝히지 않고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결국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오세훈은 패배했고 박근혜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한나라당 내부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세훈측은 박근혜에게 "투표를 하는 게 민주주의 아닌가요"라는 짤막한 한마디라도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박근혜는 거절했다.

이에 대해 친박계는 "박근혜가 당직도 없는 일반 평의원인데 꼭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해야 하느냐. 선거 후보자나 정책 결정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선거 과정에서 어려워지면 ‘설거지하라’는 식으로, 책임지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라고 반박했다.

 

김태호-유시민 악수(4.27 경남 김해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수첩 공주

박근혜는 수첩에 적어놓는것만 읽는다고 해서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있다. 2011년 9월 정몽준은 "박근혜가 미국의 외교전문지에 기고한 남북관계 관련 글은 자신이 잘 아는 대학교수가 쓴 것"이라고 말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막말

2011년 9월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과 관련해 기자들이 박근혜에게 '안철수의 지지율이 자신을 넘어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병 걸리셨어요?”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박근혜는 “지나가는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표현이 부적절 했던 것 같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박근혜는 2004년 MBC 라디오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진행자가 한나라당 경제살리기에 대해 질문하자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라고 언급한 것을 비롯해 올해 1월 복지문제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말 모르세요?'라고 대답한 것 등이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국 교수는 "박근혜 전 대표는 불편한 질문과 비판을 참지 못한다. 영애 박근혜님이 ‘평민’들과 겸허히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새로운 별호를 지어 올리고자 한다. '발끈해'"고 말했다.

 

조국 서울대교수

 

 

 

일화 및 언행

• 아버지인 박정희서거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슬퍼하기에 앞서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라고 말하여, 지지자들은 이를 높이 평가한다.

 

• 자신이 대표로서 이끈 두번의 전국 선거에서 상향식 공천 약속을 지켰다.

 

• 2007년 1월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사건 분석 보고서를 공개한 것을 두고 박근혜는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면서도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 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인혁당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사건 등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앞으로 역사와 국민이 평가할 것”이라며 “그리고 정부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이명박 선대위의 장광근 대변인은 "영화관람 한 번으로 '호남의 한' '역사의식 부재'를 한 번에 뛰어넘겠다는 박근혜 후보. 그의 화려한 광주 1박 2일 외출은 80년 광주정신의 모독일 뿐"이라며 비판했다.

또 "왜 광주에서는 지난 번처럼 '5.16은 구국혁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나"라며 "DJ를 들먹이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려는 그의 다급함이 안타깝기조차 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진수희 선대위 대변인은 "반역사, 반민주적 유신시대의 퍼스트 레이디 5년은 부끄러워할 일이지,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다"라며 "유신시절 '퍼스트 레이디' 5년을 공으로 돌리고, 국정경험으로 포장하는 박 후보의 역사관과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이에 박근혜 선대위의 김재원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서 이념, 지역,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은 과거의 역사로 묻힐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고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인재를 골고루 쓰는 '대탕평 인사'로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뭉치는 '희망정부' '드림정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가지 특별히 주목할 점은, 박 후보에 대한 연설회장의 뜨거운 열기와 성원"이라며 "특정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간다는 말이 얼마나 허풍이었는지 드러났다. 박풍이 호남에서도 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석근 선대위 공보특보도 "오직 박근혜만이 동서화합, 정권교체, 호남발전의 희망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다시 한번 공포된 날"이라며 "박근혜는 언제나 빛을 몰고 다니는 후보,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후보, 어둠과 부패를 몰아내는 후보라는 것이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 "박근혜가 박근령육영재단 이사장 해임의 배후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비방글이 동생 박근령의 남편이 적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4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 피해를 입으셨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2007년 경제공화당 허경영 총재가 자신이 발행한 일간지 'Lotto 복권뉴스' 등을 통해 자신과의 결혼설을 퍼트려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바 있다.

이에대해 허경영 총재는 자신이 인기가 많아지자 박근혜 의원이 아닌 한나라당 언론대책위원회에서 고소를 주도했으며 박 의원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주장한다.

 

박근혜대표가 광양제철소를 방문, 정준양 제철소장의 안내로 생산과정을 설명듣고 있다

/2005.3.29<한날라TV 박창대 gray18@hannara.or.kr>

 

 

가족

• 조부 박성빈(朴成彬, 1871년 ~ 1938년)

• 조모 백남의(白南義, 1872년 ~ 1949년)

• 부 박정희, 대통령 (朴正熙, 1917년 ~ 1979년)

• 모 육영수 (陸英修, 1925년 ~ 1974년)

• 자 박재옥 (朴在玉, 1937년 ~)

• 형부 한병기 (韓丙基, 1931년 ~) 前 국회의원

• 매 박서영 (朴槿令,1956년 ~) - 육영재단 이사장

• 제 박지만 (朴志晩, 1958년 ~) - 기업 EG 회장

• 올케 서향희 (徐香姬, 1974년 ~) - 변호사

• 조카 박세현 (朴世現, 2005년 ~)

• 사촌 박준홍

• 사촌 박재홍

• 고모 박귀희 (은지원의 조모)

• 내종질 은지원

• 종형부 김종필

 

 

저작물

•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위즈덤하우스, 2007, ISBN 978-89-6086-033-9)

• 《나의 어머니 육영수》 (사람과사람, 2000, ISBN 978-89-85541-54-1)

•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부산일보출판국, 1998, ISBN 978-89-87236-24-7)

•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 (부산일보출판국, 1998, ISBN 978-89-87236-25-4)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남송, 1993, ISBN 13-20010440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