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러스포츠가 평가하는 김연아
2010.02.16.화요일
파리통신원 나나
편집자 주
이 글은 파리통신원 나나님이 유럽 최고의 피겨 스케이트 해설가라 할 수 있는 독일 유러스포츠의 헨드릭 샴베르거와 지기 하인리히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기사입니다.
조만간 피겨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카트리나 비트와의 직격 인터뷰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헨드릭, 당신의 표현은 정확하고 건조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꼭 해야할 말들, 기술에 대한 설명이나 점수에 대한 예측을 하지요. 그건 당신이 다른 해설자들과 가장 차별되는 점입니다. 지기 하인리히의 표현력도 뛰어나지만 나는 지나친 수사를 덧붙이지 않고도 단순하고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당신의 해설에서 진정성을 느낍니다. 그리고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점수 예측을 정확하게 하더군요. 비결이 있나요?
점수 예측 비결은 글쎄요, 그건 내 분야이고 나는 흔히 말하는 전문가로서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바로 보았네요. 내가 하려고 하는 이성적인 해설에 대해서 당신이 정확히 말해줬어요. 내가 당신 말대로 객관적이고 건조한 해설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독일어 구사자라서가 아니에요. 물론 독어가 이성적이고 빈틈없는 언어인건 맞지만요. 그건 내가 맡은 역할 때문이죠. 우리 팀을 보면 지기와 나의 역할이 다릅니다. 지기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가 있죠.
감동적인 연기를 보았을 때, 감정적으로 고조된 그를 다시 데려다가 현실-프로토콜과 구성요소-을 들여다 보게 하는게 내 역할이에요.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사실에 기반한 것들, 이성적인 것들을 말해요. 하지만 이런 내 역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연아의 경기를 볼때에면 나는 영혼이 울리는 걸 느껴요. 뭔가 더 아름다운 언어로 그녀의 경기를 묘사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그건 내가 해야하는 일이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다른 선수에 대한 해설도 보았다면, 당신은 내가 얼마나 드물게 연아의 경기에서 내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을 더하고 있는지, 내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될거에요. 그녀의 경기 앞에서는 늘 하던대로 현실에 남아있기가 힘들거든요.
언제 김연아 선수를 처음 보았죠? 당신은 가장 먼저 그녀의 재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해설을 했습니다.
연아를 처음 본건 2006년 류블랴나의 주니어 월드에서였어요. 그녀는 그해의 주니어 월드 챔피언이었어요.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곧바로 그녀가 아주 가까운 미래에 세계챔피언이 될거라는 걸, 앞으로 10년의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을 지배할 거라는 걸 감지할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기에게도, 도쿄월드 2007년,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를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죠. 류블라냐의 방켓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답니다. 사실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먼저 나서서 사진을 찍는 건 자주 하지 않는 일이에요.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연아는 백만명 중 하나의 재능을 가진 그리고 이번 시즌 그녀는 더욱 강해졌더군요.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완벽주의자인, 강한 마음을 보여왔지만 이젠 압박감과 판정이라는 외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강해보여요. 그녀가 클린을 한다면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고 했잖아요. 좀 말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설령 약간의 실수를 한다고 해도, 이젠 그녀를 이기는 건 힘들어보여요.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꼽는다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죽음의 무도였어요. 그녀만이 빙판에 가져올 수 있는 그 강렬한 이미지를 좋아해요. 지금은 제임스 본드 메들리도 참 뛰어난 작품이에요. 갈라 프로그램도 최근의 것(Don't stop the music)이 가장 좋아요.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일 때부터 지켜봤네요.
그런데 한가지만 꼽으라는데는 답하기가 어렵군요. 각각의 프로그램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서 다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봐요. 다른 프로그램이 못하다는게 아니라 최근의 프로그램에 더 마음이 가는건 연아는 늘 뭔가 새로운 걸 보이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우리는 또 거기에 매료되니까요.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기술은, 아쉽게도 지금은 볼수가 없는데, 완벽한 트리플 플립 트리플 토룹이에요. 남자 선수도 그녀처럼 두번째 점프를 뛰는 경우가 드물죠. 그 경이로운 속도와 높이와 힘이라니.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려와 그녀를 끌어 당기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아요. 액션영화의 주인공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죠.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줄을 타고 날아오르는데 그녀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깃털처럼 중력을 벗어나요. 그것도 음악에 맞춰서요.
안무와 코치, 유로스포츠의 해설까지 아주 바쁘게 지내는 것 같은데, 피겨가 아닌 다른 취미가 있나요?
