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萬里長城 [완리창청]
만리장성(중국어 정체: 萬里長城, 간체: 万里长城, 병음: Wànlĭ Chángchéng 완리창청)은 흉노족 등의 북방 민족을 막기 위해
BC 208년 전국 시대 때 제나라에 의해 처음 착공된 후 중국의 고대 진(시황제)때까지 세워져
현재까지 존재하는 오래된 성곽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만리장성 萬里長城 의 개요
줄여서 장성이라고 하며, 중국인들도 평소에 만리장성이라는 낱말보다 장성이라는 낱말을 일상 속에서 사용한다. 허베이 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에서부터 간쑤 성(甘肅省) 〈자위관〉에 이르는 총 길이 6,352km에 달한다. 그 거대함 때문에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고 거론되었으나 2004년 12월 8일 중국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진한(秦漢)대의 장성
장성은 전국 시대의 일부 국가들이 처음 쌓기 시작하였다. 조, 연, 진 등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국가들은 북방의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았으며, 한, 제 등의 국가는 다른 국가를 막기 위해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기원전 222년에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중국 안에 있던 장성은 파괴하고 북쪽에 만들어졌던 여러 성들을 서로 연결시켜 장성을 쌓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몽염 장군에게 장성을 쌓도록 명하여 기원전 214년 경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장성은 현존하는 장성과는 위치도 전혀 다르고 쌓는 방법도 달랐다. 현재의 장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요동 지역에 이르렀고 서쪽은 산시 성에까지 밖에 이르지 않았다. 또한 흙으로 쌓은 것이기에 말이나 사람들이 넘어다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높은 성벽은 아니었다. 전한시대 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시켰다. 후한 시기에는 흉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이후 수백년 동안 장성의 개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위의 장성
남북조 시대에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북방의 유연을 방어하기 위해 원래 장성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옮겨 현재 위치에서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이후 북방 민족이 세운 국가인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은 어렵지 않게 장성을 넘어 침입하여 중국은 3세기 동안 북방 민족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원을 몰아내고 명이 세워진 뒤 원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강화하여 지금 형태의 장성이 되었다. 농경 민족과 유목 민족의 경계선이라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초원에 건설된 것이다. 중국인의 북방 민족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을 보여준것이지만, 몽골계 민족은 명대에도 장성을 넘어 침입하기를 되풀이하였고, 명 말에는 만주의 여진족이 다시 장성을 넘어와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세우기에 이른다.
명나라 말에 만주족(여진)이 발흥해 후금을 건국하면서, 명나라와 사이에 장성의 동단을 둘러싸고 사투가 반복되었다. 후금은 명나라와 유리한 싸움을 진행하면서도 명장 원숭환에 방해로 장성의 동단의 산해관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후금의 계략으로 명의 숭정제에게 주살 당했다. 그 후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멸망되고 후금으로 개명했던 청나라는 명나라 신하였던 오삼계의 안내로 산해관을 넘어 청나라의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서 보호하고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시켰다. 세계 유수의 관광 명소로 이름이 높았으나, 지역 주민이 집의 재료나 관광객에 판매하기 위해 장성의 벽돌을 갖고 돌아갔기에 파괴가 지속되었다. 또한 장성이 댐 공사로 인해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장성 주변의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은 중국에서도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당국은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6년 4월에 열린 중국의 학술단체 중국장성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만리장성이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지역은 전체의 20% 이하이고, 일부 현재 존재하는 지역도 30%이고, 남은 50% 이상은 모습이 사라졌다"라고 보고되었다.
