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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포스코(POSCO) - 포항제철

호남인1 2011. 1. 31. 10:05

주식회사 포스코(POSCO) - 포항제철

 

주식회사 포스코(POSCO)는 세계 2위의 철강 회사이며, 본사는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괴동동에, 광양제철소는 전라남도 광양시 금호동에, 서울사무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포스코는 포항시와 광양시에 2곳의 일관 제철소가 있으며, 일본오사카부의 물류센터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 US철강1986년 4월 1일 합작 법인으로 설립한 냉연 단순압연 법인인 UPI(USS-POSCO Industries)가 있다. 이 밖에도 중국 강소성 장가항에 중국 사강그룹(沙钢集团)과 합작으로 1997 ~ 2006년, 3단계로 완공한 스테인레스 일관 제철소인 장가항포항불수강(張家港浦項不銹鋼有限公司) 등이 있다.

포스코는 "한강의 기적"으로 칭해지는 기적적인 경제 성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동차,조선업 등 각종 기간 산업들은 포스코에서 공급하는 철강 제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 40년간의 급속한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겨지고 있다.  본문/워키백과/http://ko.wikipedia.org/wiki/포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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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5개국 8개사의 연합체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어 1968년까지 예비협정, 기본협정, 추가협정의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이 이루어졌다. KISA와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1967년 7월에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대한중석이 종합제출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1968년 4월 1일에 대한중석을 모태로 하여 포항제철이 창립되었다. [1] :36 대한민국 정부가 3억 원(75%) 대한중석이 1억원(25%)을 출자하여 1968년 4월 1일에 설립자본금 4억원으로 설립된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는 국영기업으로 운영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의 창업식을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개최했다. 하지만 당시 포철이 정상화되기까지는 많은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은 KISA에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해가 다 가도록 제대로 된 자금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세계은행의 한국 담당자인 영국인 자페가 포철을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밤늦은 시각까지 포이에게 한국의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사업적인 면에서 단호했던 포이 앞에 결국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KISA로부터 차관을 조달하는 데 실패하였다. 내심 미안했던 포이 측의 배려로 박태준은 하와이의 고급콘도에서 휴식을 보내게 되었다. 이 휴식 기간 동안 박태준은 포철 건설에 관한 자금을 동원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 당시 8천만 달러 정도의 대일 청구권 자금이 남아 있었고, 일본은 자금을 제공하면서 돈의 용처를 명시해뒀으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그 후 박태준은 전원합의체라는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일본의 내각을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결국 일본의 지원 결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2] [주 1] 포항종합제철은 1973년 7월 3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포항종합제철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중화학공업의 상징적 존재였다. [3] 포항제철은 1994년 3월에 김만제 전 부총리를 4대 회장으로, 김종진 부사장을 7대 사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창립 후 처음으로 외부 인사에 의한 최고경영진을 구성하였다. 김만제 회장의 취임을 계기로 포항제철은 경영 전반에 걸쳐 본격적인 체제변환기를 맞이하였다. 김만제는 1994년 4월의 창립 26주년 기념사에서 조직의 유연성, 민주성, 투명성에 입각한 "녹색경영철학"을 제창하였다. [1] :142 1998년 7월 3일에 정부는 정부 및 산업은행 보유지분 26.7%를 1인당 3% 한도로 내외국인에게 분산 매각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후 정부 및 산업은행 보유지분이 여러차례 분할하여 매각되었다. [4]2000년 10월에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36%를 매각하여 완전히 민영화되었다. 2002년에 명칭을 포항종합체철주식회사에서 포스코로 변경하였다. 2003년에 부임한 이구택 회장은 4년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각각 71%, 112% 높이고, 주가도 2003년 3월에 9만 9000원대에서 2007년 현재 30만 원을 훌쩍 넘겨 놓았다. 또한 2006년부터 철광석 산지인 인도에서 유례없는 국외 제철소 건립을 추진 중이었던 그는 포스코를 세계 속의 기업으로 바꿔놓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5] 뉴욕(1994년 상장), 런던(1995년 상장), 도쿄(2006년 상장) 증권시장에도 포스코 주식이 상장되어 있다. 포스코에 대하여 2007년 아르셀로 미탈 그룹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여, 포스코가 경영권의 방어를 위하여 약 1조원에 달하는 돈을 소비하면서 자사주를 매입하였다. [6] [7] 결국 아르셀로 미탈의 적대적 합병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포스코는 당시 합병 시도가 가능하였던 것은 외국인 지분이 60%를 상회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우호주식을 확보하기 위하여 2006년 10월 신일본제출과 지분 2%를 상호 매입하기로 하는 약정을 체결[8]하였고, 2008년 국민은행과 3천억원에 상당하는 주식을 맞교환하였다. [9]

 

 