시간이 좀 있으면 나는 그림을 그려요. 물론 자주 그리지는 못하죠. 하나 완성하는데 최소한 6개월에서 8개월 이상의 시간이 들어요. 따로 배운건 전혀 없고 그냥 혼자서 시작했어요. 십대였을 때부터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외국어나 언어 과목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학교에서 좀 제대로 배운 건 불어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다 이후에 배웠죠.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포함, 5개 국어를 구사한다.)
미술시간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죠. 내 머릿속에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묘사하고 싶은데 다른 것으로는 한계를 느끼잖아요. 예를 들어서 나는 해설자이지만, 내 해설이 연아의 경기, 그녀가 빙판위에 가져오는 것, 그로 인해 내가 받는 것, 그걸 다 전달 할수는 없어요. 말로도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림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이고, 시각에 호소하니까요.
내 속에 엄청난 세계가 들어있는 기분인데...
카프카처럼요?
카프카는 좀 과하고, (웃음) 그 이미지들을 현실화 시키는데 그림이 가장 좋은 수단이거든요.
아이스댄서로서 올림픽과 월드를 경험했죠? 경험이 삶에 끼친 영향은 어떤건가요? 스케이팅을 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알고 싶어요.
언제나 프리 프로그램을 하기 전에 나는 생각했죠. 나는 이거 왜 하고 있는거지? 그 시합전에 다가오는 긴장감, 두려움과 떨림은 아마 관객앞에 서는 무대를 경험해보지 않은 대다수들은 평생 알 수 없을 거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다 벗겨지는 기분이거든요. 다수의 사람들은 그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연습에서 한 것들 보다 더 못한 경기를 펼쳐요. 그걸 뛰어넘기가 정말 힘들죠.
하지만 당신이 최선을 다해, 긴장으로 정신이 반쯤 나갔든 아니든, 스케이팅을 마치고 관객들이 당신에게 박수를 보내줄때, 당신은 왜 이 스포츠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거에요. 그 순간은 정말 특별해요. 인생에서 단 한순간, 한번 뿐인 경험이기도 하고요. 좀 아까 이사도라 덩컨과 피나 바우쉬, 조지 발란신 이야기를 했었죠? 무용가들, 안무가들만 봐도 나이에 상관없이 무대에 오를 수가 있어요. 마흔이나 쉰까지도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가능해요. 하지만, 아마추어 피겨스케이팅에 참가할 수 있는 기간은 제한되어 있죠.
지금은 쉔-자오 커플이 돌아와서 서른 중반이 최고령이 되긴 했는데, 사실 남녀를 불문하고 길게 봐도 이십대 후반까지니까요. 삶에서 꽃이 피어나기 직전처럼 싱싱한 젊은이일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스포츠에요. 특히 싱글은, 점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니까 몸이 버텨내기가 그만큼 어렵죠. 그렇다고 피겨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건 아니고요. 특별한 스포츠에요. 어렵기로만 치면 다른 스포츠들도 만만치 않을거에요. 체조라던가 마라톤이라던가.
나는 피겨스케이터로서의 경험이 내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스트레스를 다루는데요! 의대 공부를 하는 동안(그는 현재 정형외과 전문의이다.) 나는 스케이팅을 병행하고 있었어요. 사실 둘 중 하나만 하기에도 버겁거든요. 어떤 것도 공부와 컴페티션에 참가하는 일정을 따라가는 스케이팅을 병행하는 것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줄 수는 없을거에요.
다시 태어나도 피겨를 할 건가요?
다시 태어나도 피겨를 하지는 않을거에요. 나는 이미 어떻게 해야 피겨스케이터가 될 수 있는지 아니까 사실 그건 좀 지루하고요. 다른 스포츠를 택할 듯 싶어요. 똑같은 걸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세계 수준의 탑 스프린터, 하계 올림픽 100미터나 200미터에 참가할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되는 꿈은 어떨까요? 사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최초의 질문이거든요. 누가 더 빠르지? 하는거요. 피겨에서도 레벨을 결정짓는 건 이 빠르기에요. 누가 더 빠르게, 그것도 미끄러운 빙판위를 움직일 수 있는가가 전체 퍼포먼스의 느낌을 결정해요. 음악에서도 멜로디보다 박자, 비트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처럼요. 연아가 다른 선수들과 구별되는건 무엇보다도 이 스피드 때문이기도 하죠. 빙판 위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거기에 우아해지는 것도 어려워요. 탑레벨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수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절대로 우아하게 움직이는 법을 깨닫지 못하며, 또 다른 선수들은 절대로 빨라지지 못한답니다. 연아가 특별한건 어떤 스케이터는 한가지도 가지기 힘든데, 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녀가 밴쿠버에서 금메달을 딸 거라고 확신합니다.