최근 중국 정부는 단동 근교의 성 유적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연혁
• 전국 시대 당시에 조, 연, 진 3국이 장성을 쌓음
• 기원전 221년에 진 시황제가 연과 조의 장성을 연결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서쪽으로 더 연장시킴
• 한대에 무제가 우웨이와 주취안에 장성을 연장시켜 쌓음
• 남북조 시대 때 북주와 북제가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함
• 수의 양제가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음
• 금이 타타르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에 대규모로 장성을 쌓음
• 명의 영락제가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고 동쪽 산해관을 설치함
• 명의 정통제가 북경 정면 부분의 2중으로 장성을 쌓음
• 명의 가정제가 대대적으로 장성을 개축함
• 이후에 16세기에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됨.
주요 장성
베이징 동쪽
• 노룡두 장성(老龍頭長城)
• 산해관(山海關)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관
(병)Shanhaiguan (웨)Shanhaikuan.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출처/오픈토리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관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 동쪽 보하이 만[渤海灣]에 면해 있는 촌락.
지금은 중요한 광산지대이지만 17세기까지는 북동쪽의 유목민족으로부터 베이징[北京]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하이관은 해안을 따라 전개되는 좁은 협곡을 지나 베이징에서 만주(滿洲)로 가는 통로인 동시에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이다. 6세기부터 임유관(臨渝關)이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10세기초 거란족이 허베이 북동지방을 점령한 후에는 현으로 되어 천민현(遷民縣)이라 불렸다. 이 이름은 13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산하이관이란 이름은 명대(明代:1368~1644)에 처음 붙여졌다. 명말 만주족이 침략했을 때 산하이관은 만주족 군대가 베이징 지역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1644년 산하이관이 함락되자 명나라도 붕괴되기 시작했다. 1737년 임유 현의 현청소재지가 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근처에 있는 친황다오[秦皇島]가 성장해 산하이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또한 산하이관을 통해 이루어지던 만주족과의 교류도 랴오닝 성[遼寧省]의 다롄[大連]으로 옮겨갔다. 1932년 1월 남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이 산하이관을 점령하자 이 지역 전체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이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울 때 전략적 무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인구 10,000 미만(1980년대 중반).
베이징 주변
• 사마대 장성(司馬台長城)
• 금산령 장성(金山嶺長城)
• 반용산 장성(蟠龍山長城)
• 고북구 장성(古北口長城)
• 대진욕 장성(大榛峪長城)
• 황화성 장성(黃花城長城)
• 모전욕 장성(慕田峪長城)
• 전구 장성(箭扣長城)
• 팔달령 장성(八達嶺長城)
• 수관 장성(水關長城)
• 거용관, 거용관 장성(居庸關・居庸關長城)
• 삽전령 장성(挿箭嶺長城)
베이징 서쪽
• 노우만 장성(老牛灣長城)
• 임유진 북루(楡林鎭北樓)
• 삼관구 장성(三關口長城)
• 텐겐사막 장성(톈겔砂漠長城)
• 단협구 장성(丹峽口長城)
• 가욕관(嘉峪關)
• 하창성(河倉城)
• 옥문관(玉門關)
• 양관(陽關)
자위관(嘉峪關) - 베이징 서쪽끝
자위관(嘉峪關)
자위관(중국어 정체: 嘉峪關, 간체: 嘉峪关, 병음: Jiāyù Guān, 가욕관)과는 간쑤 성 자위관 시에 있는 만리장성 서쪽 끝에 위치하는 관문이다. 산하이관(산해관)과 나란히 서쪽, 만리장성으로 중요한 관문으로서 알려져 있다.