포스코는 아직 정치적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코 회장은 정권 교체 때마다 외풍에 휩쓸려 퇴진한 전례가 있다. 김영삼 정부 때는 박태준 회장이 임기 중이던 1992년 10월 물러났다. 박태준 회장은 포철을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키운 한국철강업계의 명실상부한 대부이자 세계철강업계의 거목으로 꼽혀 왔다.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스코를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 온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정부와 불화로 결국 정권 수립 직전에 회장직을 내놨다. 1992년 10월 5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당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포철은 긴급이사회를 소집, 박 회장의 사퇴번의를 촉구키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11] 회장직은 황경로 당시 부회장이 넘겨 받았다. 10월 9일 오후, 긴급이사회는 대표이사 회장에 황경로 부회장, 대표이사 부회장에 정명식 사장, 대표이사 사장에 박득표 대표이사 부사장을 각각 선임했다. [12] 1993년 3월 12일 제25회 정기주주총회에서 신임회장에 정명식 현 부회장, 사장에는 조말수 수석 부사장이 승진, 선임되었다. 또한 박태준 명예회장과 황경로 회장 박득표 사장의 사표가 각각 수리되었다. 황 회장은 임기 6개월을 간신히 채운 것이다. [주 2] [13]이날 박태준의 측근 인사들도 배제되었다. [14] 1993년 말, 박태준은 일본에서 월간지 "한국논단"과의 회견에서 한국 정부와 포철을 강도높게 비난했고, 특히 조말수 사장 등 개혁주의세력을 비난했다. 1994년 1월초, 인사 문제 등으로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고,[15] 이어 2명 모두 동반퇴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94년 1월 2명은 사표를 제출하였다. 정명식 회장은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 지 1년여 만에 물러난 것이다. 1994년 3월 8일 제26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이들 2명의 사표가 수리, 퇴임하였다. 이렇게 약 2년간의 과도기를 거쳐 이 주주총회에서 김만제가 새 회장에 선임되었다. [16] 재무장관 출신의 김만제는 사상 첫 외부인사인 회장이었고 유일한 외부인사 발탁 기록을 남겼다. 당시 포스코 지분을 재무부가 20.0%, 산업은행이 14.7% 보유하던 시절이어서 외부인사에 대한 뒷말이 많았다. 그 전까지 포스코 내부에서는 사장-부회장-회장 순으로 단계를 밟아 승진하는 절차를 깼다는 비판이 컸다. 김만제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4년간 포스코 수장직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이른바 "DJP 연대"를 통해 박태준 명예회장(당시 자민련 총재)의 발언력이 다시 강화된 1998년 당시, 포스코는 감사원의 대대적인 감사를 받은 바 있다. 60여 명의 감사 인력이 75일 이상 감사에 매달렸을 정도이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와 유상부 회장 등 "TJ 사단"이 감사원 감사를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김만제 전 회장 체제의 흔적을 지울 기회로 여기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17] 결국 김만제 회장은 물러났다. [18] 유 전 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지난 1998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5년간 포스코를 맡았다. 유 전 회장은 연임에 성공했지만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임기를 못 채우고 이구택 회장에게 자리를 내줬다.

2007년 2월, 이구택 회장의 연임이 결정될 때, 사외이사들로 구성된 CEO후보추천위원회는 포스코가 오너없는 기업인 만큼 CEO 교체 이후 경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투명한 승계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경영진에게 요구했다. 또 단지 대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CEO가 연임하는 폐단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19] 2008년 11월, 정준양(생산기술부문장) 대표이사 사장이 포스코건설 사장직무대행으로 선임되면서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3인 대표이사 체제에서 이구택 회장, 윤석만 사장 등 2명이 대표이사를 맡는 체제로 바뀌었다. [20] 2009년 1월 15일 이구택 회장은 이사회에서 사임을 표명하였다. 포스코 측은 "이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기반을 구축한 것을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용퇴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21] 김 전 회장 이후 유상부 회장과 이구택 회장은 모두 포스코 출신이다. 그러나 두 명 모두 연임에 성공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는 기록을 만들었다.[10] 2009년 1월 29일 최고경영자(CEO) 추천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회의석상에서 윤석만 포스코 사장은 외압이 있음을 폭로했다고 알려져 있다. CEO 추천위 회의에 앞서 사외이사들은 이구택 회장을 비롯한 포스코의 주요 임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어떤 사람이 차기 CEO로 적합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임원들은 특정인을 거론하지 않은 채 "이러이러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돼야 한다"는 취지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겨레21> 취재에 응한 사외이사들은 "윤석만 사장의 폭로에 앞선 진행된 이구택 회장의 인터뷰에서, 이 회장은 정준양 사장을 뽑았으면 한다는 자신의 뜻을 명백하게 드러냈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17] 이러한 이구택 회장의 갑작스런 사퇴 표명과 정준양 포스코 건설 사장의 차기 회장 내정으로 인해 정치권의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 의혹이 제기되자, 사외이사 안철수는 이를 부인하였다. [22] 이러한 의혹과 관련해, 포항지방법원은 당시 회장 후보 선출 과정에서 열린 이사회 의사록을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23] 2009년 2월 27일, 주주총회에서 정준양이 대표이사 회장에 선임되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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