(티어가르텐 부근의 베를린운하가 얼어있었다.) 베를린 외곽에 좀 더 긴 운하가 란트베어 운하라고. 겨울이면 정말 단단하게 얼어요. 링크장은 좁잖아요. 좀 전진하다보면 금새 가로막히니까 얼른 돌아와야 하는데 거긴 끝없이 갈 수 있어요. 다음엔 거길 꼭 가보도록 해요. 끝없이 스케이팅을 하는 기분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몰라요!
반갑습니다. 지기 하인리히. 독일 유로스포츠의 해설자인 당신을 만나기 위해 참 오래 기다렸네요. 피겨 중계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헨드릭과 내가 팀을 이룬건 1999년 헬싱키의 월드에서부터 였어요. 그 전에는 다른 해설가가 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해설자를 물색하게 되었죠. 헨드릭은 이미 은퇴한 상태였고, 월드와 올림픽을 경험한데다 코치 자격시험을 통과한, 말 그대로 전문가였어요. 나는 그로부터 많은 걸 배웠죠.
피겨의 기술은 다양하고 하고 특시 신채점제 이후로는 채점 요소가 둘로 나뉘며 더욱 복잡해졌는데 해설자로서는 이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실 나는 국제빙상연맹이 각 국의 해설자들을 모아놓고 합숙훈련으로 기술적인 세미나를 해준다면 좋겠어요. 한 일주일정도 넉넉하게요. 우리가 심판은 아니지만 티비를 시청하는 대중들에게는 우리의 해설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나는 늘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한 일주일 정도 점프를 구별하는 법, 어떻게 뛰는 것이 제대로 된 기술인지 아닌지, 어떤 기준으로 레벨을 정하고 가산점을 주는지 이런 것들을 교육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엔 저널리스트들이 좀 더 쉬운 언어로 대중들에게 전달 할 수 있겠죠.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에게도 피겨가 좀 더 쉬워질테고, 피겨가 다시 인기를 얻는데도 일조할 것 같아요. 물론 우린 심판은 아니죠. 하지만 우리의 해설은 전파를 타고 결국 심판들의 판정처럼 작용하잖아요.
내 경우는 대부분의 종목 해설을 다 하고 있으니까 일이 참 많아요. 피겨의 경우, 신채점제 이후에는 참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2002년의 스캔들에서 확인했듯이, 구채점제는 몇몇이 작정하고 점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제도였으니 바뀌어야 할 필요는 있었어요. 나는 운좋게 헨드릭처럼 제대로 된 전문가를 만났고, 또 모르는게 있다면 늘 배워야 겠다는 자세를 하고 공부하고 있어요. 구 채점제처럼 숫자로 가는게 아니라 디테일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 어렵지만 조금 노력하고 들여다보면 뭐가 뭔지 알수 있게 되긴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늘 성실하게 준비해요. 개별적으로 스케이터들에 대해서 알아내는 건 한계가 있어요. 대부분 스튜디오 중계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할 수 있는한 스케이팅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찾아보려고 하죠.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인터뷰 기사나 동영상도 미리 찾아보고 부상은 없었는지, 훈련지를 바꾸거나 코치를 바꾸지는 않았는지 이런 걸 다 체크해요.
잊을 수 없는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어느 갈라에서 프리다 칼로의 영화음악을 골라서 나온 팀이 있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중 하나였죠. 가끔은, 몇 분에 불과한 피겨에서 너무 대단한 것을 보여줘서 할말을 잃을 때가 있어요. 그럴때면 피겨가 스포츠가 아니라 또 다른 뭔가의 경지에 다다른거죠. 그걸 지켜보면서 헨드릭과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니 벌써부터 저렇게 최고의 수준,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대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면 올림픽때에는, 그 다음 시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한계에 부딪혀 곤란하겠다. 저기에서 또 더 멀리 나아간 모습, 한결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얼마나 클까.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 걸 볼때면 해설자로서는 할말이 없기도 하고요. 몇몇 그런 퍼포먼스가 있었어요. 쉔슈에 자오 홍보, 올리비어 쇤펠더-이자벨 들로벨, 김연아가 생각나네요.
그런 프리다 칼로 연기를 제대로 해설하려면 최소한 그 영화를 한번은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그들이 대체 뭘 하고 있는건지 제대로 전달할 수가 있을까요?