자위관은 자위관시의 남서 6km에 위치하는 하서회랑의 서쪽 가장 좁은 땅에 있다. 그곳에 두 개의 언덕 사이의 땅을 가욕산이라고 한다. 성벽의 일부는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있어 험준한 지형에 그 요새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자위관은 둘레 733m, 높이 11m의 성벽에 둘러싸여 성 내부 지역은 33,500㎡ 이상이다. 황토를 판축으로 하여 굳힌 성벽이며, 서쪽은 벽돌을 겹쳐 쌓아 되어있다. 동서로 각각 누각(문루)과 옹성을 가지는 성문을 갖추어 동쪽을 광화문, 서쪽을 유원문이라고 한다. 서문에는 「자위관」의 편액이 걸려 있다. 관의 남북은 만리장성과 연결되어, 성벽의 구석 각부에는 노가가 설치되어 있다. 2개의 문의 북측에는 관의 최상부에 오를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자위관의 방어 설비는 크게 나누어 내곽, 외곽, 굴의 3개가 되고 있다. 만리장성으로 연결되는 관 중에서 유일하게 건설 당시 그대로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최동단에 있는 산하이관은 「천하제일관」이라고 칭하며, 자위관은 「천하제일웅관」이라고 한다. 동서 실크로드의 요충지의 하나이며, 주위에는 돈황 막고굴과 같이 유명한 유적이 존재하며, 많은 벽화가 발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자위관의 설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어, 만약을 위해 1개 의 벽돌만 여분으로 준비했는데, 자위관의 완성 시에는 정확하게 1개만 벽돌이 남았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문서 상으로 남아 있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지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일화가 되고 있다.
명조 초기에 구축된 후, 티무르군에 대비하기 위해, 관의 방비는 강화되어 요새를 견고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동진을 진행시키기 전에 노쇠하여 전복되었다.
• 1372년(홍무 5년) - 건설
• 1495년(홍치 8년) - 내성에 광화누각과 유원루를 조작. 동시에 관청, 창고 등 부속 건조물을 수축
• 1539년(가정 18년) - 성벽에 적루, 각루를 증축해, 양익의 장성, 봉화대 등을 수축
논란
중국이 2009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압록강변의 호산산성이다.'라고 발표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에 관한 내용은 2010년 5월 15일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바 있다.
소오강호(笑傲江湖)
http://cafe.daum.net/ceo070/OStl/89
滄海一聲笑/許冠傑,황점
(창해에서 한바탕 웃음을 짓누나)
(笑傲江湖II와 東方不敗 主題曲)
1991년 허관걸 홍콩 금상장 받음
滄 海 一 聲 笑
푸른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滔 滔 兩 岸 潮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浮 沈 隨 浪 記 今 朝
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滄 天 笑 紛 紛 世 上 滔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誰 負 誰 剩 出 天 知 曉
이긴자는 누구이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江 山 笑 煙 雨 遙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濤 浪 濤 盡 紅 塵 俗 事 知 多 少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않네
淸 風 笑 竟 惹 寂 寥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豪 情 還 잠 一 襟 晩 照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蒼 生 笑 不 再 寂 寥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豪 情 仍 在 癡 癡 笑 笑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하하하~!
재미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이야기
흔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 역사를 시작했을 때이죠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있는 외딴 집에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남편의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죠."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해 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 시작 했었죠.하지만 여인은 냉랭 했습니다.사내는 그럴수록 열이나서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 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깨닫고.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고.여인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마음이 좀 홀가분 할것 같습니다.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 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고.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 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 었습니다.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옷을 갈아 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 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 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 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km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km에이른다.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 자위관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보통 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770~ BC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왕국인 진이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2천여 년 역사, 시대에 따른 변화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다. 처음 건축될 무렵에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보하이 만까지 약 1,500km 길이였다.
이후 명(明) 나라 때 총 길이2,700km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명 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당시 북방에 있던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리장성 2,700km가똑 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사적 방어선이자 문화적 경계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을 쌓은 가장 중요한목적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왕조의 성격에 따라 만리장성의 중요성이나 만리장성에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공격적이었던 시기보다는 방어적이었던 시대에 만리장성은 더욱 중시되었다. 북방 경영에 열심이었던 당나라 때나 전 세계를 무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던 몽고제국과 뒤이은 원나라, 만주에서 일어나서 만리장성 너머까지 다스렸던 청나라 때는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고, 따라서 개보수 작업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인역할 이외에 문화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어벽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관계없이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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