그 영화의 이미지를 다시 빙판에 가져오는 건데, 영화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다 칼로를 모른 채로 그 댄싱팀의 연기를 제대로 해설할 수 있을까요? 난 아니라고 보거든요. 프리다 칼로를 모를 수도 있지요. 어느 방송사라고는 밝힐수는 없지만 중계 전에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어요. 무엇보다 프리다 칼로 연기가 기대된다고 했더니 저를 빤히 보면서 프리다 칼로가 누구냐고 묻더군요. 이런, 아무리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이건 상식이야! 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어요.
중계 전에 나는 미리 따로 자료들을 준비해 둡니다. 거기엔 한 페이지로 요약한 프리다 칼로의 영화 줄거리가 있었죠. 얼른 프레스 센터에 가서 그걸 복사해왔고 나눠줬어요. 제발 이걸 먼저 읽고 해설을 하라고 했죠. 물론 우리 방송사도 아니고, 내가 말할 수 없는 외국어로 진행될 해설이고, 그들이 무슨 소리를 떠들건 그건 내 일이 아니지만, 사실 그 팀의 그 연기는 참 특별한 거였거든요. 나는 최소한 해설자들이 그들이 빙판위로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프리다 칼로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방송을 듣는 대중들 중에는 영화를 이미 본 사람도 있을수 있고, 프리다 칼로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렇게 잘 모르는 사람들도 배려하면서 간단하게나마 이 댄싱팀이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뭘 전하려고자 하는 건지 전달해야 하는게 우리의 일이잖아요. 그걸 고려하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무책임한 일이죠. 그런데 정말 준비하지 않고 앉아서 되는대로 아무 이야기나 떠들고는 할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곤 일이 끝났다며 돈을 받아가겠죠.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렇게 성실하지 못한 해설, 준비되지 않은 함량미달에 대해 부끄러워 해야하지 않나요? 시청자들은 다 알아요. 우리가 얼마나 준비하고, 공들였는지,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건 아니고 목소리로만 전해지더라도 모두가 알아요. 당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거에요. 이 일은(저널리즘)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얼마나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았는지가 결국엔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2008년, 독일티비에서 수여하는 올해 최고의 스포츠 중계 저널리스트에게 주는 상을 받았는데요.
글쎄 나더러 대단한 저널리스트다, 이렇게 부르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요. 엊그제 같은데 1989년에 처음 유로스포츠가 생겼고 정말 많은 일을 한건 맞아요. 그땐 뮌헨이나 베를린에 이런 유로스포츠 스튜디오가 있지도 않았어요. 내가 피겨 중계를 잘할 수 있는 건 헨드릭의 역할이 커요. 첫 방송을 하는 순간부터 참 잘 맞는 다는 걸 느꼈어요.
나는 체조선수였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안경이 필요하긴 하지만) 딱 보면 더블인지 트리플인지, 회전수를 꽉 채우는지 아닌지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1972년이네요. 뮌헨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을 하기도 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400미터였는데. 십대의 대부분과 이십대의 초반을 체조선수로서 보냈고 뮌헨공대의 학생이었어요. 이름을 날리는 선수가 되기에는 사실 그렇게 재능이 대단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부상을 당해서 꿈을 접었어요. 종목을 불문하고 부상에서 자유로운 선수가 얼마나 있나요?
내가 선수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나는 모든 선수들에게 애정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 월등한 경지에 이르기까지를 생각하면, 그들이 저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그런걸 생각하면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죠. 물론 그들의 그 숨겨진 시간이 내가 하는 중계에서 카메라에는 비춰지지 않지만 늘 그 땀흘림을 생각하고 해설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해설, 성실하지 않은 해설은 용납할 수가 없는거에요. 단 몇분 몇초를 위해 수년을 기다리며 땀흘리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걸 온전히 다 전달하는게 우리의 일이니 거기에 걸맞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봐요.
특히 피겨스케이팅의 경우는 내 온몸으로, 내부로부터, 저 깊은 속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코멘트를 해요. 사실 난 피겨 중계를 하는게 일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것 같단 생각을 합니다. 참 멋진 일이잖아요. 젊디 젊은,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선수들이 코스튬을 차려입고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나는 그에 대한 찬사를 하고, 그런데 거기에다가 돈까지 받는다니! 이건 말도 안되는 호사야. 이렇게요. 바이애슬론도 참 좋아하는 종목이지만(그는 바이애슬론 선수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을 펴냈다.) 피겨는 정말이지 내 온전한 목소리로 하는 중계에요.
내가 피겨 중계를 유난히 좋아하는 걸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해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죠. 피겨는 축구나 아이스하키가 아니니까요.
게이나 레즈비언들이 넘쳐나는 동네다. 인기도 없는 마이너 스포츠인데다 지나치게 과장된, 연극적인 연출이 좀 낯간지럽지 않냐고도 하지요. 물론 성적 소수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지나치게 과장된 순간들이나 이건 아니다 싶은 연출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그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판단이고 지나치게 표면만 보고 내린 성급한 결론이에요.
우리는, 절대적인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감동을 받아요. 스포츠가 아닌 드라마 이상의 감동을 주는데는 당신도 동의하지 않나요? 그 감동이 빠리의 오페라나 베를린의 필하모니에서 만나는 것과 다른 게 아니에요. 오히려 더 대단한 것일 가능성도 있어요. 2시간을 기다리는 콘서트나 3-4막을 걸친, 몇 시간에 달하는 오페라와는 달리 피겨는 단지 몇 분일 뿐인걸요.
그 누가 카타리나 비트의 카르멘에 대해 이의를 가지나요? 지금처럼 이십여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모두의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녀는 정말 대단했죠. 지금은 피겨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아서 연아가 카타리나 비트만큼 세계적인, 현상적인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는 모르겠어요. 피겨를 보는 사람들은 그녀를 모두 알지만, 피겨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도 어필할 정도를 이야기한다면요. 연아의 발음을 제대로 가르쳐 줄래요? 유나킴이 정확하지 않은 발음이라면서요. 할 수 있다면 연아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고 싶네요
그녀는 정말 경이로운 스케이터에요. 이기기 위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것, 하다 못해 그녀가 성장해서 여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도 지켜보는 즐거움 중에 하나에요. 더 놀라운 건 그녀 스스로 브라이언 오서를 선택하고 캐나다에서 훈련을 하고, 스스로 선택을 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 모헙에 가까웠던 선택이(브라이언 오서는 뛰어난 선수였으나 아직 코치로서는 검증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까요.) 이렇게 성공적이라니, 이런 재능을 가진 그녀를 제자로 두게 된 브라이언 오서는 얼마나 흐뭇할까요?
난 개인적으로 그녀가 아주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노래솜씨도 놀라워요. 많은 선수들이 음악에 겉돌며 움직이거나 음악에 질질 끌려다녀요. 연아가 빙판위에서 음악을 지배하며 움직일 수 있는건,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음악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헨드릭이 주목하라고 했기 때문에 연아는 2007년 도쿄 세계선수권 때부터 눈여겨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 등장하자마자 쇼트 세계신기록을 세웠고요. 정말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굉장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죠. 모두가 연아처럼 경기를 펼친다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우월하다면, 절대적인 경지에 다다른 피겨를 본다면 해설자로서 얼마나 행복할까요?
어지간한 컴페티션의 경우, 포디움 안에 드는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참 차원이 다른 경기를 펼쳐요. 물론 그들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을테니 그걸 폄하하는 건 아니에요. 탑레벨이 아닌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면 피겨가 아름다운 스포츠라는 정의에 조금 의문을 갖게 될때도 있어요. 당신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거에요. 그들은 실수를 하고 반쯤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허둥대고, 음악에 끌려다니며 간신히 점프와 활주를 반복하거든요.
지금 11년째 중계를 하고 있는데, 해설을 할때마다 찌고이네르바이젠은 이제 그만, 라흐마니노프도 이제 그만, 몇몇 음악은 제발 그만 들었으면 싶을 정도로 지겹기도 해요. 그런 지겨움 때문에 피겨에서 더이상 새로운 걸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한적도 있죠. 그렇지만 연아의 우월한 경기는 피겨란 종목의 미래를 보여주니까 특별하단 생각을 해요. 단순히 천재라는 수식어는 좀 부족하죠.
당신이 스포츠라는 단어의 어원을 이야기했잖아요. 뭔가를 실어 나르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말이라고요. 흥미로운 해석이에요. 스포츠가 가져오는 것들이라…역사적으로는 계급사회에 존재하던 숱한 금기와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바로 스포츠였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포츠에서 바라는 건, 더 높고 빠르고 멀리가는 것이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라마보다 더 한 드라마가 창출되기도 해요. 그 짧은, 순간의 희열, 특별함을 전달하기 위해 나 역시 생의 일부를 보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얼굴은 늙어도 목소리는 좀 덜하니까요.
연아의 우아한 움직임을 두고 사람들은 빙판위의 발레리나 같다,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쓰지만 피겨도 엄연히 등수가 정해지는 스포츠에요. 그러므로 그녀는 피겨의 미래에 대한 증거이자, 스포츠가 끝없이 진보한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에요. 그녀 역시 대단한 완벽주의자로서 계속 더 나아지고 싶다고 인터뷰 했던 걸요? 그녀가 나아가는 만큼, 피겨가 더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내 자신을 담아 중계를 하는 종목이니까요. 그 진보가 손에 만져질 듯 명백한 그 순간이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저에겐 참 특별하고 행복한 순간입니다.
김연아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 하는 그에게 천천히 이름을 다시 불러주었다. 여러번 발음을 따라한 그가 무슨 뜻인지를 물어왔다. 한자에 담긴 뜻을 풀이하면 김연아, 금빛의 아름다운 소녀, 라고 했더니 그는 김연아가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바쁜 방송 일정에 다른 도시로 향하는 그는 이 뜻깊은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 할 것 같다며 이메일로 다시 설명해 주기를 부탁해왔다.
며칠 전, 벤쿠버에 도착한 그에게 답장이 왔다. 휘슬러 산의 스튜디오에서 해설을 해야 하므로 직접 피겨스케이팅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며, 독일 유로스포츠만 이 아름다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건 건 좀 안타까운 일이란다. 그는 내 이메일을 이미 각국의 모든 유로스포츠의 해설진에게 보냈다고 했다.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제대로 된 발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2010년 1월, 뮌헨, 베를린
http://www.ddanzi.com/news/9833.html
[이너뷰] 독일유로스포츠 인터뷰 2탄 - 헨드릭 샴베르거
2010.4.1.목요일
나나
헨드릭, 당신은 늘 점수 예측을 정확하게 해요. 올림픽 쇼트에서도 놀라울 만큼 점수예측을 해냈더군요. 대체 비결이 뭐에요?
비결이랄 것 까진 없는데(웃음) 그냥 자연스러운 거에요. 점수를 맞출 수 있는 건 내가 코치이기 때문이에요. 아마 대다수의 코치들이 경기를 지켜보면 대략적인 점수 예측을 할 수 있을거에요. 그리고 아마도 내 경험이 도움을 주는게 아닐까요. 아홉번의 월드와 한번의 올림픽에 참가를 했고, A레벨 코치 자격증을 가지고 있거든요. 벌써 10년 전이네요. 자격증을 따고 그 이후로 쭉 코치 생활을 해왔어요. 코치들에겐 선수의 프로그램이 끝난 후 점수를 예측하는 건 그닥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전 다만 해설자를 겸하고 있는 유일한 현역코치일 뿐이고요. 직관적으로 느끼는 거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보면 알 수 있어요.
당신은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요. 좋아하는 화가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그리고 연아의 스케이팅을 비유한다면요?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칸딘스키와 클림트에요. 클림트는 부드러운 색감과, 흘러가는 듯한 형태, 황홀한 빛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되는게 좋아요. 칸딘스키는 내가 욕망하는,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이미 다 그려낸 것 같달까. 당신 말대로 곡선과 공간에 대한 그림이니 피겨 스케이팅과 가장 닮아있기도 하네요.
그림을 볼때면 숨이 막히고 할말을 잃어요. 연아의 스케이팅이 그래요. 그녀가 빙판 위에 가져오는 것들을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하루의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했다.)그런데 시간을 가져도 도저히 불가능 하군요.
당신이 말하는 그림은 많은 사람들을 이미 사로잡은 일종의 명화에 속하네요.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당신에겐 명화와도 같은 건가요?
그 이상이에요. 그림은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고 움직임이 없잖아요. 그리고 스케이팅은 연극이나 무용처럼 순간으로만, 눈앞에서만, 현재로만 존재해요.
나도 정말 모르겠어요. 2006년에 처음 김연아를 봤을 때부터 그 눈부신 재능을 알아봤지만 왜 그녀는 그렇게 남다를까요. 모든 스케이터들이 빙판 위를 움직일줄 알아요. 모두들 발레를 몇년씩 배웠다고들 해요. 그런데 김연아는 그들과 구별되요. 그녀는 스케이팅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거든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그저께 쇼트에서처럼 좀 실수가 있거나, 어제 프리의 후반부에서처럼 좀 지쳐보일 때, 아주 오랜만에 그녀가 날고 있는게 아니라 스케이팅을 하고 있단 생각을 했네요. 그만큼 김연아는 언제나 빙판 위에서 그 누구보다 남다른 것을 보여줘요. 어떤 형용사도 그녀의 스케이팅을 이야기하는데 충분하지가 않아요.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당신한테 다시 만나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던 거에요.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있으니 더 어렵네요.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걸 묘사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림이든 문장이든, 당신 말대로 그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동경이 예술의 출발점이니까요. 그런데 절대적인 아름다움, 지나치게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말을 잃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것을 문장으로 구체화 하고 묘사하기 위해 애쓰고 그걸 해내겠죠. 하지만 나는 내 표현의 한계에 다다라버렸어요. 답답하지만 정말 그래요. 내 말로 문장으로, 형용사로는 다 묘사할 수가 없어요. 그런 대단한 경지는 재능일까요, 노력일까요? 김연아는 당신이 말한대로, 백만명중에 하나의 재능을 지닌 스케이터이고, 동시에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가지고 있기도 해요. 맞아요. 그런 경지는 경이로운 재능과 엄청난 노력이 함께 있어야 도달할 수 있어요. 그냥 좀 잘하게 되는 것, 남들보다 나은 지점에 다다르는 것에도 두 요소가 모두 필요하죠. 마찬가지지만 무언가를 이룬다는 표현에 걸맞는 성과를 위해서는 더욱 그래요.
2008년 월드이후부터 마오 아사다는 쿼드점프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녀의 쿼드 룹 점프 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마오 아사다가 쿼드룹을 선택한다면 그건 명백한 큰 실수에요. 다운 그레이드의 위험이 너무 커요. 연아의 정교한 트리플 럿츠 트리플 토룹에 대항하려면 불안한 단독 쿼드룹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녀가 룹 점프에 강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한번도 공식 경기에서 랜딩한 적도 없는 점프로 틈없는 연아의 점프를 당해낼 수가 없어요.
만약 마오 아사다가 김연아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다면 시도해야 할 점프는 트리플 럿츠 트리플 토룹, 혹은 보다 견고한 트리플 악셀 더블 토룹 컴비네이션이겠죠. 실패하거나 다운그레이드 받는 게 아니라 가산점을 받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에요. 지금처럼 트리플 악셀을 고집하는 건 그닥 현명한 판단으로 보이진 않아요. 실패하거나 다운그레이드를 받을 때의 타격이 너무 크죠. 프리에서 두 번의 트리플 악셀을 하고 난 뒤엔 후반부엔 체력이 딸려서 쉬운 점프를 실수 하고요.
김연아를 이기는게 아니라 가까워 지려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실수 없이 경기를 마치고 나서도 이기는 걸 장담 할 수 없고 이번처럼 김연아가 예외없이 5번의 실수를 하기를 기대해야 금메달이 아사다 마오에게로 가니까요.
마오 아사다가 아니라 미키 안도가 오히려 좀 더 연아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스케이터라고 생각해요. 지금 그녀는 쇼트에서만 트리플트리플 컴비네이션을 뛰고 있어요. 종종 다운 그레이드를 받기도 하고요. 니콜라이 모로조프는 안전하게, 실수없이 가자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효과적인 전략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녀는 트리플 트리플 컴비네이션의 두번째 점프를 트리플 룹으로 뛸 수 있는 스케이터에요. 만약 그녀가 트리플 살코 트리플 룹 컴비네이션이나 트리플 럿츠 트리플 룹 컴비를 연마해 온다면 좀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거에요. 전 브라이언 오서의 전략이 참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연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점프와 안무가 정교하게 조화된 작품을 이끌어 냈거든요.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아주 성능이 좋은 쥬서기처럼 연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걸 다 짜내듯 거의 이끌어 냈어요.
왜 정형외과 의사가 되었어요?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건 스케이팅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스케이터로서 활동하는 동안은 늘 부상이 있어요. 다른 데는 다 건강하니까 가 본 병원이라곤 정형외과 뿐이었고, 만나본 의사는 모두 정형외과 전문의였죠. 의대를 가고 나서도 정형외과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의사로서, 스케이터로서 봤을 때 김연아가 의욕을 잃었다고 보이진 않아요. 다만 좀 체력적으로 지쳐 보여요. 올해 10월 중순에 시작한 그녀의 시즌은 유난히 길었고, 이번이 5번째 경기니 지칠만도 하죠. 그녀가 올림픽 금메달 이후 의욕을 잃었다면 아예 토리노까지 오지도 않았을거에요. 우아하게 한국에 돌아갈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타이틀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 여기에 왔을 거고요. 올림픽 이후 밴쿠버, 서울, 토론토, 토리노의 일정이 참 무리였을텐데...아무리 그녀가 강하고, 정신적으로 무장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짧은 시간 동안 그 여정을 겪어낸 뒤의 육체적 피로를 이겨내기는 힘들어요. 특히 선수들은 육체적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누가 뭐래도 몸이 먼저에요
니체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정의와도 같은 건가요?
그런 셈이에요. 피겨 스케이팅은 아주 사소한 요소에도 영향을 많이 받아요. 경기장 빙질, 부츠, 의상, 음악, 분장, 웜업, 긴장감... 지푸라기 하나처럼 사소한 거라도 어긋나면 그게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은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극복할 수가 없어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니까요.
빙판 위에서 그렇게 절대적인 흠없는 아름다움을 아무 흔들림 없이 표현하려면, 아니죠. 그 아름다움 자체가 되려면, 그에 준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믿어요. 피겨는 기술과 예술로서 온전해지는 종목이에요. 거기에 김연아는 곧은 마음, 강한 정신력까지 갖췄어요. 나는 김연아를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지만요. 왠지 그녀가 많은 예술가들처럼 아이같은 순수함과 아름다운 심성을 갖춘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요.
김연아의 미래에 대해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요.
다음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따서 카타리나 비트처럼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2회 연속 금메달 리스트의 기록을 가진다면야 더 바랄 게 있을까요? 세계선수권에서도 몇번 더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거고요.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출전하는 한 금메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꽤 많은 세계 선수권 금메달을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한 가져갈 수 있을거에요. 김연아가 빠르게 사라져간 다른 올림픽 챔피언과 구별되는 점은, 그녀의 금메달이 운보다 실력으로 이뤄졌다는 거에요. 타라 리핀스키, 옥사나 바이울, 사라 휴즈, 시즈카 아라카와 처럼 지금까지의 올림픽 챔피언들은 스스로의 실력보다는 운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금메달을 딸 수 있었어요. 강력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기대주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넘어지면서 운좋게 그녀들이 메달을 가져갔어요. 그러니까 그녀들의 경우에는 은퇴를 하는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아마츄어 커리어를 지속한다 한들, 다시 운좋게 메달을 딸 수 있을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으니까요.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곧장 프로로 전향하는게 그녀들에겐 가장 영리한, 커리어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거에요.
그런데 연아는 달라요. 그녀의 실력으로 본다면 올림픽 메달도, 세계 선수권 금메달도 그녀가 독차지 해야 마땅한, 딱히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요. 실수하지 않거나 약간의 실수만 한다면요. 하지만 누가 그녀에게 강요할 수 있겠어요? 그 고된 컴페티션을 지속하라고.. 참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나도 스케이터였기 때문에 알아요. 그 힘들고 고된 일을 다시 하라고, 아무도 그녀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영원한 무적불패의 챔피언으로서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쉽지 않아요. 어려운 일이죠.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건.
그녀의 스케이팅을 오래오래 보고 싶고 코멘터리를 하고 싶은데 동시에 그녀가 모두의 기억 속에 무적의 스케이터로 남기를 바라니,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린다 한들 존중해야죠. 그리고 그녀의 행복을 기도할 거에요.
개인적으로는 어쨌거나 아직은 은퇴하기엔 좀 이르죠. 지금 열 아홉인데, 아직 그녀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들이 많아요. 이십대 초반의 좀 더 무르익은 여인의 모습으로 해보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겠어요? 카타리나 비트가 1984년 사라예보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다면, 그녀를 세계에 각인시킨 1988년 캘거리의 카르멘은 없었을 거에요.
2006년, 내가 처음 김연아를 류블랴나에서 봤을 때, 그땐 스케이팅을 아주 잘하는 소녀라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의 10년간 피겨 스케이팅을 이끌어 갈 존재라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는 스케이트를 타는 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더군요. 교정기를 낀 수줍은 소녀였던 그때부터 매력적인 본드걸이 된 지금까지 김연아는 단 한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어요. 놀라울 만큼 해가 바뀔 때마다 진보와 발전을 거듭해 왔어요. 그러니 좀 더 높이 날아가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 스스로도 많은 고민이 될 거에요. 피겨스케이팅이 참 고되고 힘든 운동이기도 하고, 그녀 어깨에 걸린 전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감도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한계가 어딘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하는게 모든 선수들이 늘 도전하고 있는 과제이기도 해요. 김연아의 스케이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카타리나 비트의 카르멘처럼, 야구딘의 아이언 마스크처럼 음악과 동시에 전 세계가 기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더 해주기를 바란답니다. 그녀라면 가능할 거에요. 온 세계를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일이. 피겨 스케이팅의 다른 차원을 열고 우리를 그 신세계로 이끄는 일이.
2010년 3월 28일, 갈라를 앞두고, 토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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